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료하시는 하나님 렘31:15-20 어느 마을을 어귀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살았습니다. 그의 꿈은 <아름다운 나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열심히 햇볕도 듬뿍 받고, 거름과 물도 힘껏 빨아올리고...어서 자라 아름다운 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도랑 건너에 사는 미류나무가 말했습니다. \"야, 너는 땅 넓은 줄만 알지 하늘 높은 줄은 모르는구나. 너처럼 옆으로 퍼지다간 아마 귀찮은 일이 생길걸. 별 탈 없이 잘 살려면 이렇게 곧고 늘씬하게 키가 커야 하는 거야.\"불어오는 바람에 미류나무는 쭈욱 뻗은 가지들을 한들한들 춤추듯 흔들어 대며 자랑했습니다. 그때부터 느티나무는 늘씬하게 자란 미류나무를 바라보며 부러워하였습니다. 여름이 되자 가지가 무성한 느티나무 아래에는 시원한 그늘이 생겼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은 그 그늘에서 땀을 식히곤 했습니다. 그런데 느티나무는 아이들이 몰려올 때면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아이들은 공깃돌 받기나 구슬치기 놀이를 하다가 싫증나면, 느티나무에 기어올랐습니다. 가지를 마구 꺾기도 하고, 칼로 제 이름을 파 놓기도 하고, 돌을 던져 생채기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나무가 되고 싶은 그에게 흠집이 자꾸 늘어가는 것은 아주 싫은 일이었습니다. 느티나무는 미류나무처럼 키가 크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못 올라가게 쑤욱 크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일을 하였지만 웬일인지 자꾸 옆으로만 가지가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가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생채기를 내던 아이들이 자라나 어느덧 어른이 되고,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 아문 상처 위에 다시 제 이름자를 새기고....아이들이 태어나고....또 태어나고....그러는 동안 느티나무는 아름드리 나무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조무래기 아이들은 여전히 제 이름자를 새깁니다만, 이제 느티나무는 그런 것쯤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겪은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느티나무는 태풍에 시달려 한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했고 거센 비바람에 굵은 가지가 부러진 것은 또 몇 번이었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심한 가뭄과 매서운 추위와 날카로운 번개와 천둥.....이런 일을 겪으면서 느티나무는 늘 불만이었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은 옆으로 가지를 뻗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미류나무처럼 곧게 자랐다면 태풍에 날아갈 뻔하지도, 가지를 꺾이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지금 자라서 생각해보니 그래도 그 모든 어려움을 견뎌낸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대견해하였습니다. 늦었지만 작은 기쁨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품으로 날아드는 새들을 사랑하고, 넉넉한 그늘 아래 사람들의 쉼터를 만들어 주는 일이 행복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 큰 길이 나던 날, 느티나무는 밑 둥이 잘려서 마침내 오랜 삶을 끝냈습니다. 느티나무는 고 가구로 만들어져 전시장에 놓여졌습니다. 그리고 그 가구의 아름다운 무늬에 취한 듯, 많은 사람들이 앞에 서서 들여다보았습니다. 가구를 만든 장인은 모인 사람들 앞에 말했습니다.\"아무 고통 없이 쭉쭉 자란 나무는 무르고 무늬가 없답니다. 잔가지나 상처가 많은 나무일수록 아름다운 무늬를 남기는 법이죠.\"모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몸을 대견한 듯 매만질 때 그제서야 느티나무는 그 동안의 상처를 견딘 자기의 삶에 감사를 했습니다. 아이들의 동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마는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고난과 상처는 견디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고난과 상처를 안고 살지만 마침내는 회복과 기쁨을 안겨 준다는 귀중한 진리를 인생살이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하여 [고진감래(苦盡甘來)]의 덕을 높이 샀습니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오직 하나의 소망으로 현실을 인내하는 차원 높은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인생사에 일어 날 수 있는 일들은 무엇들일까요? 참으로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원하지 않는 아픔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지 못한 슬픔 앞에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때는 또 얼마나 가슴이 찢어 질 듯합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상처 ]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오래도록 괴롭힌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는 쉽게 지워지는 상처가 있는가하면 쉬 지워지지 않는 상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상처들 앞에 헤어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 상처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상처는 약을 바르고 수술을 하면 치유가 될 가능성이 무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이지 아니하는 정신적이고도 영적인 상처 혹은, 그 상처로 인한 [영적 실망감] 내지는 [영적 무력감]은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간의 지혜나 능력으로는 해결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드시 해결 되어야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영적 무력감을 만들고 그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죄로 연결되어 집니다. [칼 메닝거]라는 정신신경과 의사가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수강생중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만약 점점 우울증이 심해지거나 점점 정신이 돌아버리는 느낌이 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그가 \"빨리 정신과 의사를 만나기 바랍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집을 떠나시오. 그리고 내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을 찾으시오. 그를 돕기 위해서 무엇인가 하시오.\" 남을 돕는 것이 정신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선한 행동으로 남을 도울 때 우리 속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남과 자신을 동시에 치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도 행할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진실로 이 일을 행할 힘이 주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새로운 심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버리고 새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빛이 일어납니다. 빛은 곧 착한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힘으로 착한 행실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착한 행실이 가능해 집니다. 이것이 영적 해결 방법입니다. 