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능력 눅5:12-26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이 발생되고 경험된다. 그 중에는 기쁘고 즐겁고 만족스런 일들이 있는가 하면, 어렵고 힘들고 비통스런 일들도 있다. 우리는 되도록 괴로운 일들은 피하고, 즐겁고 만족스런 일들만 다가오기를 늘 염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항상 바라는 일만 일어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제발 나에게는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그런 일들도 다가올 가능성은 항상 있고, 그것은 적지 않게 실제로 경험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삶은 언뜻언뜻 반짝이는 기쁨의 금실과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고민의 검정실로 짜여진 옷감과 같다. 항상 금색 옷만 입고 사는 사람도 없고, 항상 검은 조복만 입고 사는 사람도 없다.
인생을 깊이 있게 관조한 사람들의 공통된 발견은 삶이 꼭 성공적이지만 않아서 고통의 바다요, 흔들리는 갈대라고 한다. 심지어 내가 왜 고통의 세상에 생겨나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야 하는지 하소연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생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다. 삶의 기쁨이나 보람도 아시고, 슬픔이나 무거운 짐을 아신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는 슬픔, 고통, 좌절, 실패를 완전히 추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룰 충분한 능력을 갖고 계신다. 우리를 위해 사라지지 않는 기쁨을 예비하셨고, 줄어들지 않는 만족도 계획하셨다. 더 나아가 죽지 않는 영생을 설계하셨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혹을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열심을 만나볼 수 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우리를 바라보시고, 온전케 하시며, 능력을 공급하시며, 새롭게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지 알 수 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나도 이 성경 본문의 기록이 여러분의 생활에서도 경험되는 은혜와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질병을 치료하신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임하여 온전한 건강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그 자비하심으로 용서를 선언하신 사죄의 은총이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 임하여 십자가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 흠도 티도 없는 순결한 성도로서 하나님의 빛된 자녀들로 당당히 서는 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 불치병
예수님의 분주한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주님은 더 많은 동네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숨김없이 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점점 사람들의 심령에 스며들어갔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능력은 사람들의 입소문이 되어 놀라운 속도로 번져갔다.
\\\"신기한 능력으로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했겠는가? 특히 질병의 고통가운데서도 뾰족한 치료법이 없어서 차일피일 세월만 보냈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 소문을 들었겠는가?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지 않았겠나?
할렐루야 기도원의 세칭 \\\'성령시술\\\'이 우리나라 교회에 바람을 몰고 왔던 때가 있었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기도원까지 전라도 시골 교인들이 단체로 몰려가기도 했다. 기적 같은 현장을 보고는 못간 사람들을 위해서 video-tape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그 tape를 나도 보았는데, 어딘가 미심쩍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치유의 은사를 나타낼 때, 성경 어디에서도 말씀 외에 다른 도구를 사용하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흙을 눈에 바른 경우도 치료의 수단이기보다는 믿음과 순종의 단계) 더군다나 그 기도원에서 퍼 왔다는 능력의 생수는 황당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나중에는 샘물을 다 조달할 수가 없어서 계곡 물을 퍼 날랐다는 뉴스가 있기도 했다.
여하간 불치의 질병에 고통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자기의 병이 치료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던 마다하겠는가?
본문에 문둥병 환자가 등장한다. 성경에서 문둥병이라고 표시한 질병은 모두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나병(한센씨병)만이 아니다. 매우 광범위한 피부병을 성경은 문둥병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문 12절의 표현을 빌리면 이 환자는 온몸에 피부병이 번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경우 그 병이 전염성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까지는 격리되어야 했다.
이 환자의 상태로 보아 그는 이미 격리되어 있었고,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를 받는 형편이었다고 짐작이 된다. 그러므로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의 놀라운 소식을 듣고도 쉽게 달려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 분에게 달려가 치료를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있지만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던 사람이다. (눅17장에도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나오는데 그들 역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멀리서-12절- 소리쳤을 뿐)
다음 18절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상태를 보라. 그는 이미 거의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다. 사지를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자력으로는 도무지 군중 속에 있는 예수님에게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 두 환자는 마음으로는 간절히 예수님 앞에 나아가 치료받기를 원하지만 한 걸음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형편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불치병이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에게로 나아갔다.
