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받고 시중든 여인

치유 받고 시중 든 여인
막1:29-31



오늘은 치유 받고 주님을 시중 든 여인에 대해 생각하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그 여인은 베드로 장모입니다.
성경에는 마가복음에 이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 고치신 일, 오병이어의 기적, 귀신을 쫓아내신 일등 어떻게 보면 마가복음은 온통 이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적이라는 것은 예수가 행하신 초자연적인 일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이적을 고대하면서 믿음의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상의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병이 들어 고질화 되였을 때, 아이들의 문제, 법률적인 문제들, 우리 마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오해했을 때....... 여러 가지 사안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을 기대할 때가 있습니다.
이적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는데 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 앞에 나타남으로써 하나님을 믿게 하고 더 큰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한 세밀하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적 속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적을 기대할 때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 이적 보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이 고침 받은 이 사건에서 우리는 몇 가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 여인의 병을 고처주신 목적이 이 말씀을 전하고자 하시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1. 안식일을 거룩이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 이적은 안식일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 날이 아니라 “(막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라 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베드로의 장모 집에 야고보 요한과 함께 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귀신이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떠들며 난동을 부렸기 때문에 귀신의 떠듦을 정지시키신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 앞에 귀신은 자기를 숨겨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방금 전에 이런 귀신이 나가는 것을 목도한 후에 베드로의 장모 집에 오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 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에 예수는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하여 주님을 수종들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는 것과 병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무엇을 하는 날입니까? 그 날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날이요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신 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①. (마12:10-15)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하셨습니다.
②.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하셨는데 이 날도 바로 안식일이 였습니다.
③. (마14: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④. (마19:2)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⑤. (눅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⑥. (눅7:2) 백부장의 사랑하는 병들어 죽게 된 종을 고쳐 것도 안식일에 하신 일이요
⑦. (눅7: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 지라”하셨는데 이 일도 안식일에 하신 입니다.
⑧. (눅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⑨. (요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❶. (요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❷. (행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하셨으니 이와 같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많이 고치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주일입니다. 그 날은 무엇을 하는 날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인식일 치유에서 예배는 회당 예배가 많았는데 그 회당 예배는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예배입니다.

김익두 목사는 원래 황해도 깡패요 그 당시 소도둑으로 소문난 사람일뿐만 아니라 술김에 하는 행패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갑자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선한 사람이 되어 전도하러 다니니 전에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이 참으로 의아해 하며 물었습니다.“도대체 자네는 그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고 이런 모습으로 요즘 어떻게 살아가나?”그 때 김익두 목사의 대답.“나는 요즘 약 두첩씩을 매일 먹고 있다네.” “뭐야? 약을 두첩씩 먹고 있다고?” “그렇다네! 이 약을 먹으니 술과 담배와 향락보다 더 즐겁고 좋은 엄청난 축복이 쏟아지네 그려.” 그러자 친구들이 무척이나 궁금해하며“우리도 좀 가르쳐 주게나.” 하며 졸라댔습니다. “정 그렇다면 가르쳐 주지. 그 두첩의 약이란 신약과 구약이라는 약일세. 이 약만 먹으면 몸과 마음의 어떤 병이라도 모두 고칠 수 있지”라고 했습니다. 그후 그는 친구들에게 정성스레 신약과 구약을 먹여 그들의 몸과 정신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병고침을 받기 위해 많은 찬송과 열성적인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은혜 많은 사람에게 기도를 받으면 되었지 꼭 찬송하고 말씀을 들어야 하느냐 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병 고치기를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오늘의 이적은 베드로의 집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베드로는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가정이 있고 장모님이 계셨습니다. 그가 전도를 다닐 때도 자기 부인을 대리고 다닌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보아서 베드로는 대단히 가정적인 사람이 였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모든 것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베드로는 누가복음 5:11에 보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즉 그는 아내에게 남편 노릇도 제대로 못했고, 장모에게 사위 노릇도 제대로 못했을 것입니다. 물른 그의 부모에게 자식 노릇을 제대로 못한 사람임에는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주님을 열심히 따르는 만큼 가정 일에 정성을 달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한참 재미있게 성장을 하고 생기 넘치는 교회가 되었을 때는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다니느라고 다른데 정신을 쓸 기회가 없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정성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맡은 일을 잘 감당하려면 일주일에 15번 정도는 교회를 나와야 했었습니다. 그 15번은 새벽 기도회 7번, 주일에 2번, 수요일, 금요일에 각각 1번. 각종 모임에 2번 이상, 성경 공부에 1번, 전도하는데 1번. 교회 청소하는데 1번 그 외에 1-2번 정도 그래서 15-17번을 교회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 친척집에 갈 시간도 없고 시장 가서 오랬 동안 다닐 시간도 없고------- 그래서 집안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고----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잘 사는 방법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잘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집사가 전도회 일을 맡았는데 너무 머리 쓰는 일이 많고 힘이 들어 가정을 돌보기 위해 전도회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축복해 주시겠습니까?
대통령의 비서가 자기 가정을 돌보기 위해 그 직책을 소홀히 했다 던지 아니면 사표를 냈다는 말을 들어보신 일이 있습니까? 어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자기 집안 일을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었다면 그 사람을 사람들이 보고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상 일도 그렇지 못한데 더욱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돌보시기 위해 졸지도 아니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이 밤낮으로 하나님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일을 가정을 돌본다고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이 가정을 버리거나 소홀히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가정 일에 다소간 소홀히 되는 것을 자책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막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일이 결코 가정 일 보다 소홀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가정을 버려도 하나님께서 가정을 지켜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잘 하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민수기 2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고 안식일에 제자를 드리고 월삭에 제사를 드리고 유월절과 777절에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생활은 온통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였으며 그들이 받는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만이 참 축복이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삶을 위해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원리가 이 말씀에 나타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막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는 믿음이 축복을 받는 믿음이요 기적을 볼 수 있는 믿음이며 최고의 믿음이라 할 것입니다.

