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치유

안식일의 치유
눅13:10-21




우리 나라에도 이제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되어 전면적인 실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에 대하 찬반이 엇갈리기는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일 많이 하는 우리 국민들이 이제라도 조금 더 여유를 갖게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종교계에서도 찬반은 엇갈린다. 불교계에서는 늘어난 휴일과 함께 산 속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은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대환영인 반면에 기독교계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주일성수개념이 약화되어 가던 중에 5일 근무제가 시작되고 나면 예배에 빈 좌석이 더 늘어날 것이 뻔하다고 울상을 짓는다. 그러면서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주장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도 주 5일 근무제가 교회생활에 미칠 영향을 가늠해보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오히려 그런 제도의 시행이 참다운 믿음을 판가름해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교회와 신자들이 시련을 겪지 않았던 시대는 거의 없다. 아마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 가장 편하고 자유스럽게 신앙에 매진할 수 있는 좋은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견디기 어려운 핍박이 있어서 온전한 신앙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편하고 너무 자유로워서 온전한 신앙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 5일 근무제도 그런 상황을 조성하게 될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지치도록 일하던 사람이 주일 하루를 쉬면서도 아침 일찍 교회에 나와 봉사하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온종일 지냈다. 그런데 이제 토요일, 주일을 연이어 쉬게 될 터이니 더 차분하게 주일을 준비하고 정성으로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주5일 근무가 되었던, 주 3일 근무가 되었던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문제는 시원찮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금요일 오후가 되면 멀리 떠날 계획부터 세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주일 예배 결석이 처음에는 조금 꺼림칙한 것이 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추장스런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리가 주일날 빈번하게 비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되면 누가 그나마 나은 믿음인지, 누가 시원찮은 믿음인지 어렵지 않게 판가름이 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매서운 핍박이 신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달착지근한 자유가 더 많은 훼방이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어떻게 안식일을 지켰을까? 우리가 그 분이 하시는 대로 따라 가면 우리 속에 신실한 믿음이 채워지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이 주일을 준비하고 맞을 때 더 잘 기억하시기 바란다. 주일을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고 느낄 때 더 잘 본문의 말씀을 회상에 내는 분들이 되기 바란다.

1. 안식일

주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셨고 거기서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10절에 기록되어 있다. 회당은 율법을 듣고 배우며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장소였다. 마치 오늘날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모이는 것처럼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이 월요일과 목요일, 안식일에 회당으로 모였다. 예수님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회당에 나아가셨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회당이라는 건물에 규칙적으로 드나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회당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썩 마땅찮았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주님은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나가셨고 예배에 참석하셨으며, 말씀을 가르치셨다. 주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회당이나 제도가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당이 좀 부실하더라도, 사람들이 좀 미흡하더라도 주님은 거기에 나아가셨던 것이다. 여러분도 예배외적인 것, 신앙의 본질적이 아닌 것에 너무 많은 관심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 교회나 목사 혹은 교인들이 부실하다는 것 때문에 자기 신앙에 손해를 보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주님은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가셨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을 가르치셨다. 예배의 구경꾼으로만 참석하신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에 아주 특별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18년 동안이나 병고에 시달리던 한 여인이었다. 의사였던 누가의 기록(11)을 보면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였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보자 더 이상 말씀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통 당하고 있는 여인을 지목하여 부르셨다. 그것은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예배하는 도중에는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여인에게 주님께서 계속해서 시행하셨던 치유의 일은 안식일에는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금지 사항을 다 아시고도 예배가 중단되는 것을 감수하시면서 그 여인을 불러 말씀하셨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다가가 안수해 주셨다. 18년 동안이나 굳어 있었던 여인의 척추가 펴지기 시작했다. 잔뜩 웅크려 지내던 여인이 온 몸을 활짝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 일이 안식일에, 회당의 모임 도중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일을 매우 파격적인 돌출행동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본 회당장이 분노하면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비난에 개의치 않으셨다. 질병에 매여 고통 당하는 사람을 바라보실 때, 주님은 그 크신 긍휼과 사랑 때문에 차분하게 예배를 진행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배보다 안식일보다 치료가 주님으로서는 더 시급한 일이었던 것이다. 약하고 병든 사람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것이다.

오늘 이 예배 시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은 아마 오늘도 분주히 교회당에 나오셨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드려 예배하고자 하실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해 더 급하시다. 주님께서 이 날을 복된 날로 구별하셨다. 우리에게 복 주시려고 계획하시고 만반에 준비를 다 갖추신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시는 마음이 더 간절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는가?

본문을 살펴 보라. 여인이 주님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 18년된 자기 병을 고쳐달라고 요구했는가? 아니다.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를 발견하신 것이다. 여인이 먼저 주님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다. 주님이 그 여인을 부르셨고 \\\'치유\\\'를 선언해 버리신 것이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공급된다. 우리가 바라고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님은 주신다. 그런 은혜를 예비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날이 \\\'주일\\\'이다. 여러분의 생각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보다 더 좋은 것이 다른 곳에 있다면 거기로 가라. 주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면 거기로 가라.

