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이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가? 벧전1:3-6 Good News Magazine이라는 기독교잡지가 있습니다. 굳이 우리나라말로 번역을 한다면 ‘복음잡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더피로빈슨>이라는 사람이 기독교인의 믿음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분류를 해서, 글을 실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유치한 믿음과 순수한 믿음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이런 사람들은 유치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고, 저런저런 사람들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성도의 5가지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첫 번째 형태는... ① 성도에게는 고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은 곧 저주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겐 절대 고난이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아버리는 사람!!! 욥의 친구들이 고난에 빠져있는 욥을 위로한답시고 와 가지고, 욥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기를 “죄에 대한 저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욥을 정죄합니다. 가만히 보면 욥의 친구들은 굉장히 유치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② 성도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유치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항상 즐겁게만 사는 것이 성도의 목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③ 기도는 다 응답이 있다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뜻대로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다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④ 성도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부분을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경의 뜻과는 관계없이 계시 받은 것을 더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⑤ 성도는 항상 강하다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쩔 때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강한 것처럼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유치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수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은 조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의 반대입니다. ① 순수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고난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저주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축복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을 기뻐하고, 오히려 즐거워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② 성도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행복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도로써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③ 기도응답에는 부정적인 기도응답도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뜻대로 기도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 응답되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과는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 그것이 바로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④ 성도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알 수도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또 알 수도 없는 분입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⑤ 성도는 약하다고 합니다. 성도 스스로가 약함을 인정하는 것!!!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을 때에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쭙겠습니다. 우리는 유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입니까? 아니면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입니까? 조금 말을 줄여서, 유치한 성도입니까? 순수한 성도입니까? 혹시나, 우리 가운데 고난을 부정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 성도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여기시는 분이 계십니까? / 기도하면 다 응답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성도는 항상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유치한 성도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 고난이 축복이라고 / 성도의 목적은 거룩이라고 / 내 뜻과는 상관없이 반대로 이루어지는 기도응답도 축복이라고 / 내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 나 스스로는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분은 순수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더피로빈슨>이 말한 ‘유치한 성도’와 ‘순수한 성도’의 기준을 가만히 보면, 고난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난을 저주라고 여기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만 되어지기만을 원하는 성도는 유치한 성도이고, 고난을 축복이라고 여기고, 비록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사람은 순수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산 소망을 통해서 고난을 기뻐하는 순수한 성도가 되라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따지고 보면 고난이 고난이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사실 우리도 압니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것을... 그런데요, 막상 고난이 앞에 놓여있으면, 정말 힘듭니다. 머리로 알기는 아는데, 사람이라는 것이 감정의 동물이어가지고, 지금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좌절을 합니다. 피할 길이 없다고 합니다. 어쩔 때는 너무 힘들어가지고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요, 우리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답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답이 뭡니까?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즉,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새로운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을 축복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유치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에 대해서 좌절하고, 그저 좋은 것만 받기바라는 유치한 성도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 성숙한 믿음을 가지는 순수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슴 속에 산 소망을 품고, 고난을 능히 이겨내시는 순수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산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3-4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전체에서 결론을 맺는 말씀을, 사도 베드로는 인사말 다음으로 가장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대부분이 우리가 편지를 쓴다든지, 글을 쓸 때에 핵심적인 내용은 / 글의 중간쯤이나, 맨 나중에 넣는 것이 일반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산 소망과 하늘의 기업이라는 핵심적인 말을 하면서, 베드로전서 전체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을 시작에서부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에 있어서, 산 소망과 하늘의 기업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즉, 소망을 바라보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지금이 끝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고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이것이 마지막 같습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이 지나가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지금의 고난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인생의 여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끝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결과가 아니라, 중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산 소망을 가지라고... 