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고난의 길은 축복의 통로

광야의 고난 길은 축복의 통로
출2:16-22





따라하십시다. [광야의 고난 길은 축복의 통로]
옆과, [성도님! 광야의 고난길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힘을 냅시다.]
성도여러분! 우리 인생의 삶은 광야길을 걷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미지의 광야길을 걷는 우리에게는 언제 어디서 어려운 일이 닥아올지 알수 없는 불안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광야의 고달픔 삶은 축복으로 가는 통로이므로 통과하지 않으면 승리의 삶을 영유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광야길을 걸어온 인물이 있습니다. [모세][세례요한][사도 바울]입니다.
[세례요한]은 말 그대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제사장이었던 요한은 가만히 자기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세습제로 내려오던 제사장의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고, 사람들의 우러름과 보장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스스로 선택하여 광야로 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극렬하게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목숨걸고 경외하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고,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할 때에도 돌로 치는 사람들의 옷을 맡고 자신이 책임을 지겠노라고 했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이었습니다.
그러나 핍박을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행9:4~6절)
주님의 음성을 들은 그 얼마 후에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로 들어갔다고 [갈라디아서]에서 고백을 합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6~17절)
☞ 여기서 [아라비아]가 광야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라비아 지역을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은 주님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만의 광야]로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사십 년의 세월을 애굽 왕궁에서 보낸 후, 모세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미디안 광야에서 보냅니다. 그 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을 만나 그 집에 함께 살면서 르우엘의 딸 [십보라]와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들까지 낳아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습니다.

광야는 그에게 고달픔이었습니다.
과거 애굽 왕궁에서의 생활은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침구를 정리하는 종으로부터 씻어주고 입혀주는 종까지, 궂은 일이라고는 손에 대보지를 않았습니다. 또 당시 애굽은 앞서가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발달된 학문과 피라미드까지 세울 수 있었던 불가사의한 기술로 애굽은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살던 왕자가 유목민의 천막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먹고 입는 것으로부터 생각하는 수준과 생활의 양식까지 하나 하나가 온통 이전의 애굽을 생각나게 하고 그 생활을 그리워하게 했을 것입니다.

☞ 아들의 이름인 [게르솜]은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인데, 그의 광야생활에 대한 쓸쓸함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광야생활의 고달픔도 아니요, 십보라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은 사건도 아닙니다.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고생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광야생활 속에서 [모세가 모세로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광야가 없었더라면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바울은 여전히 사울이었을 것이고, 모세는 민족 해방의 지도자로서의 모세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고난길은 축복의 통로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그렇다면 광야가 어떻게 축복의 통로가 됩니까?
1,광야의 길은 가볍게 가기위해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 길이다.
저는 이사를 몇번 했습니다. 9년전 군위에서 상모로 이사를 올 때 집사람이 즐겨타던 자전거가 있엇는데 이사짐 차에 실으려고 하니까 장로님이 \"이거 여기에 버리고 갑시다. 상모가시면 탈때도 없습니다.\" 아깝지만 버리고 왔습니다. 도리어 차가 생기는 복을 받았습니다. 또 올해 우방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니 이미 아파트에 이사해본 성도님들이\"목사님 새집에 들어가실때는 모두 버리고 가십시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시고 그곳에 맞도록 다 바꾸셔야합니다.\" 버릴것은 담대히 버려야 하나 결단을 못내려 전부 실고 가서 집은 어울리지 않고 모양도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에게는 움켜쥐고 안 놓으려고 하고 도리어 모으려고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인생의 삶은 광야의 삶입니다. 광야는 욕심과 교만과 불만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과감하게 버릴줄 알아야 평안하게 가볍게 길을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어려움이 올 때에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버리는 결단입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가볍게 뛰기가 쉽습니다. 새 가구를 들여오려면 헌 가구는 내쳐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생활에서 애굽의 풍요로움을 버렸습니다. 왕권의 권력도, 어쩌면 성경에는 기록되지를 않았지만 사랑하여 결혼을 꿈꾸던 여인까지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물에서 건져내어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며 키워주던 양어머니에 대한 애정도 버렸을 것입니다.
어려운 결단이지만 그러하지 않으면 그 다음 더 큰일을 감당할 수 가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얻으려면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경험과 또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도 예수님 이외에는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2. 광야의 외로운 길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모세가 나갔던 [미디안 광야]에는 [호렙산]이 있었습니다. 호렙산은 하나님의 산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던 산이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의 불이 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출3:4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산은 애굽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산은 광야 한가운데에 있었고, 바로 그 산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무개 집사야 오라!\"고 부르십니다.
고난의 한 가운데 앉았을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내 곁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하나 없이 홀로 남아 외로울 때, 외롭다고, 서럽다고 울지 마십시오. 바로 그 때가 우리가 하나님의 산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산에 올랐고, 그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인생의 3막으로 넘어갔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우리의 인생은 2막이 끝이 아닙니다.
광야의 2막이 지난 후에는 찬란하고 소중한 인생의 제3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인생의 2막에서 하나님의 산에 올라야 한다는 것과 그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3막은 없습니다.

3. 광야의 고난 길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세례요한]의 참 모습은 성전 안에서의 제사장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지도 아니하시는 희생의 피를 흘리는 이름만 있는 제사장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들의 모습은 많이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권모 술수를 서슴지 않았고, 물질 앞에서는 부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세례요한이 광야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세례요한은 이런 보잘 것 없는 제사장들의 이름 속에 묻혀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이름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세례요한에게 자신의 참 모습을 찾게 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혈육과 의논했거나 예루살렘의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갔더라면 더 쉽게 사역의 길이 열렸을지도 모르지만, 먼저 사도 된 자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자신의 참 모습을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셨던 사도 바울의 참 모습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기 때문입니다.(갈1:16절)
그러나 아라비아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광야에서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여 가나안을 밟게 해야하는 하나님의 종이요, 민족의 지도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 조차도 사명의 첫 발을 내딛으시기 전, 광야로 나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광야로 나가셔서 사십일을 금식하시며 자신의 사명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광야는 꼭 필요한 곳입니다. 내 인생의 광야는 있어야만 합니다. 내게 지금 고난이 있습니까? 광야의 한 가운데에 내 몰린 듯한 기분이십니까? 꼭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광야입니다. 그 고난에 취해있지 마시고, 힘을 내어 하나님의 산에 오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자신의 참모습과 사명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광야는 고난이지만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이 평탄하기만 하다고 축복으로 생각하시지를 마십시오. 평탄한 삶에도 광야는 필요한 것입니다. 일부러라도 광야로 나가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상황에 의해 광야로 떠밀려 나갔지만, 세례요한과 사도 바울은 자신의 뜻으로 광야로 나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내게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하는 일이 다 잘되기만 해도, 바로 그 때가 기도할 때이고, 금식해야 할 때이고, 밤을 새워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할 때이고, 이웃과 예수님의 피를 나눔 한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희생의 광야로 나가 섬김과 봉사의 산에 올라야 하는 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 광야는 고난이지만 축복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