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목적 마11:2-5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갈망하는 것 중의 하나가 치유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으로 알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 앎의 중요한 체험이 바로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성령을 통해 치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필요를 충족시켜나가는 복된 탑湛括?될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시든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여전히 치유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필요성은 신앙인들의 기본적인 욕구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7장 22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어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 이유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그들이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기적을 보고 그것을 인정은 했지만 이 모든 기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치유사역을 계속 행했습니다. 많은 기적과 역사가 일어났고 그리고 군중들도 무리를 지어서 계속 나와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 계속 의문만 품는 것입니다.
성전미문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당시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 놓고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이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이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하자’이처럼 처음으로 탄생하는 초대교회에 첫 번째 박해는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의 전도 때문이 아니라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이들은 치유에 대해서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하는 점과 이렇게 치유하고 돌아다니는 사도들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이 고민 이였습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치유가 사실이라고 판단을 내렸지만 그러나 더 이상 치유행위를 금지 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이런 치유행위는 예수님의 부활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적은 믿겠지만 기독교 교리인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우리의 죄를 다 씻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교리는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이 ‘학문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무슨 올바른 교리를 전하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오늘은 어떻습니까? 병자가 치유되면 어디든지 기적은 있는 법이라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기적 그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무속인들이 기도하고 무당들이 굿을 해서 나은 것처럼 치유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치유는 인정하지만 기적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각을 세상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하고 있단 말입니다. 치유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저 육신의 아픔을 치유해서 그 아픔에서 해방시켜주었다는 것의 의미 밖에 찾지 못하면 않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신다는 것은 그런 체험을 한 것은 우리와 지금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치유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치유의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쉬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치유함을 받으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우리를 붙들고 계시며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치유를 위해 가장 빼놓지 않고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치유는 기도의 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는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병자들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저번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지요. 탕자가 집을 나갔지만 아버지는 관계를 끊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런 자녀와의 관계는 절대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제는 끊어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교제가 끊어질 수 있지요. 아들이 집을 나가면 어디 사는 지도모르고 소식이 끊겨서 교제가 단절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도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 질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무엇입니까? 기도지요. 기도하지 않으면 교제가 끊어진단 말입니다. 관계성은 유지하고 있는데 교제가 끊어지면 도움의 통로나 능력의 통로가 차단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모든 질병은 감기에서 시작되듯이 모든 신앙의 문제는 기도 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도가 그치면 악마의 바이러스가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도는 모든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이기 때문이지요.
좀 색다른 예가 되겠지만 기도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을 드립니다. 기도를 과학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러나 그런 노력을 한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식물에 미치는 기도의 능력’이란 책을 쓴 화학자인 프랭크린 로엘은 156명의 사람들이 700개의 실험실에서 27000개 이상의 씨앗과 묘목을 사용하여 얻은 결과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 실험들은 약 십만 번의 측정을 했는데 그 결과 기도한 묘목들은 52.71%의 성장효과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또 다는 책 ‘안수기도의 몇 가지 생물학적 효과’를 쓴 그랫은 그 책에서 이런 부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약 6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기도했을 때 식물의 (여기에서 사용된 것은 독보리였습니다) 성장과 상처 난 쥐에게 기도했을 때 얼마나 빨리 낫는지에 대한실험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처럼 기도의 역사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어지는 것이며 지금도 그런 사례들이 나오고 있는데 정작 기도해야할 우리는 기도에 대한믿음이 없단 말입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 ‘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그랬습니다. 기도는 병을 치유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죄를 지어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기도는 이런 엄청난 무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18장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몇 사람이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모여서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런 엄청난 역사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이 말씀을 믿고 기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치유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바로 우리의 고집입니다. 요즘 고층건물이 많은데 최고 높은 집은 어떤 집일까요? 고집입니다. 고집보다 더 큰 집은 최고집입니다. 우리는 고집이 없다고 하지만 물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만큼 무쇠같은 고집이 있을 까요? 한번 안하기로 한 것은 절대로 안합니다. 수요예배 참석 안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죽을 때 까지 바뀌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고집이 세다고 하지만 그들의 삶이 바로 우리의 삶이기에 기록한 것 아니겠습니까? 계속해서 짓는 죄는 끝까지 짓고 있습니다.
바구니병이라고 1890년도에 미국의 목화밭에 많이 나는 병이였습니다. 계속해서 목화만 심으니까 목화만 좋아하는 토양의 영양분만 섭취하는 것입니다. 지질학자나 농립부에서 경고를 하면서 목화대신 콩이나 호두나 땅콩이나 다른 작물을 심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이 모작이나 삼모작을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을 안 듣습니다. 그래서 결국 1895년에 목화작물이 완전히 바구니병에 걸려서 수확을 못할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목화를 심지 않고 땅콩을 심었는데 땅콩이 굉징히 잘 됩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땅콩 버트가 나오고 잼이 나오고 한 것 아닙니까?