3. 베드로는 장모의 병을 고쳐 달라고 초조히 재촉을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당신의 집에 모실 때 장모의 병을 고쳐 달라는 목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식사 대접을 하기 위해 보신 것인지, 아니면 피곤하신 주님을 쉬게 하려고 모신 것인지, 자기 집 근처에 왔음으로 차나 한전 대접할 생각이 였는지 모르겠으나 장모의 병 때문에 주님을 모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데”하였으니 장모가 불편한 것을 베드로가 말한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환자가 나 이렇게 몸이 아파 죽을 지경입니다.” “옆에 식구가 우리 아무 게가 이렇게 몸이 아파 고생을 많이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도 예수는 미리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행동에서 예수는 베드로 집에 들린 목적이 장모의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차나 한잔 대접받기 위해 오긴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주님은 우리 교회에 찾아 오셔서 우리 성도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맙시다. 주님의 은혜 받는 일만 생각하고 예수께 나아 옵시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말하여 병을 고침 받았으니 환자들이 말하지 못해도 우리가 그들 대신 말을 하여 사랑하는 식구들의 병도 고침을 받도록 하십시다.

4.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의사들간에 쓰는 은어 중에 ‘G. O. K\'라는 은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God Only Know)\'라는 뜻으로 의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수단과 방법을 다 쓴 후에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뜻으로 쓴다고 합니다. 몇 년 전 만해도 불치병으로 생각되던 많은 병들이 현대 의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점차 그 위세가 꺾이고 상당수 많은 병들은 간단한 약물 치료로 완치가 가능할 만큼 현대 의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최첨단 시설에서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들이나, 첨단 장비로 환자들을 진찰한 많은 의사들이 마지막 장벽에 부딪치면 ‘G. O. K\'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의사들의 치료 대상인 사람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손을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크라테시스’라는 말인데 ‘움켜쥔다’는 말입니다. 그 뜻은 가만히 손을 얻는다든지 손을 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있게 잡아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셔도 병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손을 데시기만 해도 되는 일입니다. 집에 오시지 않으셔도 멀리서 병든 사람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여인의 손을 잡아 힘있게 낚아 체여 벌떡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점을 우리가 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여인의 병에 대하야 의사인 누가는 그가 쓴 복음서에서 “(눅4: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 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열병은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합니다. 아마도 요세 병 가운데 심한 장티부스같은 병일 수가 있습니다. 말을 해서는 알아 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강한 텃칭을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은 의식이 없는 환자라고 해도 강력한 힘을 그에게 전하여 벌떡 일어 날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병든 사람을 고치실 때 모두 같은 방법을 쓰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여러 가지 형편과 믿음을 보시고 가장 적절한 처방을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는 그렇게 해서 당장에 병을 고침 받았는데 나는 그렇게 했는데도 병이 낳지 않더라 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져서 고친 사람, 말씀으로 고친 사람, 명령을 하여 순종함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 집단적인 치료를 하신 경우, 한 사람을 치료하신 경우,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신 경우, 각각 그 방법이 다르니 모두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도록 마음의 준비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이 병든 사람을 고치신 이유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행동에 목적이 없을 수 없고, 사랑이 없을 수 없으며, 선하신 뜻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여자는 병고침을 받은 후에 예수를 시중 들었다고 했습니다. 장모는 몸이 낳자 큰 즐거움 속에 예수를 시중 들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기적이 있기 전에도 몇 가지 이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사람들은 예수를 알 고 있었고 또 예수를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시중 든다는 것은 자기 집에 온 많은 사람들을 대접했다는 말입니다.
손님이 왔으니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과, 심한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메이고 있었는데 몸이 날아 갈 것처럼 가뿐하여 수종을 드는 일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행동입니다. 큰 기쁨과 감사가 넘쳐 정성을 다해 주님과 주님을 중심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주님을 중심한 사람들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는 그들을 성도라 하고 교회라 합니다.
예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마음에 감동과 감격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시중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알고 교회를 섬기며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장모의 병을 고침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그의 근심 한가지를 완전히 덜어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잘 대접하고자 했을 때 주님을 잘 대접할 수 있는 여건을 주님은 그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체증 걸린 것처럼 그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시므로 베드로가 주님을 잘 섬길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여 섬기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어려운 문제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섬김과 축복의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성도의 행복입니다. 이번 집회에 우리 모든 상도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