그러니까 지금의 고난에 묶여서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산 소망을 품고, 고난을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예수를 믿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두려워합니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삽니다. 그리고 고난이 찾아오면, 그대로 무너집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산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떠한 고난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이겨낼 뿐만 아니라, 연단이 됩니다. 세상 속에서 더욱 더 강한 성도의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소망의 차이입니다. 소망이 있는 성도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업을 하다가 망한 두 가정이 있다고 예를 들겠습니다. 한 가정은 사업이 망한 것에 대해서 비관합니다. 절망합니다. 좌절합니다. 하루하루 매일같이 술만 먹으면서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항상 망한 것만 생각합니다. 이 가정은 얼마가지 않아서 풍비박산이 납니다. 반대로 똑같이 사업을 하다가 망한 다른 가정이 있습니다. 사업이 망했기 때문에 생활비도 없습니다. 늘 빚쟁이들한테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요, 절대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든 막노동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부업도 하면서 열심히 돈을 갚아갑니다. 나중에 보면요, 사업에 실패한 것 때문에 연단이 되어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소망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망한 것만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에는 풍비박산이 나는 꼴이 되지만, 소망을 바라보면 다시 일어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가 7:8)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나의 대적이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악한 원수 마귀가 춤을 추면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나의 빛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고난 속에서도 반드시 일어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고난에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라, 산 소망을 바라보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산 소망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우리를 일으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만, 이 땅에 참 많은 자살이 일어납니다. 어쩔 때는 ‘이 땅에 자살의 저주에 내려진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많은 자살이 일어납니다. 돈 잘 벌고, 유명한 연예인들도 자살을 합니다. 우리가 생각을 할 때에 “나 같은 사람도 살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무슨 고민이 있어서 자살을 할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도 자살을 선택합니다. 약 6년 전쯤인가요? 한참 의약분업을 하는 문제로, 정부와 의사와 약사간의 분쟁이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 동의대부속 동의의료원에서 근무를 하던 당시 34살 먹은 젊은 의사가 자살을 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부인에게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당신한테 잘 해 주지도 못하고, 애들하고도 자주 놀아주지도 못해서 미안해. 의사가 되었지만, 장래가 불확실하고, 사는 것이 허무해서 먼저 갈게. 미안해 여보!” 이 의사가 바라본 것은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의약분업으로 인해서 나중에 자신의 소득이 줄어들 것이라는 불안함 때문에 그냥 자살을 한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의사가 돈을 잘 벌잖습니까? 한 달에 500만 원 벌 수 있는데, 400만 원으로 줄었다고 자살을 한 것입니다. 천만 원 벌 수 있는데, 700만 원으로 줄었다고 자살을 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도 이렇게 열심이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잘 나가는 의사가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현재의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망!!!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바라본다면, 절대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죽게 됩니다. 악한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마귀가 노리는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다가, 결국에는 고난만 바라보다가 넘어지게 되는 것을 악한마귀는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마귀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에게 다가가서 말합니다. “소망이 없다고...”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 무슨 소망이 있겠냐?”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본문 3-4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힘든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다고요? 산 소망과 하늘 기업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만 바라보면서 죽는 사람이 아니라, 산 소망을 바라보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고난은 절대 결과가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잊지 마시고, 현재의 고난을 산 소망으로 이겨내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5절)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신다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에 몸을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왜 고난이 힘든 줄 아십니까? 내가 고난을 이겨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에 대해서 안간힘을 쓰고, 항상 불안해하고, 조급해합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철저히 신뢰해 보시기 바랍니다. 19세기의 명 설교가였던 스펄전목사에게 한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사는 가증스러운 위선자 같습니다.” 그러자 스펄전목사는 “소망이 없다면,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합니다. 부인이 대답을 합니다. “안됩니다. 지금도 소망이 없는 것 같아서 불안한데, 교회를 떠나서는 저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스펄전목사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주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남아있는 그 소망을 나에게 파십시오. 그리고 이제 교회에 나오지 마십시오.” 그러자 부인이 화를 내면서 스펄전 목사에게 말합니다. “안됩니다. 비록 내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보잘 것이 없지만, 수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절대 소망을 팔수는 없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스펄전 목사가 말합니다. “맞습니다. 지금 부인은 수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팔 수 없는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만히 보면요, 하나님은 늘 우리 주위를 맴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얼핏 볼 때에는 나는 항상 혼자인 것 같고, 항상 혼자 고난을 당하는 것 같고, 항상 혼자 힘든 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늘 하나님이 내 옆에서 같이 고난을 당해주셨고, 같이 힘든 생활을 해 주셨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 그렇지... 그래서 늘 불안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저라고 해서 그저 쉽게쉽게 걸어온 인생은 아닙니다. 사실 인생이라고 말씀드리는 것 자체가 건방지다고 할 정도로 “어린 인생”입니다만, 저의 삶 속에서도 분명 고난이 있었고,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저도 돈이라는 것을 한번 날린 적도 있었습니다. 부동산 경매를 한답시고, 서울 양재동에 있는 빌라를 하나 낙찰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곳에 살고 있는 세입자의 전세자금까지 다 제가 떠안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빌라를 포기하고, 계약금으로 넣었던 돈을 날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제가 느꼈던 절망감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저 혼자인 것만 같았습니다. 