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보는 눈을 뜨라

기적을 보는 눈을 뜨라!/막8:22-26

기적을 보는 눈을 뜨라!
막8:22-26





우리 주변에서 하루 동안에도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적들을 잘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적들을 불 수 있는 눈이 뜨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야가라\'폭포를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탄성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한 사람은 열심히 물이 떨어지는 폭포의 장판을 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박수를 치거나 탄성을 하?일이 없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보기만 할 뿐 무표정한 태도를 하고 있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기만 하고 왜 표정은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역시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냥 폭포를 향해 보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묻던 사람이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신비한 광경을 보기만 하고 왜 가만히 있습니까?\" 역시 그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묻는 사람은 화가 나서 \"여보! 내 말이 말 같지 않소? 그때 옆에 섰던 어떤 사람이 \"이분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분입니다\" 라고 대답을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은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뀌는 그 우렁찬 폭포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지난번 미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제가 탄 비행기에 80이 넘는 노인이 뒷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옆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제게 들렸는데, 그 노인의 말이 지금부터 53년 전 1946년경에 27세 때 미국으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갔었는데 석 달이 더 걸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12시간만에 한국까지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감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서 듣는 20대 젊은 사람은 도리어 그 할머니의 말이 이상한 듯 \"할머니 기적은 무슨 기적이에요. 12시간이 얼마나 지루한데요\" 라고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80노인은 12시간만에 주파하는 비행기를 보고 기적이라고 놀라고 있는데, 20대 젊은이에게는 전혀 기적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학설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지방은 주로 석회층으로 이루어진 지대이기 때문에 그 석회질이 시력 장애에 크게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경 이야기가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한 소경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고쳐주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그 소경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셔서 눈에 침을 바르고 안수하여 주면서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경은 놀라는 표정으로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보이기는 하되 희미한 것이었고, 완전한 시력이 돌아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안수하여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소경에게 완전한 눈이 열렸고 만물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기적이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던 눈이 열리게 된 것이 기적이요,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소경이 처음 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늘 보고 있는 인간의 모습들입니다. 군데군데 서 있는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자연 그 모습을 보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일상 보고있는 것들을 그 소경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경은 그것이 기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들,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생명체들! 이들이 움직이면서 무수한 사건을 만들고 있는 것들이 다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수 없는 기적들이 우리 주변에서 얼어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기적을 보고 감탄하며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사는 자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시편 105편 4절에서 8절을 보면 눈뜬 시인이 기적을 보고 찬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주리고 목마름으로 고생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심과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른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으로 이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그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찬송한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누구나 거할 집을 얻지 못하면 방황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누구나 먹을 것, 마실 것 없는 사막지대에 들어서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은 또한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그런 고통에서 소리치지 않을 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인은 사막을 지나 한 마을을 찾게 되었고, 그 곳에서 누구나 먹는 것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 먹었을 뿐이고 마실 것 마셨을 뿐입니다.

마을에 들어가서 거할 곳에 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이것이 기이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누구나 다 거처하는 도성,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 누구나 다 마실 수 있는 물, 그것이 시인에게는 기적이 아닐 수 없었고 진정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기에 찬송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일상 생활求?공간에서 다 같이 먹고 마시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인 줄 알고 감탄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 밖에 없습니다.