더 심각한 고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병들었으면서도 환자인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치료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다.\\\"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거절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병이 심각하다. 그들 속에 있는 죄를 알지 못한다. 죄가 얼마나 사람의 생명을 좀먹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차라리 그들이 고통을 맛보는 사람들의 되기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병원 한 번 안가도 건강만은 자신 있다고 하는 사람들, 실패 한 번 없이 너무 잘되는 사업에 날마다 더 부자가 되는 재미에 사는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고,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사람들. 어떻게 해야 그들이 스스로 고질병을 알겠는가? 차라리 응급실에 한 번 실려가야 한다. 한 번 쯤 부도 위기에 몰려 보아야 한다. 거기에서야 은혜를 바라는 여지가 생길 것이다.
문둥병이라는 고질병, 중풍병이라는 불치병.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도무지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불을 가릴 여유가 없이 예수님에게 오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예수 앞에
문둥병자가 사람들을 헤치며 예수님 가까이 다가갈 때, 얼마나 많은 수군거림이 있었겠는가? 얼마나 많은 멸시가 있었겠는가? 우리도 그것을 \\\'천형의 병\\\'으로 여기지만 이스라엘에서도 만찬가지였다. 문둥병은 하나님의 벌이었다. 불결하고 부정한 병으로 여겨졌다. 문둥병자는 예배참석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 병으로 죽으면 무덤까지도 따로 격리되어야 했다.
그 문둥병자가 군중들 사이에 나타났을 때, 의외로 길은 쉽게 뚫렸으리라 짐작된다. 그를 환영하거나 측은히 여겨 길을 터 주었다기보다는 혐오하고 침을 뱉으면서 사람들은 뒷걸음질을 쳤을 것이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피할 때,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그만 두어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되돌아 줄행랑 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기에는 너무 중한 병에 그는 들어 있었다. 기어이 예수 앞에 엎드렸다.
중풍병자는 어떻게 예수님께 다가갔는가? 사지사족을 쓰지 못하는 그는 더 딱한 형편에 있었다. 욕을 먹고 조롱을 받더라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기어서라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손가락하나 꼼짝할 수가 없어 살아있는 의식이 원망스러운 사람이었다. 예수님에게 가 보아야겠다는 마음조차 먹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웃은 참 잘 두었다. 가족이었는지, 친구였는지 그를 침상채 둘러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시는 집 앞까지 옮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성한 사람도 더는 앞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길을 열어주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도록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여러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일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면 구태여 수고를 감행할 필요는 없겠다. 은혜를 얻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고 생각하면 더 나아가기 위해 무리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그냥 뒷자리에서 구경을 하던지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와버려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지금 무엇 때문에 거기까지 간 것인가? 불치의 고질병을 고쳐보려는 소망에서가 아니었는가? 죽어가는 사람 살려보겠다는 간절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포기하고 돌아서는가?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치료받아 살길이 있는데 어찌 중단하겠는가?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일은 주님의 은혜가 바로 앞에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신앙을 가지기 위해 교회에 나오기도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삶에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그 도움을 나도 받을 것 같다는 기대도 한다. 그래서 얼마간 성경을 배우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그 다음 단계를 주저한다. 거기에다 적당한 선을 긋고 그 선에서 넘어서지 않기로 스스로 작정한 사람들 같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자기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생활이다. 자기가 선을 그어서 신앙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향해서 부단히 전진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자면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의 삶을 완전히 개방하여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말씀을 생활 전반에 적용하는 훈련을 쌓아가야 한다. 그런데 마치 국경선처럼 자기 삶에 금을 그어놓고 자기도 그 선을 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도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태도는 은혜를 체험하기는커녕 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마치 차를 타고서도 짐은 등에서 내려놓지 않는 모습과 같다.
