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침 받은 열 사람 눅17:11-19 대부분의 사람이 태생적으로 종교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현재로서는 극단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종교를 혐오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당사자도 미쳐 인식하지 못하는 영혼의 신음소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당장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끈질지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될수록 더 많이 제공해야만 한다. 믿음을 시작하는 것도 그렇지만 시작한 믿음을 키워 가는 것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마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수록 믿을 수 있는 증거들을 더 많이 얻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여러분에게 신앙에 열심을 가지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열심은 모임에 빠뜨림이 없이 참석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모임마다에서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훈련을 쌓아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애석하게도 많은 교인들이 참석하는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올림픽 슬로건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를 때에는 몸으로 참석하는 것은 물론 마음을 집중하여 시간시간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의 체험을 가져야만 한다. 이성과 지성의 분별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말씀을 듣고 아울러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도록 간구하고 의지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이 시간에도 \"내가 어떻게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 주시는 만족할 만한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라는 데에서 답을 찾아내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 각각의 형편과 처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신앙 기간의 장단, 연령의 고저, 체험의 유무) 각각의 위치와 단계에서 자기에게 어울리는 모습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가르침이다. 어떤 분은 이제 막 하나님의 도움이 무엇인가? 나도 그 도움을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런 소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나에게도 그것이 가능한가?\" 그런 마음인 분에게도 본문은 좋은 해답을 주고 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만족하는 삶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분들에게도 본문 말씀은 어렵지 않게 풍요로움을 누리는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그 분의 보좌 앞에 모여 있다. 여러분이 예배 직전까지 어떤 경험,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라도 지금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 집중하라. 여러분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라. 마음을 분산시키지 말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말씀을 따라 나아가라. 1. 도움 요청 본문에서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을 행해서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예수님의 주 활동지역은 생황의 근거지였던 갈릴리 지방이었다. 지리상으로 예루살렘은 남부지방이고 갈릴리는 북부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마리아 지역이 끼여있다. 그러므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관통하거나 아니면 우회해서 가는 길을 이용해야 했다. (대부분 유대인들은 혼혈 사마리아인들을 꺼려서 우회, 주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통과) 본문에서 주님은 갈릴리와 사마리아 접경지역을 지나고 계셨다. 그 도중에 한 촌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서 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셨다. 본문 12절에 그 사람들을 \'문둥병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문둥병\'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다.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내 또래 이상의 사람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때에는 이 \'문둥병자\'는 가장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온 몸을 몽땅 감싸고, 눈만 빠끔히 내 놓은 나병환자가 동네 어귀에라도 나타나면 조무래기들은 자기 집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집에 어른들이라도 계시면 그래도 안심이지만 다들 논밭으로 일나가시고 집이 텅텅 비워져 있으면 방문을 걸어 잠가 붙잡고 있으면서도 손이 덜덜 떨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문둥병 환자는 그만큼 두렵고 기피하는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그것을 \'천형의 병\'이라고 했을까? 유대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둥병으로 판명 나면 즉각 격리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가정과 가족이 있어도 더 이상은 함께 살수 없었다.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었다. 문둥병에 걸리면 더 이상 사람대접을 받는 일은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난치병이었기 때문에 원상회복을 바라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문둥병으로 시름시름 앓으며, 손발이 마비되어 떨어져 나가고, 몸이 뭉그러지는 것을 견디다가 죽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소망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문둥병자\'들이었다. 그런 고통을 가지고 사람 사는 마을과 아주 멀리 동떨어진 곳에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그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지나가거나 말거나 관심 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가?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에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특히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보시면 그냥 지나가지 않으셨다. 그들을 붙들어 일으켜 주셨다. 중풍병자, 손 마비된 사람, 병들어 죽게된 백부장의 종을 고쳐서 완전한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다. 나인 성에서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내셨다. 귀신들려 미친 사람을 온전한 정신으로 회복되게 하셨다. 그런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겠는가? 당연히 치료하고 회복하시며 도와주시는 분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문둥병으로 버림받아 저주받은 세월을 살고 있던 열 사람, 그들이 그 예수님께서 자기들 근처를 지나가실 때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그 분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제정신이 아니다. 모든 병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치지 않았다면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의 온몸을 뭉그러 들게 하는 그 \'문둥병\'이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게 했다. 도무지 치료될 소망조차 없는 그 불치병이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지르게 만들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오늘도 그렇게 소리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간절함을 가진 사람이 구원의 소망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 불치의 환자들처럼 자기의 불가능을 알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과대평가하고 있다.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자기는 도움이 필요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젊어서 자신 있다고 한다. 건강해서 문제가 없다고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삶의 심원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래도 인생이 연약함이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병원 응급실에, 중환자 실에 몇 시간만 \"앉아 있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간은 안개에 불과 하다. 그것도 아침 한 순간 피어오르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와 같은 인생이다. 8,90에 이른 어르신들이 엄청나게 오래 사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 분들에게 물어 라. 엊그제가 이팔청춘이었다고 답할 것이다. 100살, 200살을 살면 충분할 것 같은가? 문둥병만 넘지 못할 한계였던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아무리 높은 지위여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 한계를 빨리 깨닫는 사람이 지혜롭다. 자기의 불가능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이 지혜롭다. 예수님을 향하여 \"나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호소해야 되는 줄 아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2. 순종 문둥병자들의 한 맺힌 호소를 들으신 주님께서 응답하신 말씀이 14절에 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미 문둥병으로 판명되어 고통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진단을 받아보라는 말씀이다. 당시에 질병을 진단하고 판명하는 일을 제사장들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병도 제사장들이 진단했고, 완치도 제사장들이 보증했다. 주님께서 도움을 호소하는 문둥병자들에게 하신 답변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몸을 만지시면서 치료의 행위를 하신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하신 말씀은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는 것이 전부다. 