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서 오는 표적 막8:11-13
사람에게는 오감(五感)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감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目)과 맑은 소리를 듣는 귀(耳)와 향기로운 냄새를 맡는 코(鼻), 그리고 맛있는 음식맛을 구별해내는 혀(味)와 보드라운 것을 느끼는 피부(觸)를 말합니다. 그 오감을 잘 활용하면 우리는 보다 즐거운 삶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합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인생을 즐기기도 합니다.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면서 황홀감에 도취되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먼 곳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느낌과 감각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그런 감각들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말에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수없이 듣는 것보다 자신의 눈으로 단 한번이라도 보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보지 않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귀로 듣는 것이나 냄새를 맡는 것이나 피부로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쉽게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눈으로 보거나 인간이 직접 체험할 수 없는 것에까지도 오감을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감을 통해서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모두 부인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느끼고 체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오감을 통해서 체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영적인 진리들을 어떻게 오감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33: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감각만을 내세우며, 감각적으로 경험해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아마 오늘 여기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 가운데 하나님을 직접 보고 나서 믿은 사람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을 보고 나서 \'천국이 있다\' \'지옥이 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감각이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감각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감각으로 느끼고 경험한 것만을 인정하고,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부인한다면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황폐해질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의 세계는 감각의 한계 안에 결코 머물 수 없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가장 신앙적이어야 할 사람들이 가장 비신앙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 스스로도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접근한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가장 불신앙적인 사람들의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힐난하며 시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접근한 것입니다. 여기 \"힐난했다\'는 말은 단순히 예수님께 대해서 의구심을 표명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여서 비난조의 말을 퍼부었다는 뜻입니다. 한두 마디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을 향하여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분이 결코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며 메시야도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천국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까지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예수님이 보통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바로 뒤인 마가복음 8:27절 이하에 보면,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특별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런 당시의 상황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잔득 긴장을 하게 되었고, 더 이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접근해서 예수님을 힐난하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던 중 아주 결정적인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란 말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요 메시야라는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기적들을 통해서, 또 많은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바로 앞에 보면, 예수님께서 떡 7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런 기적을 아무나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 하나만 보아도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베푼 기적보다도 더 크고 확실한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조금 전에 떡 7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이셨던 기적을 직접 보았거나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른 표적으로 보여달라고 요구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행한 모든 이적을 하찮은 것으로 취급했다는 말입니다.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것도,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도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거라사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것도, 심지어는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신 것도 그들에게는 하찮게 보여졌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이나 떡 7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이신 기적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놀라운 일 아닙니까?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라도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이 어디 보통 일입니까?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데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마가복음 3:22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어쫓고, 기적을 행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 귀신의 종노릇하며 기적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귀신의 종노릇하는 사람 정도로 매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에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거나 내 기대와 다르다고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몰아부쳐서는 안됩니다. 내 생각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리면, 때로 하나님의 뜻도 왜곡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내 생각만을 내세우다 보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전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해 버립니다. 그걸 우리는 \'신앙적인 아집\'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적인 아집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것보다 더 무섭고 더 위험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절대적으로 옳은 거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충고나 권면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도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내 생각대로 재단해버리고 맙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신앙만이 최고이고, 내 생각만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적인 아집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귀신의 종노릇하는 사람\'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판단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지금까지 행한 것은 다 필요 없고, 자기들의 기준에 맞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요구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런 요구를 받아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눈이 보이는 어떤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우리가 경험한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말해 주면, 그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 말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해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 기준에서 말하지 말고, 내 기준에 맞게 이야기 해봐!\" 그런 뜻입니다. 믿지 않는 자기들의 기준에 맞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하면 우리는 대부분 말문이 막혀버리고 맙니다.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정상입니다. 자기들의 기준에 맞는 증거나 표적을 보여달라고 할 때에는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샥스핀\'이란 음식을 아십니까? 저도 먹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릅니다만, 상어 지느러미로 만든 음식이랍니다. 제가 만일 오늘 점심 식사로 상어 지느러미로 만든 샥스핀이란 음식을 먹고, 여러분에게 \'삭스핀이란 이런 거예요\' 그렇게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여러분은 그저 짐작만 할 뿐, 그 맛이 어떤지 모르실 것입니다. 직접 먹어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어느 정도 \'아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 그 음식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에 속한 영적인 비밀을 아무리 설명해 주려고 해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바리새인들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극한 슬픔과 실망, 그리고 더 나아가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로 표현하면, 바리새인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말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고, 가장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적이고 영적인 무지를 보는 순간 너무나도 허망하고, 너무나도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입니다. \'저렇게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백성들의 영적인 지도자라고 자처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까, 그들의 교만과 외식에 진절머리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단호하게 표적을 보여주시길 거부하셨습니다.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분명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표적 보여주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왜 거부하셨겠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표적을 요구한 바리새인들의 의도가 불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책잡아 넘어뜨리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어떤 표적을 보여주셔도 그들은 그걸 또 책잡을 것입니다. 의도가 불순할 때에는 어떤 증거를 보여주어도 그걸 수용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우리에게 신앙적인 표적을 요구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네가 뭐든지 말해봐라. 나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증거도, 어떤 표적도 수용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하는데, 시험하고 책잡으려는 의도도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증거를 보여주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에 하숙을 했습니다. 하루는 하숙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여호와 증인 두 사람이 하숙집에 들어와서 하숙집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교회 다닌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신자였는데, 한 두 시간여 동안 자기들의 교리를 이야기하면서 하숙집 아주머니를 꼬드기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제가 있는 하숙방에까지 다 들리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할 때에 피가 거꾸로 치솟은 것처럼, 저도 꼭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들고 나가서 그들과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성경을 펼쳐가면서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절대로 제 말이나 성경의 말씀을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그러더랍니다. \"젊은 학생이 성경에 대해서 참 많이도 아네요\" 그 한 말 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교리에 세뇌가 되어버려서 아무리 성경말씀을 알려주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성경이나 믿음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족보 이야기, 율법에 대한 다툼, 이런 것들은 초대교회 교인들을 유혹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술책이었습니다. 무익한 변론을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이단들이 믿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것들은 피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고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요구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2:4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요나의 표적\'입니다. 여러분,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배속에 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만이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적자들에게 보여주실 표적이 자신의 죽으심이었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믿는 자로서의 표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도 역시 죽음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죽이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정욕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던 옛생활을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죽은 자로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살아갈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하늘의 표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이게 바로 우리의 고백이자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희를 피해버리셨습니다. 그들과는 더 이상 상종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단호한 대답과도 같은 행동이셨습니다. 지금까지 보여진 여러 가지 이적들과 말씀들을 통해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얻지 못했다면, 그 어떤 표적을 주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뜨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더 큰 은혜만을 구한다면, 그건 지금까지 베풀어진 이적과 말씀은 무시하고 \'하늘로서 오는 표적\'만을 구한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는 신앙입니다. 크고 감각적인 은혜가 아니라, 이슬과 같이 우리의 삶과 영혼에 임하시는 은혜를 깨닫는 것이 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혹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신앙\'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신령한 은혜보다는 감각적인 경험만을 바탕으로 신앙생활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자기의 기준을 내세워 그 기준에 근거하여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화나시게 만드는 아주 잘못된 신앙일 뿐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와 진리 안에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것 속에 보이지 않게 임하시는 은혜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작은 은혜가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감각적이고 큰 은혜를 사모하기보다, 작은 것 가운데 임하시는 은혜를 깨닫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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