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난을 당하셨나?

왜 고난 당하셨나?/벧전2:21-25

왜 고난 당하셨나?/벧전2:21-25



오늘은 종려 주일이자 고난 주일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는 고백을 한 후,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처음으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실 것’에 대해 예고하셨습니다

. 이 예고대로 이제 공생애의 마지막 기간을 보내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주님은 나귀를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깔고, 다른 사람들도 옷을 펴서 길에 깔고,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그것을 길에 깔아 주님을 환영합니다. “호산나 - 구원하소서 -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소리칩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을 로마로부터, 가난으로부터 해방하는 메시야, 왕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길은 고난받기 위해 들어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고난의 길은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 주일, 고난 주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 기간을 의미 있게 알아야 하고 또한 의미 있게 보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그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화>

오래 전 어떤 고명한 목사님이 종려주일 낮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예배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특별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그러니 십자가를 미리 깊이 묵상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저녁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목사님은 촛불을 켜들고는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림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목사님은 먼저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이마에 촛불을 비추었습니다. 한참 뒤 그는 말없이 못 박힌 예수님의 손과 발을 촛불로 비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에 찔려 피흘리시는 예수님의 옆구리로 촛불을 옮겼습니다. 이것이 설교의 전부였습니다. 목사님은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참석한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번 주간은 수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큰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1.고난의 본이 되시고자 함입니다

21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화>

로키산맥 해발 3천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면에서 좋은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을 통해 기도의 삶을 보여주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섬김을 통하여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5절) 믿음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말씀하신 것을 친히 행하시며 행함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원수들을 용서하십니다.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면서 어떻게 성도가 훈련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열정, 주님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의 모습을 봅니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님의 고난과 그 고난을 받으시는 주님의 마음과 모습, 그 고난을 이기시는 주님 그 자체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절)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길 것인지에 대한 좋은 본이 됩니다. 주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물론 모든 것이 다 고난은 아니지만, 고난은 우리 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많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저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시고 여러 가지 고난이 있을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국가가 핍박하고, 가족들이 핍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마 10:22절)]

이 뿐이 아닙니다. 시험도 있습니다. 유혹도 있습니다. 죄로 인해, 애매하게, 이런 저런 모양으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세 가지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⑴첫 번째는 죄로 인한 고난입니다.

자기의 잘못, 자기 실수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고난이 아니라, 형벌이요 보응(報應)이요 심판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때문에 억울하다,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난의 대부분은 잘못으로 인한 것입니다.



⑵두 번째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입니다.

‘애매히’라는 말은 ‘아디코스’라는 말로 불공정하게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릅니다. 그저 당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아무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세상에는 원인과 이유가 분명한 일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내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하필이면 내가 왜 그런 몹쓸 병에 걸려야 합니까?

이렇게 원망하지 않나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19절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라고 했습니다. 왜 그 일이 아름답습니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만한 이유가 없었지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애매하게 정당한 이유 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이런 애매하게 당하는 일들이 있어도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 아픔과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인 삶의 \"패러다임\"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베드로전서를 쓰는 이 시대는 노예가 이룩한 문화가 발전한 시대입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이나 그 외의 신전이나, 궁궐 등 많은 시설물들은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세울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로마 사람 중 ⅓이 로마인이고, ⅓은 자유민이며, ⅓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까? 이 노예들에 의해 로마의 문화는 엄청난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 이 과정에서 노예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겠습니까? 이들의 고통 당하는 이 때에 기독교가 노예들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저들에게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형제애를 전합니다. 복음을 받은 노예들이 변화됩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인간의 평등을 알고,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과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이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에 저들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당해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면 아름답다고 가르칩니다.

