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에 관한 자료
장례(葬禮)
1.장례의 유형 사람이 죽으면 그의 시신 처리문제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인도의 파시족은 죽은자의 시신을 도크마스(침묵의 탑)위에 올려놓고 새들이 먹어치우도록 한다.이른바 조장(鳥葬)이다. 한편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은 동료들이 죽으면 그 유해를 물고기 밥으로 제공하는 수장을 지낸다. 불교인들은 죽은 사람의 극락 생활을 기원하면서 통상 화장을 하게 마련이다. 이런 장례법과 함께 우리들의 이성으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시체처리 풍속도 있다. 즉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부 원주민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일가친척들이 모여 깨끗히 먹어치운다고 한다.식장(食葬)이라고나할까? 그들은 이 식장을 통하여 고인으; 훌륭한 자질을 자기들이 이어받게 된다고 믿고 있다.
2.구묘(舊墓) 화장제 딜레의 `한국교회사 서설(韓國敎會史序說)\'에 이런 견문(見聞)이 적혀 있다. 어느 한 상민(常民)이 자기 아버지가 묻힌 산소의 일부를 권세있는 한 양반에게 빼앗겼다. 양반은 풍수설에 맞추어 자기 어머니를 그 산소에 묻고 이 가난한 상민으로 하여금 묘지기를 시킴으로써 먹고살게 해주었다. 치상한 지 며칠 후 양반이 산소에 가보았더니 묘지기가 자기 아버지 무덤과 양반 어머니 무덤 사이에 가서 울타리를 쳐놓은 것을 보았다. 영문을 물었다. `며칠 전날 밤 꿈에 저의 아버지 시체가 일어나 자당님 산소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 그 후의 일은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망측스러운 행위를 막기 위해 가시 울타리로 막아버린 것입니다.\' 양반은 그날 밤으로 어머니의 시신을 딴 곳으로 옮겨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은 죽어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생연결관(死生連結觀)이기에, 죽어도 살았을 때와 같은 음식을 젯상에 차려드리고, 또 죽어서도 곁에 있는 망인이 음심을 품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화장(火葬)을 하는 불교문화가 들어온 지 수천 년이 되지만 소각 말소시키는 시신(屍身) 처리가 극소수에 머물고 여전히 토장(土葬)을 하는 것도 바로 죽어도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사생연결관의 소치인 것이다. 유럽에서도 토장이 상식화돼 내려왔는데 기독교 교의(敎義)상 화장이 불가하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중세에 이단자(異端者)에게 화형(火刑)을 처했던 데서 화장에 대한 강한 거부감으로 토장을 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산업혁명 후 급작스레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묘지문제가 심각해지자 화장 운동이 벌어졌고, 화장운동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자이거나 반(反)카톨릭 신자가 많은 것이 이유가 되어 카톨릭 교회에서는 1886년, 92년, 97년, 1926년 네 차례에 걸쳐 화장 금령(禁令)을 내렸었다. 로마 법황(法皇)이 이 화장 금지령을 정식으로 철폐한 것은 겨우 27년 전인 1963년 7월 5일의 일이다. 현재 유럽 각국의 화장률을 보면 50% 이상 화장하는 나라는 영국, 체코,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요, 30%대가 네덜란드, 노르웨이요, 10%대가 서독, 오스트리아, 핀란드, 캐나다요, 미국은 10% 미만, 프랑스는 겨우 1%에 불과하다. 함부르크의 경우 가족묘지는 인정하되 1제곱미터에 골호(骨壺) 6개를 세로로 세워 묻게 함으로써 묘지의 면적을 극소화하는가 하면, 화장이건 토장이건 25~30년 후면 영구 묘소로부터 제외하게끔 묘지법을 고치는 등 묘소의 국토 이용면적 침해를 극소화하는 추세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천주교 묘지에 토장한 무덤을 20~30년 후에 화장, 납골(納骨)하는 혁신적인 묘지 안을 주교회의에 상정, 의결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세계적 흐름에 동조하는 용기있는 결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에 관계 장관은 이 방법을 일반인에게도 권유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억센 사생연결관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조상 숭배라는 험한 난관이 쉽게 극복되라라고 보지는 않는다.
