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난/벧전2:21-24
오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사53:5,6-“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수많은 인파가 나와서 환영하는데,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길에 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들고 흔들면서 「호산나」를 연호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가난과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육신적인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상경은 고난 받기 위해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왕으로 등극하여 영광을 누리려고 가시는 길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을 주시는 영적인 왕이 되려고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길이었고, 고난 받기 위하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고난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간을 가장 무개 있고, 의미 있게 보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함께 참예하는 마음으로 지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1. 고난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지상생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선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기도하심으로 새벽기도의 본을 보여주셨고, 밤이 맞도록 기도하심으로 철야기도의 본을 보여주셨고, 때로는 금식하시면서 금식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서로 겸손하게 상대방을 섬기는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고, 사랑과 인내와 충성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13: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데로 예수님은 고난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오늘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이해하고, 어떻게 고난을 이겨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인간의 삶은 많은 부분을 고난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고난이 더 많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권면하시기를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을 알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사회로부터 핍박을 받고,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기도 하고, 이웃으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대처해 나갈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어떤 지혜가 필요하고,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하는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고난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죄로 인한 고난입니다.
자기의 잘못과 실수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고난이라기보다는 형벌이요, 보응이요, 심판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2)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부당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는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쓰는 이 시대는 노예 제도가 공인되던 때였습니다. 로마는 수많은 노예를 이용해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이나, 웅장한 신전, 궁궐 같은 것들은 모두 노예가 만든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시민 중에는 1/3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들에 의하여 로마는 엄청난 문화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노예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겠습니까?
이런 노예들에게 기독교가 들어간 것입니다. 노예들이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노예들이 당하는 고난을 가리켜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선택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자원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내가 참음으로, 내가 그 길을 걸어감으로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이 삽니다. 의를 위하여 내가 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런 선택은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택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바로 이런 고난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이기고 승리하게 하기 위해 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고난을 배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주님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 주님의 모습을 배우고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고난당하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난 속에서도 죄를 범치 않으신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자연히 반항심과 저항심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상대가 한 대를 때리면 나는 두 대를 때리고 싶어지고, 상대에게 한 개를 빼앗기면 나는 두 개를 빼앗아 오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범죄하는 것입니다.
가령 지진이 나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면 사람들이 남의 상점에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쳐 갑니다. 이것은 일종의 반항심이라는 것이고, 이것은 분명히 범죄행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막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난을 당하실 때에도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당부하시기를 핍박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게 되면 저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나서서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진리입니다.
시37:5,6-“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러분이 혹시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계시다면 다른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고난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주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의연하고 당당하고 강하게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난은 승리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3. 십자가를 제시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저주와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면서 고안해 낸 것이 십자가 형틀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정권에 반항하는 사람들을 처형할 때 가장 극한 고통을 주어 처형을 해서 감히 로마의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려고 도입한 것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십자가는 <저주, 심판, 고통, 죽음, 형벌> 같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십자가의 의미는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의 부정적인 개념들이, <구원, 생명, 사랑, 봉사>라는 긍정적인 개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대할 때 이렇게 대해야 합니다.
1)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믿어야 합니다.
3) 죄를 용서받음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4) 자랑해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를 소개하고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두 갈래로 갈라놓습니다.
고전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즉 십자가를 믿는 자와 부인하는 자로 나누어지고, 이것은 다시 구원 얻을 자와 멸망 받을 자로 나누어지고, 다시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미련함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대할 때 믿음으로 대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대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지나간 역사 속에는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믿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 십자가를 오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미신화하고, 우상화한 사람들입니다. <오멘>이라는 서양 영화를 보면 <흡혈귀>를 몰아내고 이기는 것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흡혈귀에게 잡혀 죽게 된 주인공이 넘어지면서 촛대 두개를 포개어 십자가를 만들 때 흡혈귀가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립니다. 물론 마귀는 십자가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는, 이것은 십자가를 미신화 하는 것입니다.
2) 십자가를 약화시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라고 하면서 십자가 없는 예수를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보다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더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아기 예수님으로 표현합니다. 십자가를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3) 십자가를 남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에 가서 유대인 교회를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데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하는 것이 신기해서 찾아 간 것입니다. 물론 주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목사님을 만나서 여러 가지를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당 안팍에는 아무데도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종탑에도 없고, 강단에도 없고, 벽에도 없습니다. 교회 구석구석 어느 곳에도 십자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해서 목사님에게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적인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남용한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유럽의 십자군들이 성지를 탈환한다는 미명하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이 땅을 초토화시키고,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2차대전 때 기독교 국가인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서 유대인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눈에 보이는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다만 마음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사실, 그 자체만 믿습니다. 십자가를 내어 걸면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찡했습니다.
지난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오용하거나 약화시키거나 남용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오염시킨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선용하는 지혜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갈6:14-“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선용하고, 사랑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아직도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알려주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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