어찌나 분하고 원통하던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원망의 기도만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무슨 잘 못이 있 길래 저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주십니까?” 어쩔 때는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하나님을 협박합니다. “하나님!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오십시오. 하나님!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습니다.” 그런데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제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 원망의 기도를 다 들으시고, 제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묵묵히 또 다른 형태로 / 또 다른 일들로 회복시켜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의 아픔과 상처는요, 아주 이미 오래전에 / 제 가슴 속에 남아있지도 않습니다. 그냥 머리 속에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지, 전혀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 있는 저를 그렇게 세워주셔서, 이겨내게 하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켜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정도의 간증거리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무궁무진하게 많이 나타났고, 또 지금도 나타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고난 속에 계십니까? 지금 혹시나 너무 힘들어서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묵묵히 내 옆에서 같이 고난을 당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 있는 우리를 안아주시고, 보호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어떠한 고난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요, 요셉이 총리가 될 때까지 붙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수 있도록 붙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사자 밥이 되는 것에서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믿으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3. 고난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6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고난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지금 본문의 성경말씀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여러분은 고난이 오면, 기쁘십니까? 저 같은 경우에는 고난이 오면, 원망부터 합니다. “하나님! 왜 자꾸 나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제가 재미없을 거라고 했을 텐데요?”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따지는 기도부터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대부분이 고난이 오면, 원망을 합니다. 그러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생겼냐?”고 합니다. 조금 적극적인 사람들은 원망을 하다가, 고난에 대해서 대응합니다.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 반응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더 간절히 매달리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하나님이 날 보호하신다고 하면서, 어떻게 나에게 이런 고난을 줄 수가 있냐?”고 하면서, 극단적으로는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서, 고난이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원망과 대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본문은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고난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가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이글을 쓸 때에는), 이미 기독교인들이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잡히면 죽습니다. 그런데요, 사도 베드로는 본문 말씀의 시작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데,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고난을 기뻐할 수 있는 답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나와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원망이었습니다. 찬송이 아니라 원망이었다는 것입니다. 늘 목마르다고 원망하고,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을 했습니다. 심지어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다가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 때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이와는 반대로,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주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이때 바울과 실라는 원망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떠한 대응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찬송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대응한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자리에서 찬송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옥문이 열리고,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그 고난의 자리에서, 예수 믿게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난의 자리에 있을 때, 어떤 사람들입니까?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아니라, 찬송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을 통해서 고난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고난은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고난이 힘듭니까? 찬송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 찬송이 없으니, 기쁨도 없습니다. 그저 원망과 대응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고난을 이겨내려고 하니까,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아니라, 찬송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혹시나, 우리 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고난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 어떠한 고난도, 찬송을 부르다가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으로 고난을 기뻐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혹시 수상스키라는 것을 아십니다. 저도 TV를 통해서만 봤을 뿐, 한번도 타 본 적이 없는데, 혹시 여러분 중에 수상스키를 타 보신 분이 계십니까? 앞에는 모터보트가 달리고, 뒤에서는 사람이 밧줄을 붙잡고 있으면, 물 위를 신나게 달리게 되는 하나의 레포츠 종목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고난이라는 것이, 수상스키를 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고난이라는 물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요 모터보트가 되시는 하나님의 밧줄만 붙들면, 물 위를 가르면서 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물 위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모터보트의 힘으로 물 위를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밧줄만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즐기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면서, 환호성을 치면서, 찬송도 부르면서 / 그렇게 고난 속을 달리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을 이겨내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고난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무엇이 고난을 이겨내게 합니까? 산 소망이 고난을 이겨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고난을 이겨내게 합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고난을 기뻐하는 것이 고난을 이겨내게 합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고난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 때문에 다시 일어서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