3.마지막 국장 행렬 옛날 왕-왕비-왕세자-왕세자비가 죽으면 국장(國葬)을 선포하고 맨 먼저 시장 거래를 중단시키는 철시령(撤市領)을 내렸다. 장례에 필요한 물품 확보와 상여를 메고 끄는 여사군(轝士軍)을 상인으로 충당하기 위해서다. 여사군은 직접 상여를 메는 운군(運軍)과 상여의 앞 뒤를 줄을 달고 끄는 인군(引軍)으로 대별되는데, 상인들은 인군에만 충당된다. 계급 의식이 대단했던 때라 양반이나 양반 자제 아니고는 운군이 될 수 없었다. 운군으로 선택받으면 벼슬 하나 하는 것이 되고 가문에 자랑거리가 되었기로 양반 자제들이 앞다투어 운군이 되고자 했다. 계급 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한 1919년 고종황제의 장례 때만도 운군이 됨으로써 양반 신분을 얻는 호기(好機)를 놓칠세라 멀리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자식들까지 퇴학시키고 불러들이곤 했다. 이 폭발적인 수요(需要)를 악용, 당시 왕실관리 관청인 이왕직(李王職)에서는 1백명의 정원(定員)을 훨씬 넘는 4백 50 명에게 두당 2백 원씩의 단가(單價)를 매겨 그 `양반 권리\'를 팔아먹음으로써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인군(引軍)은 시장 상인들이 백목전-유기전-어물전 등 업종별로 교대해서 상여를 끌었다. 이들에게는 신분이나 벼슬 대신 교대하는 곳마다 차일을 쳐놓고 향응을 베푸는 것으로 자원봉사에 대한 보상을 하였다. 국장(國葬)이 선포되면 철시령과 더불어 전국에 기생들 차출령(差出領)이 내린다. 이렇게 차출된 기생들은 인산(因山) 날 운구하는 연도에서 곡(哭)을 시키고 곡이 끝나면 인군(引軍)들 쉴 참이나 교대 참에서 국을 끓이고 안주상을 차려 인군 대접을 한다. 국상중인데도 무척 문란했지만 그 문란이 관습적으로 보장받았다 한다. 민비(閔妃) 장례의 산릉(山陵)에 초대받아갔던 미국인 선교 의사 에비슨 박사의 회고록에 보면 능주변에 임시로 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만 5천여 명의 상객(喪客)이 운집해 연일 호곡을 하는 가운데 고종황제가 직접 나서 능사를 지휘하고 있음을 인상적으로 적고 있다. 조선왕조가 망한 이래 고종-순종-영친왕-윤비 네 차례의 국장(國葬)이 있었다. 그 마지막 국장으로 황태자 영친황비의 장례 행렬이 어제 있었다. 형식은 가족장이지만 가능한 한 태자비 국장의 의례 궤범(軌範)대로 베풀었다 하니 감개무량하다. 왜냐하면 이 국장은 백성들과 정서적으로 맺혀있는 조선왕조와의 마지막 결별이기 때문이다.