서울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님이 첫 목회를 할 때에 예배당 뒤에 허술하게 지은 곳에서 혼자 자취를 하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문제는 어찌 그리 많은지 첫 목회자로서 감당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찬송가와 담요 하나를 가지고 삼각산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그날 따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 버스 종점에 내려 비를 피하여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비를 맞으며 산을 올라가는 키 작은 자신의 모습을 길가 나무들이 비웃는 것 같고, 웅장한 바위들이 비웃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때는 어머니가 그럴 수 없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라고 늘 기도하며 권고하시던 어머니 때문에 이렇게 초라한 목회자가 되었고 그래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원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바위 밑에 가서 자리를 하고 사흘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한탄인지 하나님께 항변인지 애절한 기도였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사흘 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사흘 간의 고투였으나 어떤 신비한 음성도 듣지 못하였고, 어떤 신비한 꿈도 꾸지 못한 채 교회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사흘 전에는 산의 숲들이 자기를 비웃는 것 같아서 불편스럽기 그지없었는데 이날에는 그 숲들이 어찌 그리 신기하고, 자신을 전송해 주는 군중과도 같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사흘 전에는 무섭기까지 하였던 바위들이 어찌 그리 아름답고, 자기를 향해 넌지시 웃는 듯 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몰골도 어찌 그리 힘있게 보이는지 보기는 작아도 하늘을 혼들 것 같은 자신감이 쏟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감사와 찬송이 터져 나왔고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주일 강단에서 말씀 전할 때 이전처럼 두려운 것이 없어지고 용기가 나든지 몇 명되지 않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것 같았고, 문제의 성도들도 얼굴이 펴지는 것을 불 수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기적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기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똑 같습니다.내 눈이 흐려지고 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면 주위의 모든 것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고, 모든 것이 불편스럽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내 눔이 열리고 내 마음이 열리고 보면 주위의 모든 것이 나를 반기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지게 되고 바로 그것이 기적임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늘의 별만 따려고 하지 자기 주위에 있는 많은 별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백성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이 기척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의 섭리요, 역사요, 기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세리 삭개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몰골이 키가 작아서 볼품이 없었습니다. 직책이 세리라서 그런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고독했었습니다. 누구든 자기 집을 찾아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는데도 자신은 점잖게 서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자가 못 되고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보아야만 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맞아 주심으로부터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거북스럽고 보기 싫고 불편스럽던 사람들을 자기 재산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거룩한 자만 함께 할 수 있는 성도의 반열에 세리 죄인인 자신과 그의 식구들도 다 참여하게 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삭개오에게 기적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은희 성도가 자기 교회 월간지에 간증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시집 온지 3년 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성급한 시어머니는 혹시나 아이를 배태 할 수 없는 며느리가 아닌가하고 방정맞은 생각을 하며 안절부절 하기에 너무나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3대 독자 외아들과 결혼한 자신이기에 더더구나 주위 눈치가 그럴 수 없이 무서웠고 집 밖을 나오기가 싫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시들어져 있는 자신을 괜찮다고 달래주기는 하나 왠지 모르게 자신을 멸시하는 것 같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4년째가 되어도 역시 소식이 없으니 이젠 노골적으로 시어머니가 불편스럽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때 죽을 수도 없고 살수도 없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곳은 목사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에게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참고 기도합시다\"고 할 뿐 별반 시원스런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5년째에야 배태가 되었는데 배태 소식이 있자 시어머니의 태도가 180도 바뀌어지는가 하면 남편의 모습도 너무나 다르게 바뀌어 지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주위가 자기를 반穗?것 같았고 목사님도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은희 성도는 그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누구나 가지는 아이를 내가 5년 만에 가진 것이 별다른 것이 아닌데도 그것이 그럴 수 없는 기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다 아이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5년 만에 생긴 이 아이 하나 때문에 이것이 시어머니의 마음을 180도 바꾸게 만들고 남편의 마음을 바꾸고 온 주위가 바꾸어집니다. 이것이 기적이었다고 했습니다. 기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잠언 20장 13절에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눈을 떠보면 양식이 없는 것이 아니고 빈들에도 열두 바구니에 남은 것을 거둘 수 있는 양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야의 길에도 풍부히 먹을 수 있는 만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지 못하기에 보이질 않습니다. 이사야 44장 18절에 기적을 보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눈이 가려져 있으니 발람은 그 옆에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이 타고 다닌 나귀는 도리어 눈이 열려 하나님의 사자가 불칼을 들고 서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발람 선지자가 자기의 영적 영안이 열려 있었으면 하나님의 사자가 불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인가? 욥기 42장 5절에 욥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는 순전한 자요, 정직한 자였으나 주를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귀로 듣기만 하였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한 시험을 받았을 때 하나님을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그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예리한 논리를 세우며 신학적이고 종교철학적인 말을 잘 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그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 아니라 귀로만 들었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결정적인 추궁과 책망을 받고서야 비로소 그 눈을 뜨고 주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귀로 듣기만 하였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여러분, 오늘의 신학자들도 눈으로 주를 보지 못한 채 귀로만 신학의 학문을 하고 귀로만 신학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성도들이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귀로만 듣고 하나님을 영안으로 보지 못한 성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기에게는 없습니다. 체험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인간들의 눈이 흐려져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눈이 열렸더면 모든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를 볼 수 있었겠거늘, 자연을 주관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그 눈으로 볼 수 있었겠거늘 그러나 눈이 흐려져 있기에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벌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산에 우거진 산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솜씨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과연 밤에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보고 있으며 우거진 산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찬송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깊이 통찰해 보아야 합니다.

눈을 떠서 보아야 합니다. 눈을 떠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임을 알게 됩니다. 위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아래로는 만물의 신비함율 볼 수 있고,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기적들을 늘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의 눈올 떠서 이제 위를 바라보십시오. 저 위에는 하나님의 역사의 세계가 보일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보좌가 있음을 볼 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래를 보십시오. 이 만물의 모든 신비함은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과 섭리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기적이요, 역사인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