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축복을 간직하라/히12:6-13
‘하이데거’는 ‘인간은 던져진 생을 산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고난 속에 던져진 생을 살고 있음을 봅니다. 계속해서 찾아오는 고난의 과제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신앙생활의 한 부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어떻게 맞이하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고난은 그 고난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을 척도 하게 합니다. 고난은 피해 가는 것이기보다는 직면하여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유 있는 고난보다는 그 이유를 인지할 수 없는 고난이 더 많이 있습니다. 내가 범죄하고 잘못하여 실수함으로 찾아오는 고난은 그 원인에 의한 결과로 만들어진 이유 있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그 원인을 바로 고침으로 극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나는 교통법규를 잘 지키며 운전했는데 다른 사람이 운전을 잘못해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쁜 사람은 잘 사는데 그래도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봅니다.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사람도 건강하게 살아가는데 이런 것을 금하고 건강을 관리하며 깨끗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중병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타당성에 대하여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겪을 때에 “왜일까?” 라고 질문하기보다는 “대체 그럴 수가 있을까?” 고 회의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고난을 고통으로만 여기며 살게됩니다. 그러나 고난에서 고난이 주는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때에, 그 고난은 우리 인생을 아름답고 복되게 하는 자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 그 고난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 저자는 우리에게 고난의 축복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고난은 미래를 위한 것
고난은 미래를 위해 있습니다. 미래적 시각에서 고난이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과거 때문에 주어진 결과일지라도 미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범죄의 결과는 고난입니다. 범죄로 찾아온 고난일지라도 회개하게 함으로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것이 되게 합니다. 더구나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은 미래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그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불합리하고 수용할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속죄하시고 사망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부활의 역사로, 곧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인 미래 속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인류구원을 위한 아주 중대한 고난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본인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소경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비롯하여 우리가 범죄 함으로 겪는 모든 고난까지도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고난은 미래 적인 사건입니다. 미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미래 안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하브리 저자는 고난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보아 ‘경책’이나 ‘책망’의 뜻으로서 고난을 ‘징계’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6절)고 했습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저자는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7절)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닌 하나님의 참 자녀이기에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셔서 경책하고 책망하시듯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에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히브리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훈련시킵니다. 힘들고 슬퍼 보이는 과정에서도 우리를 성장하게 해줍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시고,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저자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11절)라고 말씀했고 “그의 거룩함에 참예케 하셨느니라”10절)고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북대서양에서 청어를 잡아 산 청어를 런던 시장에 팔려고 해도 청어가 쉽게 죽음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청어는 성질이 급해서 가두어두면 곧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청어를 냉동시켜 런던으로 운송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어잡이 어부가 살아있는 싱싱한 청어를 런던까지 운송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싱싱한 청어를 팔게됨으로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 다른 어부들은 어떻게 살아있는 청어를 런던까지 수송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비법을 알려고 했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에 비법을 알려달라는 성화에 그 어부는 그 비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청어를 잡아 운송하는 탱크에 바다메기를 몇 마리 넣어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다메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청어이고 청어는 메기를 제일 무서워하는데 메기는 청어를 수송하는 중 청어 몇 마리를 잡아먹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어들은 메기에 잡혀먹지 않으려고 좁은 통 안에서 긴장하여 이리로 피하고 저리로 피하는 중에 잡혀먹는 청어 외에는 모두가 싱싱하게 살아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고난은 우리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훈련과 성장으로 바르게 되도록 하고, 평강의 사람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하며,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장 큰 유익함은, 천국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천국의 영생의 삶을 향하고 하고 확신하게 하며 영생의 삶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고난은 이 세상의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유익함을 줍니다.
여인들은 아름다움이 자신들의 모든 것인 것처럼 속고 살아감을 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인을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10대는 축구공이다. 쫓아다니는 사람이 많으니까/ 20대는 농구공이다. 쫓아다니는 사람이 조금 줄어서/ 30대는 골프공이다. 오직 한사람이 쫓아다녀서/ 40대는 탁구공이다. 서로 미루니까/ 50대는 피구공이다. 필사적으로 피하니까 여인의 아름다움은 지나가 버리는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잠겨있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영생의 삶을 깨eke는 유익을 주시기 위해, 때로는 고난의 방법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베드로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며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고 했습니다.
고난을 주시기까지 모든 유익함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섭리는 고난을 주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 슬퍼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바로 맞이해야
히브리 저자는 고난을 바로 맞이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고난을 맞이하는 자세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고난의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고난에 지배되어 고난의 노예로 끌려 다니면 아픔과 슬픔만으로 끝나는 불행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고난을 바로 깨닫고 그 가치를 소유하면 유익과 축복이 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역사가 됩니다.
히브리 저자는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12: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맞이해서 낙심해서도 안되고 그 고난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망과 원망은 우리로 낙심하게 하여 고난의 가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고난을 무시하고 쉽게 체념하는, 경히 여기는 자세는 고난의 교훈을 잃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도록 가치 있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또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히12:12)고 했습니다. 고난을 맞이하여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결코 편안하고 안일한 삶만을 약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혹을 이기고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고난의 싸움이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가 고난에 적극적으로 마주 대하도록 하셨습니다.
장애물이 전혀 없는 고속도로에서는 운전자가 졸기 쉽고 또 대형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돌맹이가 있는 비포장 도로에서는 아주 빨리 달리지는 못해도 오히려 사고는 적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여 설사 나의 계획과는 달리 늦게 가게 될 지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 고난을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소중하게 여기며 용기와 함께 적극적인 자세로 대처함으로 고난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유익함을 차지해야 합니다.
또한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13)고 했습니다. 고난을 주시기까지 우리에게 목적을 두시고 그 계획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혹이나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에 벗어나 있으면 그 삶을 바로 고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그분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그 사랑과 축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에 대한 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고난과 싸워 반드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한 보석 전문가가 오랜 실험 끝에 다이아몬드의 진짜와 가짜를 식별해 내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그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가짜와 진짜는 눈으로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니라도 간단하게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물에 담가보는 것이다. 가짜는 물에 들어가면 빛을 잃는다. 그러나 진짜는 물에 들어가면 더 찬란한 빛을 발한다. 가짜와 진짜는 함께 물에 담가보면 그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난과 시련을 겪은 믿음과 사랑은 진짜 다이아몬드와 같이 더욱 밝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진짜가 되게 하는 생명 있는 믿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영원한 영생의 세계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보면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서는 쾌락이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서는 고난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적고 큰 고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고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유익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바로 깨달으십시오. 그 고난 중에서 우리를 축복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는 승리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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