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예수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눅8:26-39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
눅8:26-39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보면 예수님 곁에 그렇게 가까이 지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나 모른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성경을 묵상하다가 아주 기가 막힌 모습을 하나 또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주님의 뜻보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드러내고,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다투는 모습이 고작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 베드로가 막습니다.
자기 주장을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에 죽다니요? 그러면 당신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집니까? 제가 칼을 가지고라도 막습니다. 자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도 보았습니다.
주님의 권세 있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너무나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자들만이 아니고 오늘 우리들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온통 주님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꼭 제자들과 비슷합니다.
주님이 아무리 어떻게 했어도 내 주장만 앞세웁니다.
성도들이 누가 크냐 하는 문제에 묶여있습니다.
저는 우리 목회도, 설교도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도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주장을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했어도 나는 싫다는 것이 우리네 인간들입니다.
왜 오늘 본문과 같은 거라사 지역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고 있을까요?
이것은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바로 주님을 따르도록 하시는 것이며,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바로 알고 우리들이 그 주님의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Reformed 신학교의 David Jussely 교수와 공부를 하면서 Leadership라는 주제, 지도자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목사들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개혁주의자들에게는 그 유명한 Reformed 신학교의 D. Min원장이니까 지도자론에 대해 굉장한 어떤 이론이 나올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이야기, 혹은 느헤미야의 이야기, 등등으로 지도자론을 이끌고 갑니다.
그래서 한번은 수업도중에 어느 목사님이 질문을 하기를 <목사님처럼 박식하신 분이 왜 지도자론을 하면서 그렇게 평범한 것들만 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대답은 <오늘날 이상하게 현대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방법, 지도자이신 주님의 길을 싫어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는 주장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성도는 아무리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주장이 좋아보여도 주님의 방법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바른 성도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든지 나는 내 방법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말씀을 전하셨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설교를 하셨든지 나는 내 방법대로 한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 주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셨는가? 하는 것들을 보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누구이신가? 주님이 어떻게 사셨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누구이신지 또 주님이 귀신에게는, 또 그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하시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마귀에게 정복을 당한 자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한 상황인지를 잘 보게 됩니다.
본문 37절을 보면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는 인간 사회에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의 거처가 귀신들린 자에게는 어울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사탄에게 영과 육 모두 완전한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귀신에게 통제를 받고 있는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고통이 되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여간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은 상당히 공격적이라는 것이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8장에 보면 이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은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 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온유한 성품을 가지는 반면에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그 특징이 사납다는 것입니다.
막5;5 같은 곳을 보면 그 귀신들린 자는 자기 몸을 돌로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아주 분명한 것은 이렇게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죽은 자처럼 살도록 마귀에 의해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완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히지는 않았어도 그 귀신에게 조종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한 예로 베드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귀신들린 자가 아니지만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자기 주장을 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귀신들린 자는 아니어도 종종 마귀의 조종을 받고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온유함이 없고 분이 일어날 때 돌아 보셔야합니다.
혹시 지금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여러분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괴롭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기억할 것은 귀신들린 자가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한 상황인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 주십니다.
귀신이 그 주님 앞에 꼼짝을 못하는 장면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그 난폭한 귀신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그 귀신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주님이 그 귀신의 이름을 묻습니다.
왜 주님이 귀신의 이름을 물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이 다른 곳에서 귀신을 내쫓으실 때에도 귀신의 이름을 물으셨던 적이 있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귀신으로 말미암아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귀신의 이름을 묻지도 않으십니다.
다른 곳에서는 귀신을 내쫓으시면서 그 귀신의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주님이 그 귀신의 이름을 묻습니까?
그 귀신들린 자의 대답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군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많은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귀신이 사로잡고 있어도 주님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아주 묘한 현상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면서 귀신의 이름을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 누구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지 아십니까?
귀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의 귀신론과 한국적 귀신론이 혼합이 되어서,
귀신들린 자를 보면서 죽은 조상의 귀신이 들어갔다는 둥, 시집 못간 처녀 귀신이 들어갔다는 둥, 갓난 아이 귀신이 들어갔다는 둥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들어갔다는 말을 누가 합니까?
무당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주님의 나라 아니면 음부, 지옥으로 갑니다.
