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이기는 비결/벧전3:13~17
진주의 왕으로 유명한 미키모토가 평범한 사업가였을 때의 일입니다. 미키모토는 종종 마을 앞의 바닷가를 거닐곤 했는데 어느날 우연히 그 바닷가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진주조개와 그냥 조개와의 차이는 뭐죠? 또 진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아들은 매우 궁금하다는 듯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조개 속에 모래알이나 유리조각, 혹은 작은 돌들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단다. 이런 이물질들은 조개의 살에 상처를 내어 조개를 몹시 아프게 하지. 그런데 조개는 그 아픔을 참고 견디면서 자기 몸속에서 이물질을 감싸는 진주질을 분비한단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예쁜 진주가 되는 것이란다. 진주조개와 그냥 조개와의 차이는 조가비속에 진주를 기르느냐, 안기르냐의 차이란다.
어떤 조개는 그 이물질 때문에 그냥 썩어버리기도 한단다. 그리고 진주조개라고 해도 다 똑같은 빛깔의 진주를 품고 있지는 않단다. 어떤 것은 질이 떨어지는 진주를, 또 어떤 것은 정말 아름다운 빛깔의 진주를 품고 있지.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에 부딪혔을 때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 그 마음 속의 보배로운 진주를 기를 수 있는 것이란다.\"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분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이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곁에서 모자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미키모토는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온갖 고통과 아픔을 가운데서도 마침내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를 양식하는데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개가 진주를 만들때는 온갖 고통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 시련과 고통을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찬란한 빛의 진주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을 당할때에는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나면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이 보장되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하기를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사람만큼 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갓 결혼을 시작한 신혼집에 가보면 온통 복으로 가득채워져 있습니다. 베게에,이불에,밥그릇에,숟가락에,장농에,액자에,심지어 신부의 고무신에까지 복으로 가득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해서 복이 온다면 이 세상에 복 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복은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하기를 \"의(義)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복이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축복을 받게 하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말하기를 눈물을 흘려보지 않고 인생을 논할수 없다고 했듯이 고난을 당해보지 않고 고난을 말한다는 것은 모순일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이런 고통을 당해보지 않으셨는지요? 특별히 의롭게 살고자 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가령 예를 든다면 좋은 직장이 보장되었는데도 하나님앞에서 주일을 지키기 위해 그 직장을 포기했다든가 아니면 정직하게 사업을 하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든가 하는 일을 경험해 보시지는 않았는지요?
이럴 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을 직접경험해야 하는 당사자에게는 갈등이 있고, 시험이 있고, 결단에 따르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예(例)에 불과하지만 그 보다 더 큰 고통이 우리인생에 찾아온다면 그때는 정말 당사자들도 이겨나간다는 것이 매우 힘들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이 경건하게 살고자 하나 그들에게 찾아올 고난이 분명 있음을 말하면서 몇가지 사실로 그들이 이 고난을 너끈히 이겨나가도록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자리에 참석한 우리들도 베드로 사도의 교훈을 통해서 이러한 고난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고난을 이기는 비결로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합니다.(15절)
오늘 본문 가운데 13-15절의 말씀은 구약성경의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8장을 보면 이 말에 대한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수리아 왕이 유다 왕 아하스에게 연락을 해서 우리가 연합해서 같이 앗수르를 대적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유다왕 아하스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도리어 앗수르와 연합하여 수리아를 대적하고자 압니다. 이 때 아하스 왕 앞에 이사야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향해 경고의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의 두려워 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즉 앗수르나 수리아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두려워 하며 놀라야 할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베드로 사도가 본문에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이말을 인용한 것일까요? 대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면 어떤 마음이 찾아옵니까? 두려운 마음입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내가 경험해야할 일들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고난을 피해가기 위해 적당하게 타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올 때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거룩해야 하며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그리고 위기에 직면할 때, 사람과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죄를 짓게 되고 또 우리의 삶에 거룩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것과 \'두려움\'은 어떤 관련이 있길래 두려움이 있을 때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마음에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안을 주시는 분이 누군가 하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신다면 나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죽음앞에서도 누렸던 그 평안을 우리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를 두고 \'주\'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오직 로마의 황제 시이저를 자신의 주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죽음이라는 고난과 직면해서도 자신의 주인된 황제를 위해서 장렬하게 죽어갔습니다.
