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를 고치러 오신 예수님


문둥이를 고치러 오신 예수님
눅17:11-14



벌써 2001년 마지막 달이 왔습니다. 이렇게 하루의 끝을 맞고, 일주일의 끝을 맞고, 한 달의 끝을 맞고, 또 일년의 끝을 맞다가 우리 삶의 끝도 맞게 될 것입니다.


이 2001년 대강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이 왜 오셨는지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계속적으로 살펴보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레아의 3개월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마지막 전도여행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시다가 유대인들이 부정한 질병으로 간주하는 문둥병에 걸린 10명의 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명이나 떼를 지어 다니는 문둥이들이 예외 없이 모두 다 고침을 받은 사건으로, 이 사건을 통하여 왜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고 그 분의 오신 목적과 뜻을 이해하고 또 그 목적과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문둥병은 무슨 병입니까? 문둥병은 그 당시 거의 불치의 병으로 간주되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1871년 \"한센\"씨가 그 균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일명 한센씨 병이라고 불려 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 총회에서는 이 환자들의 인권을 위하여 성경의 사건을 말할 경우를 제하고 한센씨병으로 부르자고 결의한 일도 있습니다.


이 한센씨 병은 주로 동양과 열대지방에서 많이 발병하는 것으로 외피로부터 시작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세균이 몸에 들어가면 눈썹, 코, 귀, 손가락 등에 결절이 생기어 색깔이 변하고 막대기 같이 굳어가고 시간이 지나면 손과 발의 관절을 녹여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 병의 비참함을 나환자 시인 <한 하운> 씨가 쓴 \"전라도 길\"이라는 시를 읽으면 이 병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한다고 생각됩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라.

낯선 친구를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 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십리 길 전라도 길


이러한 나병은 동서 고금을 통하여 혐오스럽고 고치기 어려운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더욱이 이 병이 힘든 것은 전염성이 강해서 일반인들과 격리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점이 가장 고통스럽고 저주스럽게 느껴지는 병입니다. 이 열 명의 나환자들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서 지냈다는 것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성경에서도 이 병은 부정한 병으로 여겨 문둥병자는 진 밖으로 내어 보내라고 하였고, 만일 문둥병 환자가 진 안에 들어오면 돌로 처 죽이라고 하였습니다(민 5:1-3). 더욱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실 때 사용하는 병이기도 하였습니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는 교만하여 자기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다가 그 자리에서 저주를 받아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대하 26:19) 더욱이 그 당시 이 병은 못 고칠 불치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야 됨의 증거로 문둥병을 깨끗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였습니다(눅 7:22).


그런데 주님은 이런 10명의 문둥이의 병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무엇을 교훈하시기 위함입니까? 2001년 첫 번째 대강절에 그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물론 이 열 명중에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 문둥이지만 그가 주님께 나아와 감사를 할 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서 믿음을 보시고 또 참 믿음을 교훈하시고 싶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들이 이런 처참한 문둥이로 주님께 왔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이들이 단지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이요,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이였다는 사실 외에 별로 말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들이 경력도 과거도 나이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관심을 가져볼 수 있는 본문의 내용은 세 가지 정도가 됩니다. 먼저는 이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왔다는 것이요, 둘째는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을 뿐인데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였는데 저들이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들이 주님께 나온 것은 문둥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병에 걸리기 전에 무슨 학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학벌이 있었다고 해도 정작 문둥이가 된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들에게 과거에 화려한 경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아름다운 가정과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버림받은 문둥이로서 오히려 섭섭함과 아픔 가슴만 있을 뿐입니다. 과거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문둥이라는 사실 하나로 더 아프고 더 고통스럽고 더 서러웠을 것입니다. 지식 많은 문둥이는 그래도 낫습니까? 얼굴 예쁜 문둥이는 좀 낫습니까? 젊은 문둥이는 좀 더 낫습니까? 아닙니다. 같은 문둥인 걸요.