마음을 바꾸어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치유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치유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고질병인데 치유되겠어! 이것은 만성질환인되 치유되겠어! 병원에서도 안되는 것을 기도한다고 되겠어!’이런 생각과 고집이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게 된단 말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그랬는데 어떻게 치유되겠습니까? 말씀대로 삽시다. 말씀에 자신을 버리는 심령이 되셔야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고난과 어려움속에 있는 것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고집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고집을 꺾게 하기 위해 오늘도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 오늘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아세요, 고집은 불신입니다. 믿지 않으니까 하는 발악에 불과합니다.
본문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의 2/3가 치유사역이고 그 치유사역이 왜 복음과 함께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치유는 그냥 치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먼저 막 2:3 말씀에 보면 ‘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저번에 이 말씀을 드릴 때는 네 명의 친구의 믿음이 한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한 차원에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몇 명의 믿음이 한 사람의 병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구원까지 받게 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도하고 함께 전도하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다른 구절을 한번 봅시다. 9절입니다. 서기관들이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저가 누구관대 죄사하는 권세가 있느냐? 하는 마음을 아시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어느 것이 쉽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나라‘하는 것이 쉽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 보십시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고백하고 받아드립니다. 그런데 혹시 의학적으로는 치료되지 못하는 병에 걸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병을 기도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기가 더 어렵습니다.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믿습니다’ 하면 되지만 치유는 눈으로 확인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임종시에 두려움이 없고 기쁨으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말씀은 믿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삶 속에서 그것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멘과 실천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결단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어려우냐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중풍병자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보다 네 상을 가지고 걸어라는 말이 더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어려운 것을 해결하면 죄사함의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지금도 하나님이 천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하는 증거를 치유를 통해서만은 아니지만 치유를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단 말입니다.
마가복음 10장 7절을 보면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속에 이미 천국이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현재 속에 천국이 들어와서 나타난 현상이 바로 해방입니다. 죄로부터 해방, 무지로부터 해방, 빗나간 감정이나 어린시절부터 몸에 베인 상처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육제적인 질병까지 치유하시는 것은 바로 천국이 현재 속에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 계속해서 천국이 선포되고 있다는 증거가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질병이 치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물러가고 앉은뱅이가 걸어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들어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들이 복음과 더불어 선포되고 있습니다. 복음만 따로 선포되고 치유는 따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선포되면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 치유였단 말입니다.
이 원리는 당연한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 이론이라면 치유는 실제적인 현상이기 때문이지요. 선교사들의 간증속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자기는 신유의 은사가 없답니다. 한번도 병자를 치유한 경험도 없고 귀신을 물리쳐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선교사로가면 거기서는 기도만 해도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물러가고 각종병자가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까? 복음은 절대로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천국은 환상이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현실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귀신이 물러가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입고 죽은자가 살아나는 역사입니댜.
죽은 나사로가 3일만에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나오라고 명하시니 죽은지 3일만에 무덤에서 나왔지요. 그렇지만 나사로는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괜히 죽은사람 살려놓고 장례식만 두 번하는 번거러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사람을 왜 살렸습니까? 이렇게 지금 복음이 선포되고 있고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있고 구원의 길이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아버지와 연합해서, 화목해서 새로운 삶을 주기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나타나는 쟁애물을 없애기 위해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질병의 요소로부터 치유하고 자유케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설명하고자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치유는 죄에서 자유케하기 위해서 육체적인 고통에서 자유케하기 오신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 그러니까 치유는 복음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지금 복음이 증거되고 있다는 것은 치유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외적인 상처나 아픔이나 병들이 있다면 내적인 그러니까 심리적인 병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포함해서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동시에 치유가 따라오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에게 치유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 마다 심령이 변화되는 것은 심령이 치유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치유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데 자기도 모르게 용서가 되는 것은 이미 내적인 치유가 일어났다는 증거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역사는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할 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 이미 천국이 있으니 그 피의 능력이 심령과 육신의 치유를 통한 해방의 역사를 이룬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 하로 갈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귀신이 물러가며 각종 병이 치유되는 것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미 이 땅에서는 복음이 선포되었고 그 복음의 증거가 치유로 나타나고 있음을 깨달으셨다면 치유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내적인 치유와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해방받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복음이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치유의 목적은 지금도 복음이 역사를 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고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증거가 믿는 자로부터 시작됨을 다시 한번 깨달으시고 내적치유와 육체적 치유를 체험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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