하늘의 기쁨

하늘의 기쁨/눅15:1-10

하늘의 기쁨
눅15:1-10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할 때, 아파트나 동네 스피커에서 다급하게 올려 나오는 목소리가 있다. \\\"알려 드립니다. 어린아이를 잃어버리고 찾고 있습니다. 얼굴은 둥글고 긴 편이며, 눈이 큽니다. 상의는 빨간 스웨터에 하의는 검은색 바지를 입은 4살 된 여자아이입니다. 이런 아이를 보신 분이나 보호하고 계신 분은 동사무소나 관리실에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그 방송을 부탁한 부모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고도 남아서 혀를 끌끌 차면서 안타까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알림도 있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습니다. 이름은 뽀미이고, 흰색 긴 털을 곱게 빗어서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습니다. 주인이 애타고 찾고 있습니다. 그런 개를 보신 분이나 보호하고 계신 분은 연락바랍니다. 후사한다고 합니다...\\\" 개를 잃고 애간장을 녹일 주인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가 싶어 조금 짜증이 생기기도 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가? 아마 크던 작던, 가치가 낮은 것이든 높은 것이든 대부분 잃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 중에는 비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나아갔다가 비가 개고 나서는 깜박 잊어버리고 돌아온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 여러분은 돈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했는가? 예전 사람들에 비해 요즘 사람들은 잃어버리고도 찾으려고 별로 애쓰지 않는다는 평판이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태도는 천차만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1,2백원쯤 잃어버렸다면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액수가 수 백만원, 수 천만원을 넘어간다면 그냥 앉자있을 수만 없게 될 것이다.

애완견 한 마리를 잃었어도 식사시간을 잊고 온 동네를 뒤집고 다닐 것이다. 그래도 못 찾을 경우, 포기하고 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자기 아이를 잃어버렸다면 입장이 전혀 달라질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포기란 있을 수 없다. 재산을 다 달란들 아깝겠는가? 부모 목숨을 내 놓으라고 한들 주저하겠는가? 한 평생이 다 걸린들 잊어버리겠는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것을 찾기까지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할 것이다. 찾고, 찾고, 또 찾아 드디어 발견되면 어떻게 하는가? 그 때 기분이 어떤가? 아마 천하를 다 얻은 듯 기뻐 뛸 것이다. 방금 전까지 가슴 졸여 애간장을 끓였던 고통이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가장 크게 감사하며 감격할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세 경우의 잃어버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맨 먼저는 양을 잃어버린 목자의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의 이야기이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이 이야기들이 모두 사람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일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가 곧 하나님이시다. 소중한 드라크마를 잃고 찾는 여인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집나간 아들을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는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말씀들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1. 죄인들과 의인들

본문에는 아주 대조적인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세리와 죄인들이 그 한 부류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나머지 한 부류이다. 먼저 나온 사람의 부류가 죄인들로 판명이 난 사람들이라면 나중 나온 사람들은 당시에 의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었다.

세리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정부의 앞잡이들이었다. 동족에게 과도한 세금을 뜯어내서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정상적인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함께 같은 자리에 앉는 것조차 기피했다. 그런 평판과 천대를 받으면서 누가 세리가 되고 싶었겠는가 마는 그 직업에 상당한 수입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명칭 하나만으로도 거기 해당하는 사람들이 신분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역시 세리 못지 않게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기피인물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면서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부류가 바로 그들이었다.

다만 유독 예수님만 그들을 멀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가셨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꺼려하지 않으셨다. 그러시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세리와 죄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자기들의 친구로 알았다.

의인의 부류에 속한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볼 때 참 한심스런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최소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겨지는 그 분이 어떻게 자기들이 아닌 세리들과 함께 어울린단 말인가? 정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면 죄인들에게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오셔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따라올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종 바리새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듣는데, 그들이 이름만 바리새인이었고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수준이 미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실제 생활에서 보통 사람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종교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들은 기도 생활에서 모범적이었다. 하루 세 번씩 성전에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들 아니었는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서도 제일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십일조를 드리는 데에서도 얼마나 세밀했는지 모른다. 정규적인 주요수입에서만 드린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부수입에서도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들이었다. 서기관들 역시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세리와 죄인들 같은 사람들과 비교되기를 거부하는 부류들이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아닌 사람들도 그런 차이를 다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예수님만 그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그 두 부류를 똑같이 대하시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의인의 부류에서 보면 얼토당토 않는 일이었던 것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의인의 부류에 넣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맹점을 바로 이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죄인의 부류에 속한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많은 월등한 사람들이었다. 두 부류의 사람과 사람을 비교평가 할 때는 그렇다. 그러나 의인이나 죄인이 되는 것은 사람, 사람을 비교해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 가지신 기준으로 평가하시는 일이다.

그럼으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자기들을 세리, 죄인들과 비교해 보고 진절머리를 치면서 스스로 의인의 편에 있는 것을 감사하고 자랑스레 여겼던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아는 것이다. 말씀이라는 거울에서 솔직한 자기 모습을 본 사람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똑같은 바리새인 출신 사울이 바울이 된 다음 뭐라고 고백했는가? \\\"나는 죄인 중 괴수니라.\\\"(딤전1:15)

여러분은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가? 의인인가? 이에 대한 정직하고 바른 판단이 없이는 온전한 구원은 불가능할 것이다. 스스로를 병든 환자로 판단하면 곧장 의사에게 달려갈 것이다. 그러나 몸 속에 암덩이가 자라고 있어도 자각 증상이 없어서 건강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2.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예수님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만 여기면서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유로 가르치셨다. 맨 먼저는 목자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예로 드셨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치기에 아주 익숙해 있었다. 자기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왕까지 모두가 양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이 가장 즐겨 암송하는 성경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되는 시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있는 사람들은 더 자세한 설명이 없더라도 목자와 양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다.