중요한 것은 그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느냐는 것이다. 거기에서 믿음이 좌우되고, 결과가 좌우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는가? 아직 치료되지도 않은 몸을 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겠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온전한 답을 찾으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라도 불필요한 것을 명하시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가지는 것이다. 여러분은 또 한 사람의 문둥병자를 기억할 것이다. 구약 왕하5:에 나오는 나아만 장관이다. 그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백방으로 치료의 길을 찾아보고 시행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그가 엘리사 선지자의 도움을 받고자 찾아 왔다. 선지자는 다짜고짜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한다. 선지자를 만나면 위로를 받고 소망을 얻을 줄 기대했던 나아만 장관은 실망이 컸다. \"우리 나라에 더 좋은 강물이 얼마나 많은데 요단강에 가서 씻으란 말인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왔던 종이 타일렀다. \"더 큰 일이라도 하라면 해보아야 할 터인데 요단강에 가 몸을 씻는 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선지자의 말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마지못해 요단강으로 내려갔던 나아만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 살이 어린아이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5:14)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명령은 그의 문둥병을 치료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똑같은 효력을 지닌다. 그런 그 말씀에 대해서 \"몸이 이 모양인데 무슨 재진단이냐?\"는 식이 되면 결국 치료하는 은혜의 수단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항상 소망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우리를 살리는 말씀, 우리를 치료하는 말씀, 우리에게 복이 되는 말씀으로 이해할 때 그 다음 단계의 믿음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는 주님의 명령을 자기들에게 소망을 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 다음의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고름이 흐르는 몸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간다.) 14절 말씀을 다시 보자.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렇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순종할 때 그 능력이 나타난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베푸신 첫 번째 기적을 기억하는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이다. 그 물리적 변화가 일어났던 시점을 찾아보라.(요2:7-9) 거기서도 물을 떠서 가져다 줄 때 극상품 포도주로 변화되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원한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체험이 없는 것을 걱정한다. 왜 체험이 없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적어진 때문이겠는가? 앞서 말씀드린 나아만의 경우도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졌던 말씀만으로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가 불순종하여 요단강에 가서 씻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문의 경우도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지 않았다면 깨끗함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만큼 순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솔직한 답변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발견하라. 말씀대로 실현되었을 때의 결과를 믿음으로 미리 내다보라. 그 말씀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현실화 되도록 믿음으로 순종하라. 3. 감사 열 사람의 문둥병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갔다. 가는 도중에 자기들의 몸에 순간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을 알았다. 말씀의 능력이 자기들의 그 불치병을 완치하는 능력을 경험했다. 그들이 얼마나 놀라워했을까? 그들이 얼마나 감격하며 기뻐했을까? 성경은 문둥병으로 고통을 받던 열 사람 모두가 주님께 도움을 호소했고, 열 사람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갔고, 가는 도중 열 사람 모두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음을 아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 사람 모두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들의 병을 치료받을 만한 믿음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고침 받은 열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하고 계신다. 자기 몸이 깨끗해짐을 체험하고 주님에게 되돌아온 한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은 아홉 사람을 달리 취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되돌아온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나머지는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님이 구분하신 것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되돌아온 그 한 사람을 왜 소중하게 말씀하시는지는 그 사람이 되돌아와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16절.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18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자 없느냐...\" 되돌아온 사마리아인. 오직 그 한 사람이 주님께 감사를 표했고 그 감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사람이 일평생을 살면서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그 한 사람의 감사표시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리고 그것이 썩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데 여러분 모두도 동의할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아홉 사람은 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다고 생각할 수 없다. 자기들의 그 고통스러운 질병이 주님의 능력으로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도 주님 말씀에 순종한 결과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의 질병에서 회복시켜주신 것을 알았다. 당연히 그들 마음속에 감사가 깃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은혜에 보답해야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만 당장 되돌아가 감사를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그들이 주님을 찾아 감사했을까? 그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여러분 감사는 솜사탕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시간을 끌면 봄눈 녹듯 스러지고 만다. 여름철 해수욕장에서 구조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을 익사직전에 구출해 냈다. 숨을 돌려 살아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고, 힘닿는 대로 반드시 사례하겠다\"라는 것이란다. 그런데 십여명 구조해준 사람들 중에 그 해 크리스마스날 카드 한 장 보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다른 불순종에 대해서는 벌이 내려지지만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따로 형벌이 없다. 그 이유는 감사하지 못하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은혜를 입고 마땅히 감사해야할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거나 감사하지 않는 것은 그 당사자의 마음이 얼마나 황폐해져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감사는 우리 삶에서 활력소와 같다. 한 가지를 감사하는 사람은 또 다른 감사를 찾아낼 수 있다. 작은 것을 감사하는 사람이 큰 감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감사에 익숙한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찾아내는 사람이다. 반대로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가만 찾는다. 그러므로 똑같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감사가 풍성해지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불만만 가득하게 되는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먹을 수 있고, 숨쉴 수 있는 사실만으로도 감사의 조건은 충분하다. \"감사하다.\"는 말의 영어 \'Thank\'는 \'Think\'와 어원이 같다고 한다. 그러므로 Thank를 잘하기 위해서는 Think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감사나 불만이냐가 생각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역경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움이라고 하더라도 전능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얼마든지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고난조차도 고난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를 단련시켜 정금같이 만들어 줄줄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고난까지도 감사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돌아와 감사하는 그 한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십자가를 알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 있는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감사로 가득 채우라! 입술에 찬양을 넘치게 하라! 하나님께서 다함없이 공급하시는 구원의 은총 안에서 그치지 않는 감사생활을 영위하라. 그렇게 가꾸어 가는 여러분의 믿음 생활에 하나님은 나날이 더 풍성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감사하는 자에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