4.방상시(方相氏) 언젠가 율곡(栗谷)학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선비의, 달을 넘긴 유월장(踰月葬)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유월장이 될 것이라 하여 많은 민속학자들과 외국인들이 지켜보았다 한다. 그렇다면 그 장례행렬의 맨 앞장에서 귀신탈을 쓰고 지전(紙錢)을 뿌리던 방상시(方相氏)도 마지막 방상시가 될지도 모른다. 노인들은 오랜만에 다시 보지만, 중장년(中壯年)들만해도 처음 보는 방상시는 옛날 장례행렬에 반드시 앞장서게 마련이었다. 문헌에 적힌 방상시의 몰골부터 보아보자. 귀면(鬼面)의 탈을 쓰는데, 눈이 양쪽에 두 개씩 도합 네 개 있는 사안(四眼) 방상은 5 품 이상의 벼슬아치, 이안(二眼) 방상은 5 품 이하의 벼슬아치의 초상에 쓰도록 신분에 차별을 두고 있다. 검은 곰가죽을 둘러쓰고 붉은 바지를 입었으며 오른손에 장도(長刀)나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어 이를 휘두르며 전진한다. 아무나 방상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로 형장에서 참수를 하는 망나니가 방상시로 선택받았던 것이다. 왜 방상시를 장례행렬의 맨 앞에 세우는 걸까. 불행(危)과 병(病)을 몰고와 해코지를 하는 악귀(惡鬼) 아귀(俄鬼) 원귀(怨鬼)들이 무서워 접근 못 하는 어떤 가공할 존재를 만들어 둔다는 것은 미개사회에 있어서 합리적이었다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처용랑(處容郞)도 그 가공할 존재 가운데 하나다. 신라 헌강왕 때 동해룡(東海龍)의 아들인 처용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역귀(疫鬼)에게 간통당한다. 처용이 알고도 태연자약하자 역귀는 그 큰 그릇에 감동하여 사죄를 하고, 그 후부터 처용이 나타난 곳에 귀신들이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 후부터 처용의 부적이나 처용의 인형(제웅)이 귀신 쫓는 방패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방상시는 바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귀신 쫓는 가공할 존재다. 고대국가인 주(周)나라 때 귀신 쫓는 관직이 있었는데 그 벼슬아치를 방상시라 했고,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장례 때 이 방상시를 앞세워 죽은 사람 가는 앞길에 악귀를 쫓게 했던 것이 그 기원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해서 귀신이 쫓겨갈리 만무하다. 귀신에게는 하나님외에는 두려운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삶을 저주하고 온갖 질병과 가난과 슬픔을 안겨주는 악한 귀신을 내어 쫕기 위해서는 예수 이름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5.미망인 세상은 진보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역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인도의 힌두교도 가운데 과격파측에 속하는 일단의 여신도들이 남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는 순사제도(殉死制度)를 합법화하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그런 진보 속의 역행이랄 수가 있겠다. 힌두교의 종법(宗法)인 이 \'삿치\'라는 순사제도가 비인간적이라 하여 법으로 금한 것은 영국 통치시대였으나, 순사를 하는 열혈신도가 아주 단절될 리는 없었다. 워드가 쓴 \'힌두\'란 책에 보면 삿치의 진행은 다음과 같다. 남편의 유해가 운반되면 미망인(未亡人)은 망고의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꺾어 들고 성스러운 갠지즈 강물에 들어가 목욕을 한다. 이 성수욕(聖水浴)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미용사로 하여금 두 발바닥에 화장을 시킨다. 미망인은 \"머리카락수 만큼(힌두성서에 의하면 4천 5백만 개) 오랜 세월 동안 남편과 더불어 천국에 머물게 해주옵시며,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편의 조상들도 이 나의 아름다운 행위로 인하여 천국에 오를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하며 바라문 의식에 따라 기도를 올린다. 