고3, 꿈많은 여고시절에 단백질이 빠져나가는 신증후군이라고 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소녀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고, 또 게재된 사진을 보고 얼마나 충격과 도전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경아입니다. 경아는 중환자실에서 마치 꺼져가는 등불처럼 힘든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한 팔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 소녀는 한동안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출석은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자신의 구주로 모신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병상에서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다시 진심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수술 후 그가 찍은 사진에서 오른팔을 잘리운 채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맑게 웃고 있는 그의 평안한 얼굴이었습니다.
사진설명에는\"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에 팔 자르러 들어갈 때도 담담했어요\"라는 글귀가 붙어있었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평안입니다. 정말로 신비한 평안입니다. 잔인하리만큼 갈기갈기 찢긴 이 어린 소녀의 마음을 그토록 평안하게 붙들고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 분이 주시는 평안으로 인해 그 소녀가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닥친다할찌라도, 아무리 힘든 고난이 찾아온다할찌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오히려 많은 사람을 전도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역사상 어느 때 복음의 영광이 가장 많이 드러났습니까? 순교시대 입니다. 박해받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면서도 고민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저들이 저토록 심한 고통 중에서도 찬양하며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고민에 쌓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것은 고난이나 시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순교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고난을 두려워 했다면 그들은 결코 순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들에게 물밀듯이 찾아오는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는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16절)
여기서 \'양심\'이란 어떤 뜻을 지니고 있습니까? 지난 주에 2박3일간 신학교 입학하기 전에 자주 다녔던 기도원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함께 갔던 목사님께서 저녁을 대접한다고 해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에서 아주 인상이 깊었던 것은 신발장 위에 쓰여진 글이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신발 CC TV 녹화중\"이었습니다.
그 글을 보면서 금방알 수 있었던 사실은 손님들 중에 누군가가 헌신을 신고 와서 새것으로 바꾸어 신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저렇게 하면 아무도 일부러 신발을 바꿔 신고가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얼핏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지켜 보는데 감히 신발을 바꿔 신고갈 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양심이란 말도 이와 같습니다. 즉 양심이란 \'누군가가 보고 있다\'란 뜻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 어떻게 행동하기 쉽습니까? 좌절하거나 실망을 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럴 때 일수록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행동하나 하나를 주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어떨 때는 불괘할 때도 있습니다. 수년전에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았을 때 그 다음날 자동차 회사에서 면허증을 딴 것을 차를 사라고 팜플렛을 보내온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한편으로는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내가 면허증을 딴 것을 알고 연락을 했는지 내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노출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깨림찍하고 불쾌할 때도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대상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안수를 받은 후, 그해 성탄절때 김영삼 대통령으로 부터 카드를 받았습니다. 물론 지극히 의례적인 것이겠지만 대통령이 저에게 카드를 보냈다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누가 나를 지켜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도 우리의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고난의 현장에 있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선한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아니 예수그리스도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라고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분명히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욕하는자들이 있습니다. 또 비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자들을 볼 때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선을 행하고도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선을 악하다고 말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롭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도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다니엘도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강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시간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고난을 당할때 선한 양심을 가지고 능히 그 고난을 받는 삶을 사실 수 있습니까?
17절을 보겠습니다. 여기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능히 그 고난을 받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고난을 달게 받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베드로가 살았던 시대만 고난의 시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도 동일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야 합니다. 고난의 삶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내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분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고난 다 이기고 나면 우리들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한달 수입이 얼마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달 수입이 천만원이 된다해도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한 삶이라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불합격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에 합격자가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명성과 지위를 얻었다 할찌라도 그 마음속에 구원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다면 이 사람 역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복을 소유했다할찌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소유하지 못하면 그 사람 역시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자들에게 복이 주어진다고 했습니까? 고난을 이겨내는 자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선한 양심을 가지서 그 고난을 이겨내는 자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고난을 이겨내셔서 하나님의 복을 소유하는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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