목자는 양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풀밭을 찾아서 그리로 양떼를 몰아간다. 그 풀밭이 다하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그렇게 하다보면 들판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경우 양들이 안전하게 밤을 보낼 수 있도록 울타리를 치고 거기로 양들을 몰아 넣는다. 마지막으로 출입구를 막아 사나운 짐승들이 양을 해치지 못하도록 목자는 양들과 밤을 보내게 된다. 그럴 때 목자의 자리는 바로 출입구에 있었다. 양 한 마리가 들어날 만한 출입구를 목자가 몸으로 가로막아 눕는다고 한다. 안으로는 양의 움직임을 살피고 밖으로는 맹수들을 감시하기 위한 자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 것이다.

아침이 되면 다시 깨어서 양들의 이름을 불러 체크를 하고 다시 광야 깊은 곳까지 풀밭을 찾아 양을 이끌어 간다. 그럴 때 양들은 주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훈련된다. 어느 때라도 \\\"가자\\\"고 주인이 외치면 일제히 그 목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100 마리의 양 중 한 마리가 풀을 뜯어먹는 데 정신 팔려 주인이 \\\"가자\\\"고 외치는 소리를 건성으로 듣고 말았다. 아마 좀 늦게 출발해도 얼마든지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점은 사람이 제 욕심과 판단에 끌려 생명의 길을 잃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목자는 곧 한 마리의 양이 이탈한 것을 알아낸다. 그때부터 목자가 어떻게 하는지 주목하라.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다. 이는 마치 열심과 정성이 뛰어난 바리새인들을 따로 두고 그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리 한 사람, 죄인 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주님의 모습과 같다.

목자는 어떻게 양을 찾는가? 언제까지 찾는가? 들판을 대강 둘러보다가 포기하고 가지 않는다. 어두워지고 시간이 없다고 중단하지도 않는다. 드넓은 덤불 속에서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는 일이 모래밭에 흘린 바늘 찾기와 같지만 불가능하다고도 하지 않는다. 찾도록 찾는다. 찾아지기까지 찾는다. 그렇게 해서 기어코 찾아낸다.

찾아낸 양을 어떻게 하는가? 즐거워서 어깨에 업고 집으로 온다.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잔치를 벌여 함께 즐기자고 한다. 그 잔치의 비용이 아마 양 한 마리 값을 넘어서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양을 찾은 목자가 과도하다고 할만큼 흥분상태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 실제로 양을 기르는 목자가 아무리 양을 아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닐 것 같다.

이 비유가 무엇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인가? 세리 한 사람, 죄인 한 사람을 찾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 아닌가? 7절.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조금도 과도하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기쁨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찾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갈 때에 아무 것도 아까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전혀 무가치한, 모든 사람이 멸시하는 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차별이 없으시다.

3. 잃어버린 드라크마

다음에는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드라크마는 그리스의 은화다. 로마의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당시에 양 한 마리가 1드라크마였다고 한다. 그렇게 큰 화폐 단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 (현금으로 한 5만원 정도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잃어버린 여인이 어떻게 하는가? 8절. 온 집안을 모조리 쓸어가며 찾는다. 등불을 켜들고 속속들이 찾는다. 언제까지 찾는가? 몇 시간 찾아보다가 그만두지 않는다. 몇 군데 있을만한 곳 찾아보다가 없다고 중단하지 않는다. 이 여인 역시 찾도록 찾는다. 부지런히 찾는다. 찾아서 드라크마를 손에 넣기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 이경우도 소요된 시간이나 노력으로 할 때 잃어버린 드마크마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찾는 일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 드라크마가 여인에게 아주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뭣하러 그런 노력을 기울이겠는가? 당시의 관습을 살펴보면 드라크마 은화는 종종 여인의 이마에 두르는 장신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신랑이 신부에게 드라크마 여러 개를 한 줄로 연결한 이마걸이를 결혼기념물로 선물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여인은 드라크마 열 개가 매달린 결혼 기념물을 사랑의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것이 현금으로 얼마인가에 상관없이 여인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장신구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드라크마 하나가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다. 보통의 것이라면 다른 드라크마로 얼마든지 보충하면 그만이지만 그것이 남편이 중 사랑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대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떨어져 나간 드라크마 그것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온 집안을 샅샅이 쓸어가며 등불을 켜 비추어 가며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구석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드라크마가 손에 잡혔다. 그 여인이 어떻게 하는가? 9절. 역시 이웃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이며 함께 즐기자고 한다. 양을 찾은 목자와 그 감격이 똑같다. 이 역시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듯 싶다. 뭐 그 정도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싶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어디에다도 비길 수 없는 큰 기쁨인 것이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주님이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맞아 주시며, 그런 감격으로 우리를 대하신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께 그런 기쁨을 드리는 사람들인가? 하나님께서 죄악의 어두운 세상에 있는 나를 그토록 간절히 찾으신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불가능해도 모든 것을 걸고 나를 찾아 주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믿는가?

우리교회는 작년 여름 수련회에서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는 주제를 사용하고 그런 주제가를 불렀던 경험이 있다. 그 노래를 지금도 기억하는가? 여전히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기쁨되기를 원하는가? 10절 말씀을 함께 보면서 답을 찾아보자.

주님은 많은 것을 받으심으로 기쁨을 삼지 않으신다. 미가 6:6-8을 읽어보겠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기쁨으로 삼기 원하신다. 우리의 회개를 즐거워하신다.



[ 허순혜 ] 한 마리의 잃은 양이 되어 방황했던 지난 시간들이 너무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제, 주님께 기쁨의 사람이 되길 소원합니다. 참으로 은혜의 말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