이 기도가 끝나면 몸에 화려한 장식이 베풀어지고 기나긴 여로에 대비한 음식이 주어진다. 그러는 동안 남편의 유해는 쌓아올린 화장터의 나뭇가리 위에 놓여지고, 미망인은 이 나뭇가리를 일곱 번 돌고 난 뒤 나뭇가리 위에 들어올려져 남편의 유해에 꽁꽁 묶인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나 가장 가까운 근친에 의해 점화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통곡 속에 산 채로 타오른다. 처절하다. 삿치를 거부하는 미망인은 사회적으로 소외받게 마련이라니 사회적 살인이랄 수 있다. 우리 나라에도 순사습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여(夫餘)시대에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을 순장(殉葬)한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죽었을 때만해도 순사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다 묻지 못해 들판에 시체가 즐비했다 한다. 김해에 있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무덤이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도굴당했는데, 20대로 보이는 두 젊은 여인이 순장되어 있었다 했다. 하멜과 더불어 한국에 표류했던 화란선원(和蘭船員) 에이복켄의 기록에 보면 \"조선에서 국왕이나 귀인이 죽으면 아름다운 여자노예를 산 채로 더불어 묻는데 무덤의 문이 닫히기 전에 약간의 식량이 주어진다\"고 했다. 한데 이 순장이 비인도적이라 하여 금령(禁令)이 자주 내려져 산 사람 대신 목인형(木人形)으로 대체하였던 것이다. 다만 남편 따라 죽지 못한 여자, 곧 \'미망인\'이란 말에 이 비인도적 습속이 살아 있을 뿐이다. 진작 없어졌어야 할 이 말이 미화(美化)까지 되어 쓰이고 있으니 관념적 \'삿치\'가 우리 주변에 그늘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6.초혼제 작곡가 쇼팽이 죽었을 때 꽃다발에 묻힌 채 열사흘 동안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거들랑 남녀 혼성합창곡인 모차르트의 `진혼곡\'으로 장례를 치러달라고 간절하게 유언을 했는데, 당시 교회에서는 남녀차별이 심하여 혼성합창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내 교회측이 굽히고 말았지만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신곁에 영원한 안식을 기원 받는 진혼곡이 없는 넋은 안정 못할 것으로 알았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사람의 죽은 넋은 향상 가족곁에 길이남아 안식을 취하려 든다. 그래서 장례 때 진혼을 하질 않고 초혼(招魂)을 했다. 임종을 지키다가 운명을 하면 맨 먼저 해야할 일이 떠나가는 혼을 잡아드는 혼 부르기-곧 초혼이었다. 죽은 이의 체취가 스민 저고리를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흔들며 떠나는 혼을 돌아 오라고 세 번 불러댄다. 자신의 체취에 미련을 못 버린 혼은 이 저고리에 유인되어 집안으로 모셔지고 신주(神主)에 정착하게 된다. 한국인의 망혼(亡魂)은 이처럼 죽어도 인간적이었다. 혼만 불러들이면 된다는 이 초혼의 논리는 시신이 없는 죽음에도 적용이 된다. 배가 뒤집혔다든지 하여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죽음에는 반드시 초혼의 무당굿이 따랐던 것도 이 때문이다. 널빤지에 닭 한 마리를 태워 사고 해역(海域)에 띄운다. 저승길을 잘 알고 있는 닭에 길잡이를 시킨 것이다. 그 뒤에 무당이 배를 타고 죽은 사람의 체취가 스민 저고리나 속곳을 흔들며 푸닥거리를 한다. 입었던 옷이 없으면 신발도 좋고 관도 좋고 망인이 쓰던 붓, 써놓은 시도 좋다. 망혼을 유인할 수 있는 망인의 체취가 스민 것이면 혼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혼을 불러들여 그 혼이 붙은 신물로 무덤을 만든다. 이를 허총(虛塚)이라 했다. 머리카락만 묻으면 발총(髮塚)이다. 옷가지를 묻으면 의총(衣塚)이요, 시를 묻으면 시총(詩塚)이다. 망인이 쓰던 물건에는 그 영혼이 스며있다는 물신숭배를 이같은 허총(虛塚)에서 보는 것이다.
