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치유자

상처 받은 치유자/벧전2:22-25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헨리 나우웬은 상처입은 사자가 치유의 천사로 변형된 모습이 예수를 통해 잘 나타나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1)영적인 돌봄을 갈망하기도 하고 2)상처입기도하는 세계에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매우 설득력있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개인적인 삶의 고통과 상처들을 치유의 영과 자원으로 변형시키는 , 상처입은 치유자들(wounded healers)이 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목회자는 자기시대의 고통을 마음으로 인식하고 이 인식을 자기의 봉사의 출발점으로 삼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가 혼란스런 세계의 한 복판에 뛰어들고 격동적인 세대나 죽어가는 한 사람에게 말을 걸려고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이런 노력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고통으로 상처를 입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봉사는 진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 원리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야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적(메시야적) 사역의 특징은 치유입니다. 그리고 그 치유의 원천의 힘은 자신이 채찍에 맞으시고 인간의 모든 간고를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심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연히 상처입은 치유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임을 뜻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의 기초입니다.

이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이미지는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목회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다음 몇 가지 의미를 주고 있다.

첫째, 기독교 공동체는 “상처입은 치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렇게 되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의 삶의 스토리를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행복”에는 늘 가슴앓이도 함께 따르는 법입니다. 승리와 성공의 곁에는 항상 유혹과 상처가 함께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마치 야곱과 같이 절뚝거리며 자기 인생을 통과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약점들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되고 또 다양한 비극들 때문에 인생 불구자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웨슬레의 가르침처럼 “계속하여 완전에 다가서려고”(go on to perfecttion) 몸부림쳐 보아도 여전히 비틀거릴 확률이 더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삶의 투쟁과 고난을 받아들여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를“고통과 사귄다”는 개념으로 말한 신학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승리와 비극이라는 우물에서 치유의 물을 길어 올립니다. 이 물은 상처를 입은 자만이 체험한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샘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오히려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긍정할 수 있었습니다.(고후12:9-10)

☛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유 공동체는 반드시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킨다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치유는 심지어 자신의 죽음이라는 희생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독교 공동체란 “상처가 치유되고 고통이 완화되기 때문이 아니라 상처와 고통이 새로운 비전을 위한 개방과 기회”가 되기 때문에 치유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나니”란 말씀처럼 예수님이 자신의 상처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천국의 비전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크게는 하나님 나라요, 작게는 모두가 협력하여 아름다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섭리를 뜻합니다.

그래야지 우리는 고난과 그 아픔 속애서도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우리 자신의 고통스럽고 기쁜 경험들이 삶을 투명하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되도록 우리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게 됩니다.”
목회나 진정한 의미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역설적인 것은, 바로 우리의 약점들이 우리의 장점들의 근원이 되고 또 우리의 상처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겉 사람이 매우 피폐하게 보일 수는 있어도 한편으로는 그의 내면이 매우 성숙해 보이는 인생의 스승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셋째,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들이므로 우리는 더욱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구원하러 오신 깨어진 사람들로서의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움으로써, 상처입은 치유자인 우리는 고통당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감정적으로 보다 더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들의 좌우명은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라,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 되어야 합니다. 효과적인 목회나 이상적인 신앙생활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통곡과 슬픔의 정서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렘9:1, 표준 새번역)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설득력있게 다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마굿간에 태어나시고, 갈릴리의 소외된 자들과 항상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 9:58)

넷째, 무엇보다도 상처입은 치유자들은 그 치유의 근거를 주님께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치유와 건강함과 온전함은 단지 우리의 아름다운 삶의 경험들이나, 고통당하는 이들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공감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거하는 “그 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치유의 근거를 사람이나 환경에 둘 때 우리는 실망하고 실족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사야 선지자가 그리도 감동적으로 묘사한 “고난받는 종”을 변함없이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사53:4-5, 공동번역)

“상처입은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저 겸손하고 비천한 노예들보다 더 잘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몸과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의 깊은 아픔과 슬픔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말을 못하는 소 떼처럼 내몰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인간적인 존엄성을 빼앗기고 소외당하고 비인간화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심한 상처들까지도 온전케하는 위안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음을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선포할 수 있었다.”

