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근본 사역은 치유/벧전2:22-25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절] 성경에 나타난 치유사역은 대체적으로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회복이나 국가 회복의 차원에서도 모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결국 모든 치유는 총체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유는 사각지대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가장 기본적인 치유의 사례는 역시 육신의 질병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치유는 결국 모든 것을 치유하는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예수의 그리스도적(메시야적) 사역으로서의 치유 귀신 추방과 병자에 대한 치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의 가장 중심되는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수의 지상 사역은 1)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2)귀신을 추방하고 병자들을 고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시면서 기적을 베푸시다가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 외에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더 이상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권세있는 교훈으로서의 가르침의 특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성서 신학자 케제만(E. Kasemann)은 “병자에 대한 치유와 마귀 추방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독특성”이 발견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할 때에도 동일한 의무로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4-15) ☛여기서 질문이 제기 됩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이 귀신 추방과 병자 치유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살펴봄으로서 답변되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심리적이거나 자연적인 종교 현상이 아닙니다. 병자를 치유하신 것은 오히려 메시야의 도래와 그의 근본적인 사역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질문이 하나 더 제기됩니다. 왜 병자의 치유와 귀신 추방이 메시야의 근본 사역에 속하는가? 그러한 해석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근거를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 하신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만 필요하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8:13-1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의 메시야적 사역 속에는 이미 병든 자의 치유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순복음이 이상적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어도)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가 자신을 의원으로 암시한 것은 이미 당신의 사역에 치유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의 공생애 동안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단지 초인적 인간이 아니라 메시야, 곧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구세주임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그 중심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이 예수님의 사역은 “죄 용서”라는 보다 더 근본적인 종교적 의미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것”과 “죄 용서하는 것”을 분리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마9:2-7) 여기서 죄 용서와 병 고침은 동일한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죄 용서를 위한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은 메시야 사역에 있어서 치료의 극치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재미있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 귀신 축출, 그리고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 이 삼자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귀신의 메시야 인식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귀신도 귀신 나름이겠지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속이고 미혹하는 자라기보다는 예수님 앞에서 실제적으로 공포에 질려 무서워 떠는 그 귀신을 통해 고백된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야를 참고해 볼 가치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메시야에 대한 증거는 베드로에게서 보다 이 귀신을 통해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야직은 은밀하였고 예수님 자신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침묵을 명하신 것을 보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침묵명령 속에는 더 많은 병자가 몰려오면 힘들어서가 아니고 당신의 메시야직을 잠정적으로 감추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깨고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 하고 그의 메시야 되심을 온 천하에 공표해 버렸습니다. 메시야의 도래, 귀신의 추방, 병 고침(죄 사함), 이것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음을 뜻합니다. 2.귀신이 증언한 메시야의 사역의 특징, 치유 마가는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예수의 첫 번째 설교 다음에 곧이어 귀신 이야기를 연결시킵니다.(1:23-28) 이 증언에 의하면 처음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증언한 것은 귀신입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막1:25-34) 여기서 처음으로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고 고백한 귀신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하나님의 아들”(막3:11, 5:7)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귀신 축출과 더불어 병자에 대한 치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사역에 속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을 축출하고 병자를 고쳤을 때, 마귀들은 언제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이 둘을 다음과 같이 엮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눅4:40-41)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악령들은 예수의 오심과 함께 그들의 때가 다하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오실 때, 귀신들과 우상들이 땅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당신은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막1:24)하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8:29) 왜 귀신들이 이러한 소리를 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들의 죄악과 정체가 들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하고 반문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자신들의 위기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악을 범하는 자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허물을 드러낼까 두려워서 먼저 자신을 방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들의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날까 두려워서 먼저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하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들의 고백은 예수의 사역이 바로 메시야의 사역이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을 축출함으로서 귀신들린 사람들은 다시 건강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사역이 고난 받는 백성을 그 고난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라면, 귀신을 축출함으로서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사역은 귀신 축출이자 곧 병자를 고치는 구원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귀신들을 사람들에게서 추방할 때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건강하게 되고, 지극히 이성적으로 되고 맑은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막5:15)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귀신 축출과 병 고치는 사역은 곧 예수님, 곧 메시야의 근본적 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그 고백 속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 사역의 핵심이고 모든 사역의 본질입니다. 치료하시는 예수, 고치시는 예수, 용서하시는 예수, 회복시키는 예수를 빼 놓고 우리는 그 어떤 예수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치유사역은 일반적이고, 일방적인 모형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라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즉 예수는 인간의 온전한 치유를 위해 스스로 먼저 상처를 입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를 이해하고, 믿고, 적절히 반응을 해야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놋 뱀, 광야에서의 치유체험, 모두가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을 한 여부의 이야기이다. 때로는 귀신에 의해 이성을 잃었을 때 일방적으로 그 귀신을 쫓아버리는 일은 있으셨어도, 믿음의 어떤 반응 없이 치유된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치유는 일반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의 근본적인 사역이 치유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 첫 번째 과정으로서 치유는 당연한 순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때가 늦지 않았다는 뜻이고,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죄악입니다.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다 벗어 버리고 새 마음을 먹고 새 뜻을 품어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겔18:31) 치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가 죄악을 버리고 새 마음, 새 뜻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죽을병에서도 다시 살리시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 할렐루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절] 우리의 치료는 이미 2천여 년 전에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가 2천여 년 전의 십자가의 사건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믿는다면 우리 자신은 이미 어떠한 상처에도 빨리 치유 받아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순간 치유 받아야 합니다. @.공개적으로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숭의교회에서의 일입니다. 아침 교역자 예배 후 사모님이 30여명의 교역자가 있는데서 느닷없이 나와서 말씀하시기를 “흥! 그래도 우리 목사님 따라오려면 어림도 없어! 우리 목사님과는 감히 견줄 수 없어”란 요지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하셨다. 열심히 주어진 일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한 설교였지만 뭔가 제가 담임목사님과 경쟁의식을 가진 것처럼 오해를 하셨는지 아침부터 뒤통수를 때리는 소리를 느닷없이 하셨다. ☛저는 당한 수모로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분노와 억울한 감정을 억제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밖에 나와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 사모님이 제게 하신 말씀 들으셨지요? 제 마음 속에 계신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분명히 들으셨지요? 하는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상처는 끝났습니다. 당시는 물론 아팠지만 주님을 생각할 때 이미 그것은 더 이상 저를 괴롭히는 상처는 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제가 미워하고 증오한다면 저의 이 간증은 은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속 좁은 목사라고 평가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만해서 그러셨겠고 본인은 내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상하게 그 사모님에 대해서는 제가 연민의 정이 더욱 갑니다. 여러분도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정말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큰 상처를 받았다할지라도 주님을 생각하는 순간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치유 받은 여인처럼 말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시간 관계상 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예수님의 치유는 마음이나 육체나 죄, 즉 영적인 문제 뿐 아니고 우리의 삶 전반을 치유하신다는 것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치유하신 것과 물질도 자녀도 건강도 아내도 명예도 다 잃어버린 욥이라고 하는 사람을 치유하시고 갑절의 은혜를 더하여 주신 그 치유의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함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