7.순장(殉葬) 지금 경산(慶山)의 임당(林堂)고분에서 아기 왕관이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열살 쯤 돼 보이는 어린이 해골의 머리부분에 왕관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고대 신라의 부족국가였던 압독국(押督國)의 소공자 무덤임이 분명하다. 보다 주의를 끄는 것은 그 무덤에 20 대의 성숙한 여인을 순장(殉葬)하고 있는데, 서쪽에 머리를 두고 있는 이 여인의 두 가랑이 틈에 이 소공자가 동침하고 누워 있었다는 점이다. 피장자(被葬者)와 순장자(殉葬者)의 무덤 속 배치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 다리 가랑이 틈에의 안치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는 고대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죽은 왕자나 귀인의 무덤에 산 채로 사람을 묻는 순장 습속은 삼국시대 이전인 부여(扶餘)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기록이 중국 정사인 진서(晋書)에 나온다. 임진왜란때 김해에 있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무덤이 왜병들에게 도굴되었는데, `그 무덤 속이 무척 넓었으며 두개골의 크기가 쟁반만하고 손발의 뼈가 웅장했고, 그 양옆에 두 젊은 여인이 마치 산 사람처럼 누워 있었는데, 볕을 쐬자 변색한 채 으스러져버렸다\'고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적혀 있다. 순장은 죽어서 저승에 가더라도 되살아나 이승에서처럼 살기를 바라는 재생사상(再生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저승에 가서 같이 살 사람을 순장하고, 각종 장식이며 세간이며 마구(馬具)며 돈이며 심지어 저승의 땅을 사는 토지매매문서까지 함께 묻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 여인의 가랑이 틈에 뉘어 놓은 순장방식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탐라국(제주도)이 신라에 예속되기 이전, 탐라국 성주가 공물을 갖고 신라 왕실에 오면 신라 임금의 가랑이 밑을 기어 지남으로써 부자국(父子國)의 종속 예를 갖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이가 명이 짧다고 예언받으면 무당의 가랑이 밑을 기어지나는 고간례(股間禮)를 치르고 무당과 수영모자(壽永母子)를 맺는 습속도 있었다. 소꿉놀이에서 부자(父子)나 모자(母子)를 결정할때 가랑이 밑을 기어지나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던 것이다. 곧 가랑이 밑을 거친다는 것은 재생의 통과의례였으며, 나이어린 소공자를 생식력이 왕성한 순장 여인의 가랑이 틈에 뉘어 둔 것은 강력한 재생염원에서였을 것이다.
8.서낭당 제 명대로 못 살고 억울하게 숨진 원혼(寃魂)들의 원(怨)과 한(恨)을 푸는 진혼(鎭魂) 민속은 비록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이 공통되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희랍에서 터키로 가는 바다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노래로 울어댄다는 세이렌도 그 원혼들이다. 희랍에서는 해마다 이 세이렌의 진혼제를 올리는데, 세이렌이 등장하는 호머의 <오딧세이>가 공연되고 세이렌을 주제로 한 베르디의 <진혼 미사>가 연주된다고 한다. 독일 민요로 널리 불려지는 라인 강의 <로렐라이>도 이 비명에 숨진 원혼이다. 슈베르트의 소품에 <리타나이>라는 아름다운 가곡이 있는데, 독일에서는 특정한 날을 잡아 비명에 숨진 사람들을 진혼하는 아가씨들의 기도가 민속화돼 있었으며 이때 부르는 진혼곡이 <리타나이>인 것이다. 적화 이전의 베트남에서도 `암충신\'으로 불리는 영혼의 집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 역시 비명에 숨진 영혼들을 불러 위령하는 곳이다. 시나몬의 향을 태우며 `억울함을 나에게 나눠 주고 편안히 잠들라\'는 역시 진혼의 기도문을 외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물며 한에 민감한 우리 한국에서임에랴. 고려 때부터 국가적 규모로 성황제(城隍祭)를 베풀었는데 이 억울한 원혼들을 초혼하고 진혼하는 절차로 진행됐던 것이다. 이것이 민속화하여 산천(山川)이나 동구(洞口) 밖 등 도처에 널려 있는 서낭당의 서낭 신앙으로 보편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조(六曹)나 동헌(東軒) 등 각 관아(官衙)에는 부군당(府君堂)을 구내에 두어 관내에서 억울하게 숨진 이들을 위령하는 관행도 있었다. 그리하여 마을을 드나들 때마다, 또 산 넘고 물을 건널 때마다 서낭당에 돌을 얹거나 합장함으로써 그 원한을 항상 공감(共感), 나눠가짐으로써 위령을 했던 것이다.