2. 18년 된 병자

그 날 회당에는 어떤 사람들이 모였겠는가? 우선 예수님이 그 모임에 참석하셨다. 회당의 행사를 주관하는 회당장이 있었다. 17절에 보면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이 그 모임에 참석했었다. 또 \\\'무리\\\'라고 표현할 만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안식일에 많은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이는 일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한 사람 18년 동안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고통 당하는 환자가 회당의 모임에 참석해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가 그 모임에 참석하기에 가장 힘든 사람이었을까? 누가 안식일에 예배에 나오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겠는가? 바쁘기로 하면 예수님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거동이 불편하기로는 18년 된 환자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오늘날도 스스로는 주일을 지키기에 어려운 사정들이 제법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 고만고만한 핑계거리를 찾으면서 주일을 빠뜨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이 주일을 빠뜨리는 것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믿음이 지체 상태에 있고, 또 예배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유무형의 은혜와 축복에서 그들이 제외되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몸이 꼬부라져 펴지를 못한 체 18년이나 되었다. 그 모습을 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회당까지 나와야 하는 불편함과 자존심을 생각해 보라. 무슨 은혜를 받았다고, 무슨 복을 더 받겠다고 예배에 참석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만약 이 여인이 그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도 생각해 보라. 이 여인 주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딸\\\'(16)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단지 이번에만 안식일을 지키다가 운 좋게도 예수님을 만나 병고침을 받게 된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 병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안식일이 되면 늘 회당으로 나아오는 여인이었다. 병든 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불편하고 힘겨운 조건들이 예배를 빠뜨릴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을 더 찾고, 더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성도에게 예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런 노래를불렀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122: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시84:1) 이런 표현들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배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나는 주일과 예배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주일 성수와 예배를 의무로만 때우지 말라. 예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 그 분이 주일 우리의 예배에 와 계신다면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맞고, 어떻게 예배드려야 옳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느 모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어느 행사에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18년 동안 질병이 고통 속에 있었던 여인은 어디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는가? 우리도 그 곳에서 그 모임에서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같은 장소, 같은 모임에 있었으면서도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안식일과 예배를 바로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회당장은 예수님의 치유를 오히려 비난하고 있다. 안식일을 어겼다고 판단했다. 반대자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주님은 은혜를 끊지 않으셨다. 그들의 잘못된 안식일 개념을 바로 잡아주고자 하셨다. 17절을 보자. 안식일에 짐승을 마구에서 끌어내 일을 시키는 것은 안식일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짐승들의 생존을 위해 끌고 나와 물을 먹이는 것은 허용되었다. 안식일일지라도 짐승들일지라도 최소한 생명을 보존하는 일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 정도 물을 안 먹인다고 해서 당장 소가 쓰러져 죽지는 않는다.

짐승의 생존을 위해 그 정도를 허용했는데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질병의 고통에서 치유될 수 있다면 그것이 안식일지라도 허용되는 마땅하다. 하물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은혜가 임하는데 왜 안식일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하나님과 동등하신 주님께서 왜 회당장 정도에게 판단을 받으셔야 한단 말인가?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안식일은 금지규정으로 갇혀있는 날이 아니다. 오히려 쉼과 하나님의 축복이 예비 된 선을 향하여 열린 날이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날이 아니라 평상시 세상사에 밀려서 하지 못하던 하늘나라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 날이다.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헛되고 소모적인 일에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살면서 1주에 하루 하나님께 못 돌려 드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주일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위해 은혜를 예비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다. 이 소중한 사실을 잊지 말라. 여러분에게 일이 너무 많아서 눈코 뜰 사이가 없다고 할 때에도 주일과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라. 여러분이 모든 풍성함 가운데 여유 자적하게 되었을 때에도 주일과 그 베푸시는 은혜를 잊지 말라.

3.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이어서 주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이 땅에 임하는지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번성할 것이라고 하셨다. 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그 나라가 확장될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금방 안식일에 불치의 병으로 여러 해 고통 당하는 사람을 치료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권능이 나타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 불치병을 치료하셔서 포기했던 건강을 완전하 되찾게 하시는 그 역사를 한 번의 기적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겨자씨의 번성함처럼, 누룩의 부풀림처럼 크고 풍성하게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일을 이루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모든 풍성함을 우리 속에서 이루시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이미 그런 은혜 안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믿음으로 실행하면 그 열매가 30배로, 60배로, 100배로 우리 생활 가운데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으면 그것이 융성한 나무같이 반드시 자라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을 받아들이면 그 효력은 우리 삶 전체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보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성도에게 절망이란 없다. 불가능도 없다. 그것이 불치병이어도 상관이 없다. 불치병이 18년 묶은 것이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얼마든지 고쳐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큰 약속을 가지고 있다. 너무 엄청난 보장을 가지고 있다.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울 만큼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겨자씨 같다. 누룩 가루에 불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새들이 깃들이는 무성한 나무가 된다. 그것이 한 웅쿰의 반죽을 수백 배, 수천 배로 부풀려 맛있는 빵이 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뀐다. 사망이 생명으로 바뀐다. 우리가 그런 은혜 안에 있다.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할 때, 하루를 지키는 주일성수에 급급할 수 없다. 겨자씨 하나라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키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루를 온전히 드리면 그것을 얼마나 키워 놓으시겠는가? 우리 가진 것 아주 적은 것을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은 얼마나 풍성하게 바꾸어 놓으시겠는가?

날마다 믿음의 겨자씨를 뿌리며 살라. 말씀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실천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