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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과 새 사람” (엡 4:17-24)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오늘 구정을 맞이하였는데, 2010년을 시작하면서 새롭게 다짐했던 우리의 그 마음을 오늘 이 구정을 맞이하며 다시금 확인하시는 귀한 은혜를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옛 사람’―말하자면 예수를 모르는 사람, 예수를 모르는 비기독인의 세계―그 옛 사람과, ‘새 사람’―예수를 믿는 사람, 바로 오늘의 그리스도인과를 대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비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물이란 이렇게 비교를 할 때 그 정체가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 믿기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하는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모태신앙으로, 예수 믿기 전의 상태를 갖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만약 내가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좋은 비교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오늘에 대해서 감사를 할 수가 있고, 그 고마움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며 더 높은 신앙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데, ‘이방인’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이것은 기독교적 개념에서의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사람과 이방인’ 할 때의 이방인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런 차원에서 믿지 않는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일곱 가지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예수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설명을 들으실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옛사람’을 생각하십시오. ‘믿기 전에는 내가 이러했다’ 하는 생각과, 또 ‘오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다’ 하는 생각, 그리고 또한 ‘내가 믿지 않았더라면 이랬을 것이다’ 하는 바로 그런 관점에서 본문을 읽으시면 크게 은혜가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는데 오늘 내가 이렇고,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오늘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이만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오늘의 생활 바로 여기에서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더욱 더 은혜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옛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17절에 보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하고 말씀하십니다. ‘허망’―니힐리즘! 현대철학이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이 ‘허무’인 것을 보게 됩니다. “허망하다. 있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없다”―이것입니다.
왜 이렇게 허망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바로 ‘목적’이 분명하지 못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현대인의 결정적 결함이 바로 ‘목적’이 분명하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도 왜 하는지 그 목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졸업하고, 취직하고, 돈 벌고… 그런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 자체는 될 수 없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결혼을 해도 왜 하는지 그 분명한 목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삶의 목적이 희미해져버리면, 삶의 가치도 희미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는 목적 가운데서 가장 귀한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로마나 파리 같은 곳에 가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둘러보면, 그 옛날 훌륭한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 남기신 조각이라든지 그림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천장에 그려놓은 그 많은 그림들! 그리고 조각들! ― 그것을 한 사람이 해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그 많은 그림을 그곳에다가 그렇게 그릴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것을 그리는 동안에 작가의 고개가 내려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 같은 분들이 말입니다. 그 높은 천장에 매달려 거꾸로 쳐다보면서 말이지요. 그분들이 돈을 바라고 그렇게 힘든 작업을 수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그 당시에 돈에 위협받지 않는 생활형편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같은 일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목적을 잃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엌에서 일하고 시장에서 장사하고 하는 주제에 내가 무슨 거창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겠는가 생각하시는 분들이 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밥 한 끼를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그것입니다!! 가나, 오나, 드나, 나나, 무엇을 하든지 목적은 분명해야 합니다. 그 목적이 시시한 것이거나 없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 허무해 지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우리네 부모님들이 자녀를 키우고, 열심히 수고하여 돈 벌고, 이제 아이들이 다 결혼해서 나가버리면 집이 휑하니 비니까 ‘아, 허무하다’ 합니다.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허무합니까? 자녀를 키우면서 어디다가 목적을 두었던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목적을 세웠더라면 집안 식구가 더 나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허무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이것 하나만이 영원히 존재하는 목적이고, 그 밖의 모든 일들은 절대로 목적이 될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목적될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과 ‘목표’는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둘을 우리가 가끔씩 혼동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영어로 말하면 목적은 purpose이고, 목표는 goal입니다. 따라서 그 성격상, ‘목표’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 ‘목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상징적이고 철학적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목표와 목적을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내가 돈 몇 억을 벌어야겠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입학해야겠다 할 때, 그것은 목표입니다.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런 일은 절대로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가끔씩 뉴스에서 이런 얘기들이 보도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지게를 지는 사람이 연말에 저축상을 받습니다. 어떤 은행에다 저금을 했는데 5천만 원이나 모은 것이지요. 그래서 시상을 하는데, 시상식 후 아나운서가 그에게 묻습니다. “그 돈을 어디에다 쓰실 겁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쓰다니요. 다시 더 모아 일억을 만들어야지요.” “일억을 모으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또 일억을 만들어야지요.” “그런 다음에는요?”…… 끝내 아나운서가 기대하던 대답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10억 벌어야지요.” 할 뿐입니다. 이 사람은 ‘목표’는 있었지만 ‘목적’이 없습니다. 목적이 없으니 그 사람은 미구에 반드시 그 돈으로 인해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자기 자신 한 푼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그 재산을 놓고 자식들은 다투게 될 것이고, 결국은 허망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목적이 없으면 의미도 없고, 방향감각도 없고, 내용도 없습니다. 그래서 허망해지는 것이지요. 신앙 없이는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신앙으로부터 오는 목적이 아니고는 목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불신앙의 사람들은 18절에 보면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총명이란 판단력을 이르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내가 마땅히 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 그것을 아는 것이 총명입니다. 