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나를 고치소서 막10:46-52
사람이 병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고통이 인생경험이고, 또다른 창조를 위한 고통이라면 의미라도 있겠지만, 병으로 인한 고통은 하루라도 빨리 없애는게 당연하다. 그 고통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또 그 고통 자체는 몸이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몸부림의 산물이다.
현대의학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인병이다. 그런데 이런 성인병은 그동안 많은 연구결과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도시사회로 이전되면서 새롭게 발견된 병이라고 한다. 그래서 의학계에서는 이 병을 성인병이라 하지 않고 \\\'생활습관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이는 생활습관이 바뀌는 바람에 생기는 병이기 때문이란다.
이 병이 근본적으로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생활 습관을 바꾸는 길 밖에는 없다. 다시 말해서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이 사는 길이 된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이다. 그런데 이 변화는 현재의 상황이 싫증나서도 아니고, 뭔가 창조적인 전환에 대한 욕구 때문이지도 않다. 그것은 고통의 원인이 나의 병에 있고 나는 이 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욕구가 변화라는 형태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아픈 상태에서 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지속적으로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왜 변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경우 내가 여전히 병든 상태로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리하여 지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
본론:
1.변화의 주체자 예수(46,47)
-무리중에 거하시는 예수 (허다한 무리와 함께)
분명히 우리 예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셨지만, 그는 결코 사회적, 또는 국가적인 운동을 통해서 이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무리속으로 들어 갔지만, 결코 무리를 어떤 힘으로 결집하고, 어떤 종류의 권력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왜일까? 그것은 결코 사회나 국가가 나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변화는 위로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변화인 것이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방법이다. 군대도 법도 선동적인 말투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화의 주체가 되었다. 왜냐면 예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변화를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이룩해 놓은 변화의 크기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나를 변화시키시는 예수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변화 시켰다. 그들의 삶의 태도와 영혼과 몸과 마음을 변화 시켰다. 놀랍게도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전혀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린 것이다.
-나를 만남으로 변화시키시는 예수
그런데 예수님은 단지 어떤 사상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몸소 우리에게 다가 오셨다. 오셔서 직접 우리와 어떤 종류의 관계를 요구하셨다. 예수의 진리는 선생처럼 윤리적이며, 철학가처럼 형이상학적이고, 의사처럼 의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격적인 만남이었다. 그는 너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고, 너와 나는 무슨관계인가를 물으신다. 2000년 이상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예수님은 우리에게 같은 관계의 만남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 만남을 경험한 사람들을 변화시키신다.
2.변화를 소망하는 바디매오(48-49)
-간절히 소망
소경 바디매오가 있었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가 불치병을 고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소망없은 구걸생활을 하다가, 어쩌면 이 구걸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고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만 만나면 변화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그에게 예수가 바로 지금 이곳을 지나간다는 행운이 찾아왔다. 우연히 찾아왔을까? 아니면 그의 간절한 소망이 예수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옮기게 했을까? 그는 주어진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소리소리를 지르며 예수를 찾았다. 왜냐면 오직 그에게만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힘을 다해서 목청을 사용했다. 그의 울부짖음은 거의 발광에 가까웠다. 보다못한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문할 정도였다. 그들에게 그는 여전히 거지 소경에 불과했던 것이다. 주제를 모르고 떠들어서는 않된다고 주위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는 간절히 소망했으며 예수는 그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신앙고백이 있는 소망
오늘 본문에 보면 바디매오가 외치는 소리는 간결하고 명쾌하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 말을 풀어보면 \\\'나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여 나를 불쌍히 여겨 고쳐 주소서\\\'라는 말입니다. 그 긴 말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담았다. 그것은 마치 \\\'사람살려\\\'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았고, 아무도 자신을 구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큼은 나를 구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신다.
-시련을 이기는 소망
그는 창피를 무릅쓴 용기의 사람이요, 주위에서 떠들지 말라, 네 주제를 알아라, 사람같지 않는 놈이 누굴 부르냐는 식의 악담을 뒤로한 채 자신의 삶에 성실하였다. 그는 남은 자신의 삶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이제 구걸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그의 소망은 시련을 이겨내었다.
3.결단을 촉구하시는 예수님(50-52)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셨다. 이리로 오라 부르셨다. 내게로 오라 부르셨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품으로 오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예수님의 부르심을 우리는 소명이라 한다. 세상에는 많은 부름이 있지만, 예수의 부름이 가장 중요한 부름이다. 이 부름앞에 아멘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예수는 우리를 왜 부르시는가? 그것은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이시다.
-옛것을 버리는 바디매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부름앞에 가장 먼저 자신을 덮고 있으며, 정들었던, 그러나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그래서 예수님 앞에 가지고 가기에는 부끄러운 겉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바디매오가 한 일 중에 가장 훌륭한 일이다. 그는 더러운 자신의 겉 모습을 털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예수님이 부르자 과감하게 그것을 벗어 던져 버렸다. 예수님이 부르신다. 던져 버릴 것 다 벗어 버리자. 나에게 친근하지만, 정도 들고 나름대로 추억거리도 있지만, 예수앞에 가져가기 부끄러운 것들을 벗어 버리자.
-결단을 촉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바디매오에게 물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랴?\\\' 바디매오가 대답했다. \\\'선생님,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확히 알기를 원하신다. 그래야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때 바디매오가 구걸이 잘되게 해달라고 했던지, 아니면 나를 괴롭히는 아무개가 변화시켜 달라고 했다면 그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변화받아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문제의 정확한 원인을 알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신의 문제는 무엇인가? 오늘 예수님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무엇인가?
-믿음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를 믿는 그 믿음,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 그 믿음 때문에 바디매오는 광명을 찾았다. 예수님이 정확하게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나를 변화시키시고 나를 치료하시리라는 믿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가능하시다. 나는 안되지만 예수님은 가능하다. 내가 그것을 믿어야 한다. 누가 나를 위해서 믿어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내가 믿어야 한다. 믿음이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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