숱한 갈등과 배신과 실망과 좌절의 상처투성이 속에 사는 우리가 이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예레미야가 살았던 시대상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했던 시기는 한마디로 암흑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분위기를 눈물로 씻어 주는 역할을 감당했던 선지자가 예레미야입니다. 주변 강국들의 세력 판도에 따라 국운이 좌우 될 정도로 나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나라 안에는 계속해서 재앙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죄의 흔적들이 너무 깊고 지속적이어서 그 어떤 해결책도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참된 지도자가 없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부름 받은 예레미야는 환난의 시대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결혼조차 허용되지 않은 채 목숨을 걸고 심판을 전해야 했습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동포들의 손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처한 상황을 놓고 울부짖었습니다. 조국과 겨레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잔불처럼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 데도 백성들은 그들이 곧 망할 줄도 모르고 계속 잘못 된 신앙에 빠져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울어야 하는데 울 줄 모르는 백성들이야말로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렘9장에 보게 되면 예레미야는 억지로라도 아 백성들을 울게 하려고 곧 닥칠 재난이 나라와 민족의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초상집에 다니며 우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여인들을 데리고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감각이 마비되어 바린 이 백성을 깨우쳐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비탄에 젖은 음성이나 그의 탄식은 그가 원래부터 정이 많거나 예민한 정서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눈물과 그의 아픔은 곧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괴로운 마음을 그가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까지 비탄에 젖어 있거나 탄식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나옵니다. 먼저 15절-17절까지는 라헬의 슬픔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로잡히게 되었고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는 것을 보면서 북 왕국의 여인들이 울고 있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자식들을 향해 눈물을 뿌리는 모습을 [라헬의 슬픔]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라헬은 아리땁고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자식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형벌과 저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해야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 그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의 절정을 가진 라헬을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아무도 그를 위로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15절의 끝 부분에 보면\"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쉽게 우리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일수록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 한 들 무엇하냐? 다 귀찮다 하나님인들 이 상처를 아시겠냐?\"하며 탄식하거든요. 그만큼 그들의 상황이 처절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16절이죠.\"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그 아픔을 고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18절-19까지의 말씀은 에브라임이 탄식하며 간구하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은 누구입니까? 북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돌이키고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에브라임의 돌이킴에 하나님은 당장에 돌아가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여기에서 \"측은히 여긴다\"는 말은\"그를 향하여 내 창자가 폭풍 치듯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헤아려 본적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의 <라헬의 하나님>과 <에브라임의 하나님>은 공히 상한 마음을 고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도 어떤 형태로든지 상처를 안고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아니하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절망 속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반드시 치료 받아야합니다. 실의와 낙심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놓아야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상처가 사람으로부터 주어졌지만 그 상처는 사람에 의해 치유 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내 죄로 말미암은 절망과 상처가 있습니다. 이 깊은 아픔을 어떻게 벗어 날 것입니까?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 치유 되어야합니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상처를 안고도 깨닫지 못하여 망하는 삶을 살지 말고 교훈이 주어 졌을 때 그 교훈을 잘 따르는 것이 상처를 치유 받고 살아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무감각해서는 안 됩니다. 백 번 일러 주어도 깨달음이 없으면 문제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둔해져서는 곤란합니다. 유대인은 옷에 잉크가 묻고 동사에 토라에 잉크가 묻으면 먼저 율법책에 묻은 잉크를 지우고, 길에 책과 돈이 동시에 떨어져 있을 때에는 돈보다 책을 먼저 줍고, 부모와 랍비가 동시에 위급할 때에는 랍비를 먼저 구한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의 교육이 얼마나 여호와 중심의 철저한 교육인지를 말해 주는 실례입니다. 그래서인지 세계인구의 0.5%밖에 안 되는 그들이 전체 노벨상의12%를 수상했고, 유대 출신 위인들로는 프로이트, 토마스만, 아인슈타인, 루즈벨트, 키신저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지 못함으로 절망의 상처에 빠졌을 때에 예레미야의 탄식이 들려옵니까? 아니 하나님의 절박한 심정이 여러분의 가슴에 전해집니까? 영원한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분은 상처 입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무슨 상처를 입고 나왔습니까? 그것이 인간관계에 대한 상처입니까? 내 죄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인가요?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치유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못할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치료자 하나님, 그 분이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