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벧전2:18-25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벧전2:18-25



오늘은 부활절을 한 주간 앞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한번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城에 入城하셨습니다. 그 때는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옷을 벗어서 던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옷을 벗어서 길에 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서 그것을 흔들며 “Hosanna!”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意味입니다. 그것은 억압받는 百姓들이 그들의 王과 구원자에 대한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歡迎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의 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에 의하여 오래 동안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오래전부터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시118:26>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언제 오실른지 또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그가 오시면 압박하는 원수의 무리를 물리 친 후에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여 이스라엘의 王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께서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뜨겁게 歡迎을 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삭개오 처럼 한번쯤 예수님 보기를 원했고, 이런 사람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다녔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문이 들렸으니 그들이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와서 열광적으로 호산나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무리들의 환영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고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행진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진은 十字架를 지시기 위한 행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은 정치적인 메시아을 원했고, 기적을 보기를 원하였지만 예수님의 길은 철저하게 자기를 죽이는 苦難의 길이요, 十字架의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苦難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苦難과 그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왜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왜 고난을 당하셨을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오늘 나에게 주는 意味가 무엇인가?”

1. 예수님의 苦難과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말구유요, 둘째는 십자가요, 셋째는 빈무덤입니다.
말구유는 그리스도의 한없는 낮아지심을 상징하고, 십자가는 대속의 죽음을, 빈무덤은 승리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정신을 나타내 주는 가장 중요한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형법은 원래 {페르시아}라는 나라의 사형법이었습니다. 땅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罪人이나 惡人의 시체로 땅을 더럽힐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십자가에 높이 달아서 죽였습니다. 정치범이나 살인범과 같은 가장 흉악한 범죄자에게만 사용을 하였습니다. 哲人 [시세로]는 “十字架는 가장 잔혹하고 등골이 떨리는 死刑法”이라고 말했습니다. 歷史家 [태시터스]는 “十字架는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十字架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저주요, 수치요,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사형법 가운데 하나는 사형수가 자기가 질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형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시고, 옷 벗기움을 당하고, 주홍색 옷을 입힌 후 가시면류관을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른 손에는 막대기를 들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짜 王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막대기를 빼앗아 그 머리를 쳤습니다. 가시가 박혀 피가 흐르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군인들은 80kg이 넘는 나무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게 하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까지의 길을 ‘Via Dorolosa’라고 말하는데 그 길은 거리가 1.5km가 되고 높이가 600M나 되는 거친 언덕길이었습니다. 가다가 쓰러지면 로마의 군인들이 끝에 납이 달린 채찍으로 예수님의 온 몸을 내려쳤습니다. 채찍에 맞아 살이 묻어나고 온 몸에 피가 흘렀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예수님을 눕히고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 못은 무지막지한 무쇠로 만든 못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나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最高의 羞恥를 意味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잔인한 것은 쉽게 죽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따 쏟고 며칠 씩 비명을 지르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2.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 :
이 땅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었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意味가 무엇입니까?

(1)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해 줍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당하지만 예수님이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큼 가난하십니까? 예수님만큼 모욕을 당했습니까? 예수님만큼 배신을 당했습니까? 예수님만큼 시험을 받아보았습니까? 예수님만큼 고통을 겪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고난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상처의 경험이 있는 치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고난 가운에 있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도와주시고 위로하실 수가 있는 분이십니다.

(2) 대속적인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600여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 사실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羊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대신 담당하였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구약시대의 제사법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죄 값으로 죽어야만 했는데, 사람이 죽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속죄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법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소나 짐승이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짐승을 가지고 성소에 와서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자기의 죄를 고하며 자기가 지는 죄를 전가를 합니다. 그리고 그 짐승을 제물로 삼아서 제사를 드리면 그 짐승의 피와 죽음으로 인하여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贖罪의 어린 羊이 되셨습니다<히 9:11-14>.

우리가 지은 罪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刑罰을 그리스도께서 대신擔當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平和를 누리고,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交際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存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不順從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은 모두 罪人이며, 罪의 값은 死亡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宗敎의 核心은 이러한 罪人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갈 수가 있는가?의 問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가가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자력종교입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을 해서, 인간이 道를 닦아서 하나님께 가는 方法이다. 佛敎와 같은 경우입니다.
둘째, 율법종교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律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가려고 하는 방법입니다. 유대敎와 같은 경우입니다.
셋째, 계시종교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을 내가 믿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基督敎의 경우입니다.
人間의 노력이나 律法을 지킴으로 救援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악가운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이것이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때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증언한 내용입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計劃입니다. 인간을 행한 하나님의 사랑의 極致입니다.
Karl .Barth는 십자가의 의미를 두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몸을 내주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둘째는 인간의 죄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서만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무서운 저주의 길이요 수치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구원은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지불하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저주와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과 고난은 참 人間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생명의 길인지, 진정한 영광과 부활의 길이 무엇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죽는 것입니다. 자기 희생입니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의 일생은 {남을 위한 一生}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犧牲하는 一生이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사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죽으심으로 사셨으며, 十字架의 죽음을 통하여 復活의 勝利를 하셨습니다.
No cross, no crown!

** 독일의 화가 Sternberg의 이야기 :
독일의 유명한 화가 Sternberg가 교회의 요청에 의해 아무 뜻 없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성상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그는 그의 본업으로 돌아가 돈을 벌기 위해 처녀 나체 모델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모델 아가씨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성상을 보면서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인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모델 아가씨가 “그렇다면 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저씨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서슴없이 “암 그렇지”라고 대답했으나 그 대답은 자기를 너무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즉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기가 대답한 말의 참뜻을 알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진정한 죽음과 고통의 뜻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감격하여 다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유명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엑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요한복음 19:5>을 바탕으로 그린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리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히고 로마병정들에게 내어 주면서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그림을 본 영국의 유명한 여류 찬송작가 [프랜시스 리딜리허버갈] 양은 “내 너를 위하여”라는 찬송시를 썼고, 그의 성화에서 감동을 받은 {진젤돌프 백작}은 평생을 주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다짐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나의 죄가 진정으로 사하여졌음을 깨달을 때 우리 생애에 변화가 일어나고 진정한 헌신이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3. 고난주간을 意味있게 보내는 方法
성도 여러분! 내일부터 예수님의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1) 주님이 겪으신 고난을 기억하며 그 意味를 黙想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十字架가 오늘날 나와 무슨 相關이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깊이깊이 黙想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속에 느껴질 것입니다.
나의 救援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감사와 감격이 넘칠 것입니다.

(2) 고난자체를 사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금욕종교나 고행을 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피하려로 하지 맙시다. 고난이 소중한 것은 참 기쁨, 참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며, 그 속에서 부활의 기쁨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復活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胎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恩惠가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祝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