그런데 총명이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내가 오늘 무엇을 해야 될지 모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를 만나야 될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삶에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마땅히 총명이 밝아져야 되는데, 신앙이 없을 때―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을 때, 이 총명은 흐려집니다. 그래서 오늘도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만나지 않아야 될 사람을 만나고,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먹고,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했다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총명이 흐려졌습니다. ‘뭐,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싶은데도 그렇게들 하고 있습니다.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시행착오가 왜 생기느냐?――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총명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특히 열심히 잘 믿는 사람들은 다 똑똑하다!―저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실제로 보세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생활 하는 모습이나, 도덕생활 하는 것이나,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나, 모든 면에서 훌륭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해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사실상 멍청합니다. 왜요?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무지하다” 하였습니다. 무지!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무지’와 ‘죄’를 동일시합니다. 이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몰랐으니 그만이다’ 하려고 듭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죄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에서 20절 말씀을 보세요.(p.240)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우리가 잘 아는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모든 과학적 지식의 기초는 신앙이라고 말이지요.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고서야 비로소 지식이 성립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지식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에 대한 지식이나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우주에 대한 지식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없이 자신을 본다면, 결국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 아무리 잘났다고 뽐내며 날고뛴다고 그래보아야, 기껏 자기 자신은 원숭이의 후예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불신앙의 결과로 네 번째는 ‘마음이 굳어진다’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어떤 죄인도 일시적으로 죄인이 되는 경우는 없다.”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난데없이 죄인이 되는 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이 죄를 짓기까지는 적어도 수십 번, 수백 번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슨 변을 당한 때면 으레 ‘천재(天災)냐 인재(人災)냐?’ 그러지 않습니까? 어떤 사건이든지 다 예고가 있었습니다. 미리 알 수 있었습니다. 미리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이, 내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완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3장 13절에 보면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해야 할 시간에 회개하지 않고, 돌이켜야 할 시간에 돌이키지 않고, 순종해야 될 시간에 순종하지 않으면, 마침내 굳어지고 맙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굳어진다’는 이 말은 성경원어로 ‘프로시스’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석회석, 다시 말해서 화석화 하였다는 뜻입니다. 본래는 돌이 아닌데 마음이 굳어져서 돌이 되었습니다. 실제적으로 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이지요. 반복되는 충고와 계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회개의 기회를 놓쳐버리면 굳어져버리는 것입니다. 화석화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이렇게 마음이 굳어져버린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애굽의 바로 왕입니다. 보세요. 열 가지 재앙을 두드려 맞았지요. 그 어느 것 하나인들 쉽게 당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열 가지나 얻어맞았습니다. 그때마다 주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을 다 얻어맞았는데, 사실은 열 가지가 아니라 열 한가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열 번째 장자가 죽는 재앙을 당한 후에 애굽을 떠나라고 해 놓고도, 다시 완강하여져서 뒤쫓아 오다가 결국은 홍해에서 모조리 수장되어버리는 변까지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고로 마음은 항상 부드러워야 합니다. 항상 돌이킬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굳어져서, 딱딱해져서, 화석화 하고보면, 이제는 구제불능입니다. 끝장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마음이 굳어지게 됩니다. 강퍅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결과 다섯 번째는 ‘무감각해진다’ 하였습니다. 19절에 보면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성경원문으로 보면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감각능력이 무너져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굳어지고 보니 이제는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죄를 죄로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구제불능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신앙이면 이런 사람이 되고 맙니다. 무감각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섯 번째는 “방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방임하여’―이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gave up, 벌써 다 내버렸다는 것입니다. 포기했다는 것이지요. 가끔 ‘사람답게 사는 것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막가는 것이지요. ‘막가파!’―그것입니다. 방임! ― 방임이라는 것은 끝난 것입니다. 그저 되는대로 입니다. 아무 제재가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그러니 가책도 없고 누구 말 들을 것도 없고…… 얼마나 무섭습니까? 인간되기를 포기한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는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하였습니다. 끝없는 욕심, 동물적인 욕심, 때로는 악마가 주는 욕심――그 욕심에 끌려서 행동합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이것이 옛 사람의 모습이요, 신앙 없는 사람의 모습이요, 신앙 없는 사람의 운명인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오늘 본문은 불신앙으로 인해 나타나게 되는 일곱 가지의 특징을 말씀하고 나서; 그것은 옛 사람이고, 이제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사람’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다시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 주십니다. 먼저 21절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이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냥 내가 배우고 내가 진리를 탐구해서 내가 터득하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우면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거기서부터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 없는 사람은 듣지를 않습니다. 그런고로 복음은 꼭 들어야 됩니다. 이렇게 듣고, 그리고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받아들이는 것, 수용하는 것―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를 수용할 때에,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새 사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때때로 우리는 아직도 내가 판단을 합니다. 내가 선하고, 내가 악하고, 내가 진리고, 흑이고, 백이고, 옳고, 그르고……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도 다 그에게 맡기세요. 주님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내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주님의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내 속에서 중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거룩함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인 것입니다!! ― 듣고 받아들일 때!!