저는 젊어서 학식이 높고 명예가 높았던 사람이라도 늙거나 병들어서도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을 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학식도 품위도 젊은 날의 영광도 늙음과 질병 속에 묻혀 버리고 마는 것을 봅니다.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고 침을 질질 흘리며 소대변도 받아야 하는데 박사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눈이 뽑혀 죽는 왕도 왕이며 귀양가서 사약 사발을 받고 죽어버린 왕도 왕입니까?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비참한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서, 오직 주님의 관심과 긍휼 밖에 아무 일도 할 것이 없어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미치도록 행복한 사람의 주님도 되십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의 주님도 되시고, 권세 높은 사람의 주님도 되십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주님에게 무릎을 꿇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병들고 가난하고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이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이유를 찾게 됩니다. 우리는 다 영적으로 문둥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것을 먼저 깨달으면 우리도 주님을 찾을 것이고 그러면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문둥이로 있는 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가치도 품위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문둥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문둥이라도 주님을 찾지는 않겠습니까? 아니면 생명을 걸고 주님의 궁휼을 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주님 앞에 이 문둥이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문둥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우리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자는 복된 사람입니다. \"주님 저는 문둥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죄요, 모든 것이 다 악하고 냄새가 날 뿐입니다. 코가 문드러지고, 손가락의 없어지고, 감각이 둔하여집니다. 이제 천해서 사람 앞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주님! 우리는 말하는 것이 악하고, 선이라고 하는 것도 악이요, 항상 이기적이요, 항상 정욕적이요, 항상 내 중심적이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속으로는 수 천 배가 악한 문둥일 뿐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위대한 스코틀랜드 설교가였던 <알렉산더 화이트>는 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지역에서 가장 사악한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가 누구일까 호기심을 갖고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나 <알렉산더 화이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주 앞에서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찾을 것이고, 주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비록 종교개혁을 한 루터였지만 그도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할 때였습니다. 자기 서재에 갑자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가득 쓴 종이를 루터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 본 루터는 기가 질리고 말았습니다. 앞이 캄캄해지고, 맥이 탁 풀렸습니다. 자기가 짓고도 잊어버린 죄들이 거기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자세히 보았더니 최근에 지은 죄가 거기에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루터는 \"그렇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조롱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이런 더러운 녀석아! 네가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바로 살아라! 너 이 죗값을 어떻게 할래?\" 이때 루터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는데 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 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하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새 힘을 얻어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여있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그때 마귀는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병들고도 병들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의사를 찾지 않을 것입니다. 죄짓고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 열 명의 문둥이들은 인간으로 할 일은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고쳐주시는 것 외에 다른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도울 가족도 없습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지식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과거의 화려한 경력은 더욱 자신을 초라하게 할뿐입니다. 그저 문둥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날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에게 이 문둥이들의 믿음이 없을까요? 주님이 원하는 믿음은 온전히 믿고 맡기는 믿음입니다. \"주님 고쳐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이 문둥이들은 큰 소리로 찬송을 하다가 고침 받은 것도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를 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읽거나 연구한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무슨 선한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을 찾았을 뿐입니다. 감히 주님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한 체 멀리 서서 큰 소리로 불러 긍휼을 구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주님에게 구원받을 충분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요구하는 믿음이고 지금 나에게는 더 복잡하고, 더 높고, 더 어려운 것을 요구하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단순하게 명령했고, 이들은 단순하게 제사장에게 가다가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냥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이 단순한 믿음을 가지지 못할까요? 거기에는 각각 이유를 가집니다. 믿는다고 합니다. 단지 믿음이 부족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믿음에 조건을 내세웁니다. 마치 누가복음 9장 67절 이하에 나오는 두 사람이,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따르겠지만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따르겠다고 하고, 또는 집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따르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사람들과 같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좀 기도를 많이 하고 난 후에 맡기겠다고 하기도 하고, 돈을 번 후에 하겠다고 하기도 하고, 은퇴한 후에 시간이 많을 때 그런 믿음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술 담배를 끊고 나서 그런 믿음은 구하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또는 영적 경험을 하고 난 후에 그렇게 믿겠다고 하기도 하고, 더 많이 배우고 나서 온전히 맡기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조건들을 분석하면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도덕적 조건이요, 둘째는 체험적 조건이며, 셋째는 지식적 조건입니다.

