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역과 병자의 신앙 눅5:21-16
밀러 박사(Herb Miller)는 <아스팔트에서의 낚시질>(Fishing on the Asphalt)이라는 저서에서, \\\"기독교인들이 평균 6천 번의 설교를 듣고 8천 번의 기도를 듣고 2만 번의 찬송을 부르는데,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세주로서 소개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밀러는 이런 실천성이 없는 사실을 <죽은 소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계 제1차 대전 때에 어느 프랑스의 장군이 기자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장군님,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습니까?\\\' 장군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전진하는 쪽이 이길 것이오\\\' (The side that advances)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삶은 한 마디로 실천하는 삶이었습니다. 전진하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문둥병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뒷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짧은 몇 구절 속에서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을 얻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누가의 관심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문둥병 걸린 사람이 나아와서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 사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일 문둥병 환자였는데,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감격하시겠습니까? 이 사건은 그 문둥병자에게 있어서 그 생애를 마치는 순간까지 결코 잊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그 문둥병자는 너무나 기뻐서 그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사건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 복음서의 기자 누가가 누구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우리는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에게 관심을 쏟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에게 주인공은 주님이었습니다. 여기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는 그 이름조차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항상 변함없이 세상에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언제, 어디서 이 사건이 있었는지 조차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누가의 관심이 바로 예수님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의 마음에는 언제 어디서 누구의 병을 고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의 삶에 능력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려지기 때문은 아닐까요? 여러분 우리 행3:12을 찾아서 읽어봅시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보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몰려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 모인 백성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합니다. 우리를 주목하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를 주목하라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무엇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단순히 병 고치는 어떤 기적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을 믿을 때에 따라오는 어떤 부수적인 것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누가는 문둥병 환자가 고침을 받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그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일들로 온통 사람들이 바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처럼 정말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는 성도들은 적습니다. 주님이 주목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신처럼 섬기려도 하는 자들을 막았습니다. 우리는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누구든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요, 주인공이셔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의 관심사도 부수적인 것들이 아니라 주님이 되시기를 바라며, 또 다른 이들의 시선도 주님께로 모으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문둥병자의 모습을 봅시다.
성경에서는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소위 한센씨병(나병)만을 문둥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규례들을 읽어보면 거의 모든 피부에 나타나는 질병들을 문둥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치료되는 병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전혀 치료가 되지 않는 병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은 오늘날 현대에서 AIDS에 걸렸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혈에 의해서 AIDS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느끼는 절망감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에이즈라는 것이 판명나면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단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회 전반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전에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어린 소년 시절 나병으로 인해 어머니와 헤어지는 큰 고통을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에 걸리면 사랑하는 이들과 멀리 떨어지는 형극의 길을 걷는 몸이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문둥병자를 일반 시민들이 사는 거주지에서 추방하고 격리해서 수용하도록 하는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사 당시에 아람군대에 의해 포위되고 사마리아 성에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까지 잡아먹는 일들이 벌어진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그런데 성문 밖에 있던 몇 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아람군대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문둥병 환자들은 성내로 들어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계명도 제사에 관한 계명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상당히 형식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킨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문둥병 환자를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문둥병 환자들을 추방해야만 자기들에게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내세워서 문둥병 환자를 추방시키는 일만은 아주 철저하게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둥병 환자의 출현은 의외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누가는 의사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직업 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누가는 오늘 본문에 보면 \\\'온 몸에 문둥병이 난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 문둥병이 만연하여 아주 중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환자는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이 진물 나고 심하게 문드러진 상태이지만 예수님의 발 앞에 와서 엎드립니다. 그리고 부르짖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문둥병자의 깊은 겸손과 복종의 표현이 담긴 말입니다. 주님의 처분만을 기다린다는 표현입니다.
죤 라일은 이 부분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는 모두 영적인 문둥병자가 아니겠는가?, 발바닥부터 머리가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맞은 흔적뿐이 아니겠느냐?\\\'고 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주님께로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문둥병자를 나아오지 못하도록 막는 법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막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거기에 참된 살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인 누가가 바라볼 때 온 몸에 문둥병이 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처럼, 오늘 우리들을 영적인 의사 되신 주님께서 보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이 걸린 것과 같은 상태일지라도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주님 앞에 나아와서 엎드리고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주의 뜻을 묻는 자들,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문둥병자의 호소 앞에 우리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누가의 표현을 봅시다. 13절을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누가는 주님의 행동을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온몸에 문둥병이 걸린 환자가 갑자기 여러분 앞에 와서 엎드린다면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시면서 \\\'그래, 깨끗함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사람이 문둥병이 걸렸을 때 만지는 것이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처절한 요구 앞에 엄격한 형식, 윤리만을 가지고 반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풍성한 자비의 손길, 그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 주님의 무한한 자비를 느끼게 됩니다. 문둥병자를 말씀만으로도 고치시는 능력의 주님,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전능하심과 함께 무한하신 사랑이 우리 주님에게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이 주님의 사랑 앞에 또 다시 엎드리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문둥병 환자가 그의 생애 끝나는 날까지 그 따뜻하게 손을 대시던 주님의 손길의 느낌을 잊을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이요, 또 날마다 받는 자들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리십시오. 그러면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손길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깨끗함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문둥병자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되면 안됩니다. 만일 그 때 한 문둥병자의 이야기로 그친다면 성경에 기록해 둘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날마다 나아가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맛보며 살기를 원합니다.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어도 그 주님의 능력, 그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며 우리에게 참된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사랑의 손길을 맛보며 살기를 바랍니다.
4.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문둥병자를 고치고 나자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져 나갑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적한 곳으로 나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헬라어에서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어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이 귀찮아서 물러간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기 위해 잠시 물러 가셨다가 또 다시 나오셔서 말씀도 가르치시고 병자도 치료하시는 사역을 계속해서 반복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아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셨던 것을 누가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곧 기도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특별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 동안에 찾아오는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잡고 나아가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큰 원동력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 그 기도생활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활동들, 사역들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나누는 그 대화의 시간, 그 교제의 시간을 주님처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일과 은밀한 기도는 깊은 상관관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일이 많고 바쁠수록 더욱 기도하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모범을 따라서 말입니다.
결 론
여러분은 솔직히 주로 무엇에 관심을 쏟으면서 살아갑니까? 누가는 주님에게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주님에게 주목하도록 합니다. 이런 성도 되도록 기도하시고,
온 몸이 다 터졌어도 주님 앞에 가서 엎드려야 합니다. 문둥병자처럼 율법이 가로막아도 주님 앞에 나아가서 엎드려 처분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다가오셔서 손 내미시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맛보는 자가 되도록 주님의 모본을 따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놓치지 않는 성도들이 되도록 다같이 기도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