사실 노예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사람들의 도구와 같습니다. 화풀이를 당하기도 하고, 인간적인 이하의 것을 시켜서 그것을 해야하기도 하고, 엄청난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참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노예와 같지는 않지만, 보증을 섰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 동안 모았던 전 재산을 날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아니면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나는 제대로 운전했는데, 상대방이 잘못함으로 원치 않게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⑶세 번째는 선택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자원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내가 참음으로, 내가 그 길을 걸으므로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이 삽니다. 의를 위하여 내가 그 길을 선택합니다.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택입니다. 이것은 그 원인이 분명합니다. 자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이 고난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이기고 승리하게 하기 위해 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고난을 어떠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나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2.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자처하신 까닭은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1절) 우리는 고난 당하시는 주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자취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 모습을 배우면서 우리도 고난 가운데서 그렇게 이겨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⑴먼저, 고난을 당해도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고난 당하면 그에 대한 반항으로 아무렇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지진이 나고, 전쟁이 나면 도시가 혼란해 집니다. 슈퍼마켓이나, 잡화물 점에 사람들이 들어가 아무렇지 않게 집어가고 빼앗아 갑니다. 막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⑵입에 궤사도 없으셨습니다.

곧 구차하게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변명을 하신다거나, 쓸데없는 말,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욕을 당하면 나도 욕을 하게 됩니다. 대들게 됩니다. 분하고 억울해서 나도 때리게 됩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두 대 맞으면 네 대를 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내가 누군데, 어디 두고 보자.’ 협박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맡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핍박하고 무시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내가 이러니 저러니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이러한 주님에 대해서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가 놀랍니다.



‘이 사람을 보라! 뭐, 이런 사람이 있는가! 어찌 이리도 죽음 앞에서 태연할 수가 있는가! 내가 너를 살릴 수 있으니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탁하지 않으십니다. 변명도, 구차한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 주님께 빌라도는 정신적으로 굴복하고 맙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김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고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고난 당하십니까?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십니까? 주님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십시오! 주님을 배우면서 이겨나가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의미가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려고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⑴‘내가 왜 고난을 당해야 되는가?’ ‘이 고난이 왜 내게 온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 정죄의식 가운데 빠지고, 불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단지 그 고난의 의미와 내가 이것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할지 그 자세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고난의 의미와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의 의미와 자세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이겨나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난의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에 대해 수없이 듣고, 이 책 저 책을 통해서 이런 저런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그런데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명백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사실 책에서 고난의 원인,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고난의 의미요, 고난의 결과로 주어지는 이후의 모습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성숙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라고 하십니다. 엄밀하게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한 고난은 엄밀히 말해 고난이 아니라, 보응이요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회개할 때는 오히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탕자가 자기 재산을 다 까먹고 나중에는 쥐엄열매를 먹어야 하는 고통을 당한 것은, 자기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얻고 복을 얻습니다. 이렇듯, 잘못으로 인해 심판을 받는 경우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하는 고난은 사실 고난이라기보다는 죄의 결과입니다

. 애매하게, 아니면 선택적으로 당하는 고난인 경우에는 그 원인이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자기 죄로 인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인가? 높은 차원의 사상으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하고, 또 그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답을 얻어내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의미와 그에 대한 자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은 인류가 시작되는 시점에서부터 있었습니다. 아담 시대부터, 그리고 믿음의 조상들이 등장하는 수 천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류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생애 속에는 크고 작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애 속에 크고 작은 고난의 흔적들을 발견합니다. 거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그 고난의 의미와 고난 당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⑵구약성경에서 가장 억울하게 고난 당한 사람은 요셉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그가 형제들에게 팔려 애굽의 노예가 됩니다. 집에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채색 옷을 입을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호강을 누린 그가 노예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요 상처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있어서도 고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식 중에 하나가 이러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⑶오래 전에, 한 가정에서 어릴 때에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양아치들에게 끌려가 걸식하는 것을 배워 가지고 껌팔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잃어버렸을 때의 심정, 그리고 그 아들을 찾았을 때의 그 심정, 그 아픔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요셉의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은 보여줍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그랬습니다만, 요셉에게 있어서는 고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단지 성경은 그가 그 고난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그의 자세와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고난의 그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고난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고민하고 애쓰기보다는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고난을 어떠한 자세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불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⑴우리는 언제든지 고난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⑵그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⑶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일로 인하여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할 때 위로 받게 되고 결국 여러분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