첫째로 제일 많이 내세우는 조건은 도덕적 조건입니다.


내가 지금은 죄가 많아서 먼저 죄를 해결하고 나서 그런 믿음을 가지든지 구하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정한 선을 어느 정도 실천하고 난 후에 그런 믿음을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마치 내가 선행을 하여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느낄 때 주님을 믿겠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마치 내가 스스로 먼저 병을 발견하고 또 스스로 어느 정도 병을 고친 후에 의사를 찾아가겠다고 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내 아이가 지금 학교에 가기에는 너무나 아는 것이 없으니 집에서 구구단도 외우게 하고, 2차 방정식도 풀도록 먼저 공부를 시킨 후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겠다는 부모와도 같습니다. 내가 스스로 도덕적 선을 이루는 그런 날이 오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날이 온다면 그런 사람은 정작 주님을 믿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오기를 원합니다. 그냥 이 문둥이처럼 주님께 정직하게 나아오면 됩니다. 창녀로 와도 됩니다. 혈루증을 가졌어도 됩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어도 됩니다.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아무런 자존심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수치심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내 모습 그대로 나아오는 자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 없이 내 힘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도덕가라면 성경을 가지고 내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는 율법주의자입니다. 저는 누구보다 율법주의가 얼마나 자신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해로운 것인지 비교적 많이 설명하고 강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떠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위선만 더 깊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율법주의적인 터 위에다 적당히 믿음을 혼합하여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그런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특히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그리고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번 성탄절에 그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기 바랍니다. 아무리 과거에 율법적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장애물이 되고, 주님과 성령을 근심시키고, 또 주의 종에게 아픔을 주었다고 해도 지금이라도 그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주님도 성령님도 저도 기뻐할 것입니다. 주님도 저도 여러분의 과거를 다 잊을 것입니다. 오직 기뻐할 것입니다. 어떻게 문둥이 주제에 내게 왔느냐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고쳐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농도를 시험하자고 하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실은 율법주의적인 믿음을 가지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창녀보다 세리보다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율법주의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장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살인보다, 간음보다, 도둑질보다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상태 속에서 헌금도 하고 일도 합니다. 심지어 때로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기도하지는 못합니다. 성경공부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 체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바꾸라고 요구하면 목사를 배척하거나 아니면 다른 교회로 가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행위로, 도덕으로, 율법으로 구원 얻을 수 없는 인간들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믿음의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니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 이 말도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적으로 이해할까 두렵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에게 남이 따르지 못할 행위를 가지기도 합니다. 마치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리는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의와 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나마도 그 행위는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예컨대 이들은 선교보다 선교 정책에 관심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배보다 예배의 구조나 형식에 대하여 말을 더 많이 합니다. 이들은 영혼 자체에 대한 관심과, 생명력 있는 예배와, 응답 받는 기도에 대한 관심보다 교회 행정과 교회 구조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봉사와 헌신보다 자신의 직책의 권리와 권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집니다. 무엇을 조금 알면 그것으로 교회를 돕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사용하기보다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 위치를 확보하려는데 사용하려 합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가도록 막는 자들입니다. 지금이라도 고백하십시오. \"나는 죄입니다. 나는 영적 문둥입니다. 나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둘째는 체험을 믿음에 대한 조건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도 체험을 하게 하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나도 누구처럼 뜨거운 내적 경험을 하고 난 후에 믿겠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여 어떤 사람처럼 불을 받은 후에, 아니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후에 주님께 나를 맡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문둥이들에게는 어떤 심리적 변화도 경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할 때 이들의 속이 뜨거워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전에 느껴보다 못한 그런 감정적 체험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진물이 나던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료되는 변화를 느낀 것도 아닙니다. 그냥 제사장에게 나가다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지 못할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의지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것이 외적 행위라면 신비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것은 내적 심리적 체험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 경험이 필요하다면 주님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먼저 내세워 주님을 믿겠다고 한다면 잘못입니다. 마귀가 기뻐할 것입니다. 그냥 주님을 믿고 그 사실을 믿고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식적 조건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더 깨닫고 더 깨달아지면 그 때 나도 온전히 주님께 나아가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나를 먼저 이해가 되도록 하여 나를 믿도록 하라고 요구합니다. 내가 교회에 나와주었으니 이제 목사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말로 들립니다.


