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베푸신 예수님 마4:23-25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주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상식’이다. 상식(常識)이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을 말한다. 이 상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주신 은총 중 하나이다
.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비가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듯이, 상식이란 것 역시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식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이 신앙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말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데 행동하곤 하는 경우가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의 몸이 아프면 어디에 가야 하는가? 경찰서로 가는가, 아니면 우체국으로 가는가? 당연히 병원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다. 이것이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바른 자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기 때문에 때로는 기적 같은 일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병이 들어 우체국에 갔는데 그곳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하실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상식을 넘어서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식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체국에 가서 병이 나았다고 하여 병만 들면 항상 우체국으로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 그렇게 되면 질서가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병원과 우체국이 하는 일이 혼돈되거나 오히려 일의 효율성이 떨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질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 자기가 원하는 것만 추구하는 것은 ‘맹신(盲信)’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은 ‘초상식(超常識)’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맹신은 ‘비상식(非常識)’이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앞에서 희한한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최종 목표는 당신의 뜻을 보이시며,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현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사람들조차도 다 죽고 말았다. 병이 낫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살려두셔서 간증(?)을 하도록 하시면 될 것 아닌가?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병을 낫게 하시면 될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그런 병을 고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 당시처럼 병이 잘 낫지 않는다. 구약의 경우에는 우리가 볼 때 더 화려한(?) 기적들이 많았다. 바다가 갈라지거나, 굳게 세워진 여리고성이 무너지거나, 태양이 멈추는 기적 등의 대단한 기적들이 있었다. 그런데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예수님 당시엔 구약시대보다 조금 강도가 약한 기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나아기 지금의 시대는 기적 자체로만 본다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아닌가 모를 정도로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설령 나타난다 할지라도 구약시대와 초대교회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미(微微)한 기적이 있을 뿐이다. 냉철하게 볼 때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런 신학적인 배경도 없이 오늘날도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거나, 그것을 강조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말해놓고도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뻔한 대답을 하여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고쳐주셨다.
무덤 사이에서 살던 귀신들린 자는 자기가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도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살려주셨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사실상 맞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도 하셨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이 밥을 달라고 하면 부모는 기뻐하며 밥을 준다. 그러나 꼭 달라고 해야만 주는 것은 아니다. 아주 어린 자녀에게는 챙겨서 먹여줘야 하고, 말을 듣지 않거나 병이 든 자녀에게는 억지로 밥을 먹여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거나, 교육시키시거나, 강건하게 만들기 위하여 얼마든지 당신의 방법대로 일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너무 좋은(?) 나머지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낫게 해 주신다고 확신(?)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렇게 확신을 한다고 하면서도 기도하면서 병원에 가거나, 약국에서 약을 사서 복용하거나, 한방병원에 가서 침을 맞는 등의 행위를 한다는 사실이다.
정말 확신한다면 아예 병원에 가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신다’는 확신(?)은 하면서도 병원에 가는 것은 사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낫게 해 주신다는 확인이 없어서 병원에 간다’라고 하면 더 솔직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도 병원을 찾는 것은 양다리를 걸치는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남들을 위해서는 병 낫기를 그토록 확신(?)하며 기도하면서도 자기의 병에 대해서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사람들을 곧잘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하나의 위선이다.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남들에게는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면서도 자기의 병에 좋다는 보양식품을 가려서 먹으니 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차라리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아예 병원에 가지를 말거나, 굳이 병원에 가려고 한다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병 낫기를 기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면 의사에게 가면 된다. 병이 들어 병원에 가는 것을 믿음이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는 어정쩡한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그냥 가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알고 담담하게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사 역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으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다는 말씀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마 19:29). 그렇다면 비록 비신자 의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신비하다. 우리는 ‘신비’를 인정한다. 하늘의 별들, 들에 핀 꽃 하나도 다 신비하다. 흘러가는 물이나 가을 들판에 날아다니는 잠자리들도 신비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도 신비하다. 더욱 신비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셔서 믿게 되었는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신비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신비주의의 끝에는 ‘내’가 있다. 즉 내가 주인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내가 원하는 것은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 맨 꼭대기에는 ‘나’라는 존재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함을 믿는 것은 그렇지 않다. 맨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비한 현상이 주어지면 하나님께 감사한다. 만일 주어지지 않는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가령 누군가가 병이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하나님께 신비를 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낫고 안 낫고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결코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적인 차원에서 구할 수는 없다. 병이 꼭 나아야만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거나, 꼭 나아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신비함을 주신 경우는 얼마든지 있기는 하지만, 항상 낫게 해 주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낫게 하시고, 낫지 않도록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비를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도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좋은 천국에 가게 된다. 그러나 신비주의적으로 믿는 천국은 결국 인간 세계의 연장선일 뿐이다. 비록 그들이 말하는 천국이라 할지라도 결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신비주의자들이 가는 천국이 있다고 하더라도(물론 천국은 그렇지 않지만) 결국 그곳은 또 큰 아파트와 작은 아파트의 차이가 있는 세상의 연장선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기적을 베푼 것은 그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흔히 말하듯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자꾸 손가락만 바라본다면 본질이 왜곡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신비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믿을 수 없는 자가 성경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적은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꼭 기억할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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