☛ 그들의 경험과 같이 오늘도 하나님의 치유적인 임재에 대한 믿음으로서 수많은 서정시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합니다.
“때로 내가 낙담하고 모든 일이 허사라고 생각 한다네, 그러나 이 때 성령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네!”

이러한 승리에 찬 증언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부름 받은 소명을 재 확인시켜 줍니다. “그대가 베드로처럼 설교할 수 없고, 바울처럼 기도할 수 없다 해도, 그대는 예수의 사랑을, 그리고 그 분은 모두를 위해 죽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네”

그렇습니다. 이것이 목회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즐겁고도 기쁜 소식이며, 우리가 함께 나눠야 할 주님의 은혜입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네, 상처입은 자들을 온전케 할 유향이 있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네, 죄로 병든 영혼을 치유할 유향이 있네!”

진정한 교회 안에 있는 상처입은 치유자들은 삶의 좌절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새롭게 되고 온전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 여기에 상처의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처의 부정적인 면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상처의 치유자는 예수님처럼 상처를 입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교훈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훨씬 더 자신감과 희망으로 넘치게 합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상처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는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고, 또한 치유하는 건강한 교회로서의 영구적인 표어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역자는 상처입은 치유자입니다. 우리 자신이 입은 상처로 인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Antonio Porchia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 하나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백개의 닫혀진 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그 닫힌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예 어떤 문이든 열어 볼 엄두도 내지 않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이용되는 방법을 사역자가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사역자란 누구입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사역자로서, 제자로서 쓰임을 받지 못하는 유아기적인 상태에 있는 평신도가 아니라면 상처란 말을 함부로 하거나, 또 그 상처를 부정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크리스챤이 된 것은 천국가는 궁국적인 구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충성스런 제자가 되는 것이 그 근본 사명입니다.
그리고 참된 제자요, 주님의 충성스런 사역자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받은 상처를 재창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를 하나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랍비 한 사림이 예언자 엘리야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메시야가 언제 오실까요?”“가서 그 분에게 직접 물어보시오”“그 분은 어디에 계십니까?”“성문에 앉아 계십니다”“그 분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습니까?”
“그 분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가 다시 한꺼번에 싸매지만, 그 분은 한번에 한 군데씩 상처를 풀었다가 다시 싸매십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아마 내가 필요하게 될 거야. 그때 잠시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해’라고 혼잣말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메시야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가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즉 상처투성이의 곤고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곳에서 한 번에 하나씩 자신의 상처를 싸매시며 ☛자신이 필요할 때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처입은 사역자의 준비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이 건강한 영성이 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합니다. 자칫하면 영적 노출증(spiritual exhibitionism)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도 당신처럼 우울증과 혼란에 시달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상처가 큰 사람입니다. 인생이 다 그런거 아닙니까?”하는 식은 상대방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감대를 가져 같은 무리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믿음이 약한 사람을 더 악화시키고 실족시키고 공멸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처의 악취만 더할 뿐입니다. 편협한 부정적 접근이 되고 맙니다.

상처입은 치유자의 치유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환대(hospitality)\"입니다. 환대를 통해 두려워하고, 배신했던 제자들이 다시 위대한 증인이 되었고, 환대를 통해 의심많은 주인들이 관대하게 나누어 주게 되었고, 환대를 통해 닫힌 마음의 분파주의자는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환대가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집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환대란 상대방에게 사랑으로 계속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힘들지만 이것이 치유의 기본이고 결과입니다.


☛ 다시 앞에서 했던 탈무드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 메시야를 성문에서 발견한 랍비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그러자 그는 “오늘”이라고 답변합니다. 랍비는 다시 엘리야에게 달려왔습니다. “그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던가요?”“그는 나를 속였습니다. ‘오늘 내가 올것이다’라고 했는데 오기는 뭐가 왔습니까?”
“그가 당신에게 했던 말은 ‘너희가 오늘 그 음성듣기를 원하노라’(시95:7)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비극은 “오늘”, 아니 “지금”이라는 사실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 주님은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내년이 아니라 올해입니다. 우리의 비참한 상황이 다 끝나고 인생 종착역에 이르렀을 때에 오시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 서 계십니다.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시95:7-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모두 오히려 “받은 상처를 재창출하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는 건강한 영성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