귀신이 되어서 허공을 떠다니다가 사람의 속에 들어간다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무당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을 잘못 알아서 귀신들린 자의 눈을 꿰뚫어 보면서 <너 누구냐?>라고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진짜 귀신은 마귀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그 귀신을 내쫓는데 <너 누구냐?>라는 것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그 귀신의 이름을 묻는 이유는 그 귀신들이 많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군대라는 것입니다.
여기 군대라는 말은 군단이라는 말인데 학자들은 약 6천쯤 된다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많은 귀신들도 주님 한 분 앞에 꼼짝을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이름을 묻는 것인데, 귀신 쫓는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고 한국의 무당들처럼 헛소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군대의 숫자의 귀신도 주님 앞에 꼼짝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주님이 이름을 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롬8:37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면서 이름을 묻거나, 혹은 조상 귀신이나, 어떤 죽은 자가 들어갔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경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가 아무리 이렇게 성경을 가지고 말해도 사람들 중에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귀신들렸는데 이름을 물어보니까 <죽은 누구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사탄은 얼마든지 무당 같은 성도들을 가지고 놉니다.
얼마든지 속이지요.
그런 이상한 귀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소위 한국의 베뢰아 이단들입니다.
그 추종자들도 아주 많습니다.
거기 속지 말아야 합니다. 신비한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중무장한 병사들보다 강하신 분이시며, 사탄과 사탄의 졸개들, 모든 귀신들이 다같이 공격을 해도 이기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그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싸우시는 분이신 것을 기억하고, 우리가 승리하는 길은 오직 그 주님의 뒤를 따라갈 때에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모든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승리하신 그 주님을 따라갈 때 우리는 계속적인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그 결과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주님에게 이 지역에서 떠나달라는 요청을 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에게 떠나달라고 간청을 했겠습니까?
자기들과 함께 살던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그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주님에 대해 더 이상 알기를 원하지 않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사건의 핵심은 왜 예수님께서 돼지 떼에게 귀신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셔서 돼지들을 몰사 시켰는가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오늘 시대처럼 뭐든지 돈을 가지고 연관시키는 사람은 돼지 2천 마리면 얼만데? 라고 따집니다.
혹은 돼지 2천 마리의 생명은 귀하지 않은가? 하고 따집니다.
우리는 오늘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 할 수 있습니다.
거라사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귀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노골적으로 귀신들린 것을 폭로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재물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폐인된 사람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입은 손해가 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구원을 받고 참된 삶을 찾은 것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다.
오직 손익계산만 빨랐던 것입니다.
그 동일한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거라사의 그 귀신들린 자들처럼 완전히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는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혹시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처럼 재물에 사로잡혀 있거나 혹은 다른 어떤 것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 주님을 내 지역에서 나가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상태는 아닙니까?
주님은 귀신들린 자의 마음의 왕으로 좌정하셔서 다스리시는 것처럼,
모든 거라사 지역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 주님이 왕이 되시도록 그들이 지역을 내어주기를 원하시지만 거라사 지역 사람들은 주님을 나가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제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뿐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을 주님께 내어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까지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처럼 그 재물 때문에 주님을 내어쫓는 분, 아니면 다른 어떤 이익을 위해 주님을 내어쫓는 분은 없으십니까?
바라기는 주님께 여러분의 모든 영역을 다스려 달라고 내어드림으로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가 참다운 삶을 살게 된 것처럼 여러분들에게도 참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랍니다.
이제 우리가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귀신들렸다가 나간 그 사람이 주님과 함께 있기를 구했지만 주님이 허락하시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은 이 사람을 집으로 보내셨을까요?
왜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은 허락하시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아주 분명한 것 한 가지를 배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9절을 같이 읽어봅니다.
<집에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비록 거라사 지방 사람들이 주님을 나가달라고 배척했지만 주님은 이 사람을 통해서 그 온 성내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그곳에 남겨 두심으로 이 사람을 통해 그의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사도직을 맡음으로서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삶의 자리, 우리의 주어진 형편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가 다 목사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가 되어야지만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여러분의 위치에서 주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같이 기도합시다.
우리가 귀신의 조종을 받는 자가 아니라,
우리가 승리하는 길은 오직 그 주님의 뒤를 따라갈 때에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 주장 내 방법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뒤를 따라가는 자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주님께 여러분의 모든 영역을 다스려 달라고 내어드림으로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가 참다운 삶을 살게 된 것처럼 여러분들에게도 참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기도하며,
주어진 여러분의 위치에서 주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되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