저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지식이 많아져서 더 믿음을 얻는 경우는 본 적은 있지만 그러나 지식이 많아져서 믿음이 많아졌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교만해지고 그래서 더욱 믿음과 더 멀어지는 사람을 본적은 많습니다. 누구보다 지식이 많았던 어거스틴은 오히려 \"나는 믿고나서 알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참된 지식도 믿음 후에 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믿음에 대하여 협의하고 그리고 지적 설명을 듣고 난 후에 자신을 주님에게 맡기기로 했다면 주님은 이들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너희들을 위하여 저 따지기 잘 하는 신학교가 있으니 그곳에 입학하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늘 성경을 가지고 따지고 연구한다는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을 찾아가라고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선생이나 부모나 선배들이 일러준 것을 그냥 덮어놓고 믿고 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길을 모를 때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혼도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뿌리째 송두리째 알고난 후에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런 사람은 결혼을 하지 못합니다. 약의 성분을 다 알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알고 난 후에 믿겠다고 하니 우습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은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이 아니라 절대 믿음을 갖는 일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라고 말입니다. 로마 백부장의 위대한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태복음 8:8) 이런 믿음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경험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그것입니다.


이들은 그 조건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렇게 아까운 십일조를 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형식적으로 믿음을 위한 조건이지만 사실 다 구실에 불과하며 자세히 보면 교만입니다. 제가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점을 성령께서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믿음만 보십니다. 노루는 배꼽이 최고요, 곰은 쓸개가 최고요, 사슴은 뿔이 최고요, 호랑이는 가죽이 최고요, 사람은 이름이 최고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이 최고입니까? 믿음이 최고입니다. 축구장에서는 공을 잘 차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가수는 노래만 잘 하면 됩니다. 미인은 얼굴만 예쁘면 됩니다. 과학자는 과학적 지식만 많으면 됩니다. 주님은 오직 믿음만 보십니다. 단지 어린아이처럼 믿으면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계산과 자존심이 먼저 작용하는 그런 어른의 믿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회복하는 연말연시 그리고 대강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믿음과 영생의 책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말이 98회 사용되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받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믿음으로 배에서 생수가 터지듯 성령을 받으며(요7:38) 믿음으로 부활에 참여하며(요11:26) 믿음으로 빛 가운데 거하며(요12:46) 믿음으로 예수의 큰 일을 행한다고(요14:12) 하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니다(요일5:4).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갈3:2,3:14) 믿음으로 악마를 이깁니다(엡6:16). 믿음은 병원에 찾아간 환자와 같습니다. 병을 고치고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환자 상태 그대로 의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연인과 같은 것입니다. 결혼이란 사랑을 알고 연구하고 간다기보다 가서 사랑을 배우고 알게 되는 요소가 많습니다.


이들은 소문 하나를 듣고 주님께 갔습니다. 우리는 그보다 더 확실한 언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고침 받은 문둥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도(출4:7), 미리암도(민12:10), 나아만 장군도(왕하 5장) 고침 받았습니다. 우리도 문둥이를 고치러 오신 주님 앞에 문둥이의 모습 그대로 이 성탄절에 나아가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