9.초혼묘(招魂墓) 사람이 숨지면 맨 먼저 해야할 일이 고인의 체취(體臭)가 스민 저고리를 들고 지붕에 올라가는 일이다. 지붕 위에 서서 저고리를 세 번 휘두르며, 집을 떠나가는 고인의 영혼을 불러들인다. 이를 혼부르기 또는 초혼(招魂)이라 한다. 이렇게 불러들인 영혼을 신주(神主)에다 옮겨 좌정시킴으로써 무형의 영혼을 구상화(具象化), 사생(死生)을 연결 시킨다고 보았다. 우리 한국인의 영혼은 이처럼 머리카락-손톱-피같은 유체의 일부나, 체취가 스민 옷-신발-글씨같은 유물에 미련을 못 버리고 돌아오고 마는 마음 약한 회귀성(回歸性) 영혼으로 알았다. 우리 선조들 살아 돌아오기는 커녕 죽어 돌아올 기약도 없이 전장(戰場)에 나가게 됐을 때 마누라로 하여금 등짝을 바늘로 쪼아 그 피를 수건에 적셔두고 떠나는 관습이 있었다. 시체야 전장에서 썩어 문드러질지라도 영혼만은 그 피 묻혀둔 수건을 찾아 회귀하려는 슬프디 슬픈 비원(悲願)인 것이다. 이 피수건으로 초혼을 하여 빈무덤(虛塚)을 만든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하동(河東) 옥종면 대곡리에 가면 치마 무덤이라는 허총(虛塚)이 있다. 연산군이 그의 스승인 조지서(趙之瑞)를 바른 말 한다고 맷돌로 갈아죽여 한강에 버렸을 때 그의 아내 정씨가 그 흐르는 피를 치마에 적셔-초혼을 해서 묻은 무덤이라서 그렇게 불린것이다. 임진왜란 때 녹도(鹿島)에서 전사한 충장(忠將) 이대원(李大源)의 무덤은 시총(詩塚)이다. 죽어가면서 한삼자락에 써 보낸 시(詩)로 초혼하고 무덤을 이룬 것이다. 임진강 고랑포(高浪浦) 강변에는 꽃신 무덤이라는 무덤이 있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온 명나라 궁녀의 허총(虛塚)이다.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꽃신 벗어 놓고 투신한 것을 그 꽃신으로 초혼-, 무덤을 만들어준 것이다. 3.1 운동 70 주년을 맞아 시신의 향방을 모르고 있는 유관순(柳寬順) 열사의 초혼묘(招魂墓)를 고향인 아우내 매봉산 기슭에 만들기로 했다 한다.
10. 묘살이 옛날에 묘살이 20년에 단산(斷産)한 삶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과는 달리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묘 옆에 움막을 치고 3년을 살았다. 이 사람도 처음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므로 3년 묘살이를 했다. 그런데 3년이 마악 지날 무렵이번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삼촌이 죽었는데 그 삼촌한데 아들이 없어서 대신 묘살이를 했다.그 3년이 지나자 다신 삼촌의 어머니가 죽었고, 이어 장모가 죽어서 또다시 3년 묘살이를 했다. 장모 역시 아들이 없어서 사윈인 그 사람이 묘살이를 한 것이다. 이래서 묘살이 만으로 20년이 지나 단산이 되었다고 한다. 죽은 자를 위해 인생을 아무 의미없이 소비한 것이다. 산자는 산자를 위해 살아야 한다.
11. 상중에 아이를 낳으면 옛날 양반들은 상중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죽였다고 한다. 가문을 망쳤다는 생각에서이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지 3년이 안되어 아직 상복을 입고 있는 처지에 아내를 가까히 하여 자식을 낳으면 둘도 없는 불효자 취급을 했던 것이 그당시 문화였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산 사람의 생목숨을 끊은 것인데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새롭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