문둥병자를 보라. 중풍병자를 보라. 힘들고 어려워져 포기해야할 상황이 되었어도 물러서지 않는다. 물러설 수가 없었다. 기어이 예수님 앞에 나아갔다. 문둥이라고 수군거려도 상관하지 않았다. 출입구가 막히면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님에게 나아갔다. 여러분도 은혜를 체험하기 원하는가? 그들처럼 간절함으로 주님께 나아오는가? 오늘 주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그런 사모함이 있는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는 어떻게 했는가? 문둥병자는 온 몸의 문둥병을 보여드리고, 중풍병자는 가누지 못하는 몸 그대로를 보여드리는 것 말고 무엇이 더 있었겠는가? 의사 앞에 가면 그것 말고 무슨 꾸밈이나 과장이 도움이 되겠는가? 예배에서도 무슨 가식이나 겉치레가 필요하겠는가? (내가 맨 처음 은혜다운 체험을 가졌던 것도 마음을 다 털어놓았을 때)
3. 내가 원하노니
다만 그 병들어 추한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이르렀을 때, 문둥병자는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말하고 중풍병자는 그 말조차 못하도록 입이 붙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3)고 하셨다.
온 몸에 문둥병이 들어 천형의 불치병으로만 알고 살던 그 고통에서 얼마나 자주 좌절하며,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원망했을까? 무슨 소망이 남아있었을까? 오직 예수님 앞이기 때문에 \\\"원하시면 치료하실 수 있으십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주님도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문둥병자가 낫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완치되어 정상으로 회복되기를 주님도 원하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다 된다는 진리를 믿는가? 실패했거나 불가능했던 일도 주님의 뜻이면 얼마든지 성공으로 가능으로 바뀌어 진다는 사실을 믿는가? 더불어서 성도 여러분의 삶이 모든 것에 풍성하며 구원의 넘치는 복으로 채워지기를 주님이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도 믿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님은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가?
문둥병자의 완쾌를 원하셨던 주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셨고, 그 시로 그는 깨끗함을 얻게 되었다. 주님을 통한 치유의 능력이 간절함으로, 믿음으로 나아가던 문둥병자에게 임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문둥이가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풍병자에게는 주님이 어떻게 하셨나? 주님은 맨 먼저 그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치유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려면 주님이 다음에 하셨던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주님은 죄사함의 선언을 먼저 하셨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굉장한 능력이 있는 분으로 인정을 했다. 그의 가르침도 놀랍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특히 병든 사람들이 치유를 위해 몰려들었다.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어 병치료 받기를 바랬다. 떡기적을 베풀면 늘 그런 기적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적을 그것이 아니었다. 훌륭한 선생이 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병,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셨다.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은 죄를 해결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었다. 질병도, 가난도, 고통도. 죄가 가져오는 결과였고 죄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인류의 불행을 완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풍병의 치료도 급하지만 더 급한 것은 죄를 치료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도 똑같다. 우리도 예수님 앞에서 그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여러분이 질병의 고통을 받아 보는가? 실패의 쓴잔을 마셔보는가? 인생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보는가? 돈 없는 가난을 맛보는가? 그것만 해결되면 행복이 시작되리라고 기대하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죄가 부숴뜨려져야 한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러 오셨다.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이유도 다름이 아니다. 중풍병자에게처럼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언하시기 위함이다.
여러분에게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산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마치 온 정성으로 나를 길러주신 부모를 인정하지 않고 산 것처럼 그것이 죄악이다.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얼마인가? 나를 성공으로 축복으로 이끄시는 그 말씀에 따르지 못함이 실패로 나타난다. 어쩌면 우리는 영혼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문둥병자라고 해야할지... 영적으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중풍병자라고 해야할지.... 주님, 원하시면 우리를 고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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