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적을 아십니까?(Do you know the sign of Jonah?) 눅11:29-32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눅 11:29-32)
참조: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1-3)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마 16:4)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Lent)이라 함은 기독교인들의 회개의 절기입니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금년은 3월1일)부터 부활절(금년은 4월16일) 전날(4월15일)까지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속죄와 성찰의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초대교회시대부터 이 기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하며 축제를 금하고 구제를 베풀며 평소보다 신앙의 일(Daily office)에 더욱 힘쓰며 고행의 기간으로 여겨왔습니다. 동방교회나 서방교회가 이 사순절을 매우 중요시했고 때로는 40일간, 또는 세이레(21일간)동안 금식을 하되 저녁식사 한 끼만 허용하는 금식절기를 선포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순절을 희랍어로 ‘테사라코스테’(τεσσαρακοστή)라고 불렀는데 이는 ‘40일의 기간’이라는 말입니다. 나중에는 세주간이나 두주간의 금식기간도 테사라코스테(τεσσαρακοστή)라고 불러 ‘사순절 금식절기’의 일반적 호칭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금식이나 고행을 중요시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여 회개함은 물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구제를 베풀며 매일매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성서일과(Daily office)를 잘 지키도록 강조하는 기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놓으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주일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요나의 표적’(the Sign of Jonah)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이 세계가 너무 악하니 요나의 표적밖에는 구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악한 세대에 보일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나는 요아스(BC798-785)와 여로보암 2세(BC780-752) 때 예언활동을 하던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당시 니느웨(Nineveh)는 앗수루(Assyria)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였습니다.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할 것이니 그곳에 가서 회개운동을 전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요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앗수르는 망해야 되는 나라입니다. 더구나 니느웨 사람들(Ninevites)은 포악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원수들이었습니다. 요나는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요나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니느웨의 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다시스는 이스라엘의 서쪽에 있는 지금의 스페인 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하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명했는데 요나는 서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요나를 실은 배가 지중해 한 복판에서 풍랑을 만납니다.(욘1:3). 누구 때문에 이 배가 풍랑을 만났는지 제비를 뽑았더니 배 밑창에서 자고 있던 요나가 뽑혔습니다. 요나는 바다의 제물로 던져집니다. 그때 바다 밑을 지나던 큰 고기에 삼키고 말았습니다. 큰 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으면서 참회를 했던 요나는 하나님에 의해 구원되어 육지에 토해져서 결국 니느웨에 가서 회개운동을 전개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3일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17)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3일간 갇혀 있으면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살아왔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치려 했던 자기를 불러 세워서 바른 길로 가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불순종의 죄로 인해 죽음으로 떨어졌으나 자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자기를 건져내셨음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저버립니다. 그러나 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키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욘 2:8-9)
이 기도 속에 요나의 표적이 들어 있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곧 “참된 회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에게 구할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세대들은 “회개”가 무엇보다 시급하고 살아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나가 어떤 회개를 했는지 알아봅시다.
첫째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요나는 매우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입니다. 결국 50여년 뒤에 니느웨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BC722). 더구나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야만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서 회개를 촉구하여 구원받게 하라고 하셨을 때 죽기보다 더 싫었습니다. 결국 거역하고 아예 예언자의 사명을 접으려는 심정으로 먼 나라로 도망치려 했습니다. 사실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니느웨가 빨리 망해야 할 나라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 다른 이방인, 특히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적교만입니다. 편견과 차별로 가득 차 있던 요나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온 세상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회개운동을 촉구하면서도 썩 내키지 않아하는 편견된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해서 귀한 진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0-11)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나만”이나 “우리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인의 하나님이십니다. 많이 가진 자도, 적게 가진 자도, 많이 배운 자도, 못 배운 자도,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을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고 하였습니다. 어떤 영어 번역에 보면 “죄를 덮는다”는 표현이 “많은 죄를 싸매어 주고”(wrap around a multitude of sins)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처를 싸매주고 낫기를 기다리는 너그러움으로 사랑하면 우리 마음도 넓어져서 누구도 용서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남편의 허물, 아내의 허물, 자식의 허물이나 실망도 다 덮을 수 있고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주어진 사명을 다시 찾는 회개였습니다. 본래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맡기셨다고 해서 “예”자는 “맡길 예”자를 씁니다. 요나에게는 단지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를 미워하는 그는 그 사명을 버리고 아예 먼 땅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사명을 집어던지고 있었습니다. 도망가는 요나를 하나님은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미리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다가 그를 삼키게 하였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서원한 것을 무엇이든지 지키겠습니다.”(욘 2:9)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의 끝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다시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는 기도였습니다.
에이든 윌슨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는 17세 때에 타이어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전도자가 “어떻게 구원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면 하나님께 그 방법을 알려 달라고 구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그에게 하나님의 소명이 임했습니다. 그 후 그는 평생을 “하나님을 추구하는 여행”으로 일생을 바치면서 40여권의 명저들을 저술했습니다. 1963년 6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토저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사람 A. W. 토저”라고 비문이 적혀 있답니다. 평생을 사명을 따라 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칭송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창조주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세속의 삶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보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세상을 사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간호사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은 거룩한 사명자였습니다. 그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이 사명을 시작한 나이다. … 나도 오늘부터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인생이 되자.” 이때부터 그는 낮고 비천한 자들의 일이라는 간호사의 이미지를 바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후 간호사는 가장 존경받는 여성의 직업이 되었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되었습니다. 그녀는 거룩한 사명자였고 도전자였으며 진정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명자가 되면 됩니다. 자기를 향하였던 이기적 삶에서 이웃을 향한 삶으로 방향을 바꾸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라 하는데 이는 곧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욕심에 가득찬 마음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거역과 불순종의 삶을 순종의 삶으로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신문에 보니까 40대와 50대에서는 암으로, 60-70대에서는 뇌졸중이나 심장질환으로 죽는 확률이 제일 높답니다. 그렇지만 교통사고로 죽는 비율도 엄청납니다. 하루에 약35명이 교통사고로 생활능력을 잃어버린 장애자가 된답니다. 이런 통계숫자는 우리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순간 한순간을 의미 있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깨닫고 사명자의 삶을 살아야 후회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온 줄 알았더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저버립니다. 그러나 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겠습니다.(욘 2:8-9a)
이 기도는 요나가 스스로 지었던 죄를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저버린다는 말로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은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짐승과 같다는 말입니다. 요나는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나2:6에서 그는 이렇게 회개합니다.
『나는 땅 속 멧부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 가두어 놓으려 했습니다만,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가도 하나님은 스올까지 따라오셔서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 ‘스올’은 음부를 말합니다. 죽음의 멸망까지 따라오셔서 하나님은 요나를 구원해 주시는 그 크신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택한 자를 끝까지 붙들고 계시고자 하시는 자비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신해도, 도망하여 스올까지 내려갔어도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에 오염되어 우리의 양심이 시커멓게 더럽혀 있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포옹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은혜로 우리는 오늘까지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쏟으시며 채찍에 몸이 찢겨져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려는 마음이 계셨기에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찬405장)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요나의 표적입니다. 끝까지 “회개”하는 것밖에 없다는 표적입니다. 회개합시다. 우리의 생각을 바꿉시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봅시다. 잃어버린 사명을 되찾읍시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깨달읍시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짐승에 불과합니다. 위인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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