그리고 다음으로, 24절에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십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새 사람으로 ‘지음 받았다’ 하는 말씀은 성경원어로 ‘크티스덴타’란 말이 쓰이는데,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수동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내가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나는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내가 수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의 문제들을 살펴보세요. 생태계의 파괴라든지, 대기 오염, 유전자 문제들…… 모든 문제들이 다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생기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바를 내가 여기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는 낡은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하십니다.
여기서 조용히 우리 스스로를 진실 되게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졌는데, 이상하게도 구습을 못 벗은 사람들을 보게도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분명히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도 입버릇이 아직 예수 믿는 사람의 것이 덜 된 것이지요. 행동이 예수 믿는 사람의 그것이 아닙니다. 습관이 아직도 옛 사람의 습관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에 합당한 새 옷을 입기 위하여 낡은 옷을 벗어라!
우리 가운데 지금 잘못된 습관이 많습니다. 버려야 될 습관이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 생활풍습 속에 너무나 잘못된 습관들이 많습니다. 일일이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옛 습관, 벗어버려야 됩니다. 마치 옷을 벗어버리듯이, 신분이 달라졌으면 옷도 달라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습, 옛날의 습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습관, 그런 것을 벗어버리라고 하십니다.
한 가지 꼭 예를 들어본다면, 우리 민족에게 안타깝게도 놀이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고 있지를 못합니다. 오늘처럼 명절이 되어서 친척들이 오랜만에 모인 자리인데, 거기 보면 둘러앉아서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고스톱’입니다. 어쩌다 산에 올라가보면, 좋은 공기 마시며 좋은 경치 그윽이 감상하면 좀 좋습니까? 그런데 거기서도 보면 둘러앉아서 소주잔을 돌리고, 고성으로 떠들어대고, 심지어는 화투짝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도 됩니다. 구습을 벗어버리라 말씀하십니다. 구습! ― 낡은 습관입니다. 습관화한 것입니다. 같은 행동이 반복되면 이것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철학이 되고, 철학이 그 사람의 의식과 가치관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습을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습을 벗어버릴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먼저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내면에서부터―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겉모양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내실이 있어야지, 그리스도인인 척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만 흉내 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경건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주일 예배에만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과 수요일 새벽기도 같은 모든 집회시간에 열심히 참석하고, 적극적으로 봉사하며,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심령이 새롭게 되어’에 이어서 “하나님을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목적이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될 때, 우리는 새롭게 변화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나이팅게일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30세 되는 생일날 일기에 이렇게 씌어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나의 나이 서른이 되는 날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바로 그 나이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을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이나 많은 잘못된 생각 같은 것들은 다 버리고, 주님의 목적과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부터 목적을 하나님께만,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목적을 다시금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의 표어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목적을 다시금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음을 받았다―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지으신 이를 이제부터는 늘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그 의미를 최우선순위에 놓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참으로 귀중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그 의미를 우리가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흙덩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우리는 재창조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을 입으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새 사람을 입으라!! ― 내용이 그리스도요, 목적이 하나님께 있으면 그의 의식도, 그의 생활양식도, 생활철학도, 생활풍속도 새것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십시오. 탕자는 그야말로 거지요, 탕자였습니다. 그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순간 아버지는 그에게서 옷을 벗기고, “너는 내 아들이다”하고 새 옷을 입힙니다. 이제 이 아들은 그 새 옷을 입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새 옷을 입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 새 사람으로 옷 입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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