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마21:1-11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마21:1-11





오늘부터 사순절 마지막 주간 고난주간으로 예수님의 희생과 십 자가 위에서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주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때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부르며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르고 또 주님께서 고난 당하셨기 때문에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종려나무를 흔들었는데 야자수라고도 합니다. 이 나무에는 대추야자가 열리는데 아주 달되 꿀같이 답니다. 덩어리로 열립니다.

이 종려나무는 영적인 의미를 주는 나무였습니다. 시92:12에 보면 종려나무는 번영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 나무는 거룩한 나무로 다루어졌습니다.

이런 거창한 환영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즐겁기는 커녕 도리어 슬펐습니다. 예수님이 환호를 받으면서도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리에 서 있는 무리들의 속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1. 예수를 따르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이기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환영한 것입니다. 빵을 해결해 주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왕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슬퍼 하셨던 것입니다.

마22:29 “너희가 성경도,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는도다”

종려주일인 오늘, 우리도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 처럼 외쳐서는 안됩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은 ‘호산나!’를 목쉬도록 외쳤지만 일시적인 ‘호산나!’였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금요일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19:9) 라는 아우성으로 변질 되어 버렸습니다. 군중심리에 빠져 아무 뜻도 모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아우성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자기의 필요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옷을 바꿔 입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손해가 오나, 아픔이 오나 언제나 주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불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호산나!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뜻으로 예수님을 환영할 때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세상에는 종교에 대해서 오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해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도 그 본질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교주들과 예수님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도 같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생활도 지저분했지만 나이 60세에 죽었습니다. 철학자 크라테스도 70세에 죽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도 80세에 음식을 잘못 먹고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플라톤도 80세에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33세에 일찍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죽음이었습니다. 음식을 잘 못 먹고 급체해서 죽은 것도 아니고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연히 어쩌다가 생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벌써 700년 전에 예언되었고 예언대로 오셨다가 예언대로 죽으시고 예언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였다는 상징,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됩니다. 요즘에 사람들은 십자가와 죄라는 말을 피하려고 합니다. 죄 비슷한 말로 돌려서 사용하려 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독약에는 독약이라고 분명 히 써 붙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먹고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본래 십자가 사형방법은 페르시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유래되었는데 페르시아 사람들은 땅은 신성하다고 여겨서 죄인이나 악한사람들의 시체로 땅을 더럽힐 수 없다고 생각하여 죄수들을 사형시킬 때는 땅에서 떨어지도록 매달아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서 극한 고통 가운데 죽게 하고, 독수리와 까마귀들이 날아들어 나머지 시체를 처리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형제도는 노예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은 가장 큰 죄인이며, 그리고 노예와 같이 여긴바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수님인들 십자가가 즐거웠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요세푸스라고 하는 역사가의 기록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에 큰 사건이 있었는데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제국을 반대해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켰는데 이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리우스라는 로마 장군이 군사를 몰고 와서 이 조그만 갈릴리 지방에서 무려 2천명을 붙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동네에 2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죽여 길거리에 쭉 세워 놓았습니다. 그 비참함을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그 무섭고 고통스런 현장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져야만 하기에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주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 왕으로서 입성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의해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따랐습니다. 예수를 따르기는 하되 단지 구경꾼의 자리에서 따랐습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위한 헌신, 희생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히 동참하며 이웃과 사회를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어떤 사람들은 얄퍅한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따랐습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 기적을 보기 위해 . . .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충족되면 곧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릴 뿌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업 관계로,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해 교회를 출석하고 신앙을 가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은 순수해야 합니다. 풀무에서 단련한 정금이나 순은 같이 찌꺼기가 없어야 합니다. 때가 묻은 신앙, 세속적인 신앙은 무가치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주의 뜻을 행하려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극히 적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행하고자 따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여러분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대속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어 존경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대속이란, 빚을 갚지 못해 종이된 자에게 그 빚을 대신 갚아 주고 종된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종이 진 빚을 갚아주고 자신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그 집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희년이 되면 종을 모두 풀어주는 법이 있습니다. 희년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칠년 째는 안식년입니다. 안식년이 일곱번 지난 50년째 되는 해가 희년입니다.

안식의 해를 7회 거듭한 후에 오는 제50년째 되는 해. 또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50년째마다 찾아오는 자유와 해방의 해입니다. 그 해는 팔렸던 토지는 원 소유주에게로 돌아가고, 노예는 모두 해방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매여 죄의 종이 된 인간을 위해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그 죄 값을 대신 치르신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으므로 그 속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속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죄에 매여 사는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2:23)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몇 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한 젊은 여자가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 여자는 스티커를 떼이고 판사 앞에 섰습니다. 판사가 소환장을 읽고 말하기를 “유죄”라고 말했습니다. 판사는 망치를 두드리고 10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판사가 일어나더니 법복을 벗고 내려가 그녀의 벌금을 대신 갚아주었습니다. 그 판사는 그녀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의 딸이 법을 지키지 않았는데 그가 단순히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용서하겠다. 너는 가도 좋아.” 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다면 그는 정의로운 판사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법을 존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딸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꺼이 법복을 벗고 정면으로 내려와서 그녀의 아버지의 자격으로 대신 벌금을 지불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에 우리 대신 죄값을 외아들의 죽음으로 갚아 주신 것입니다.

3. 우리도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시골에는 아직 정월대보름이나 음력설 등에는 꽹과리, 북, 장구, 징, 소고잡이 등으로 꾸며진 농악대가 동네를 누빕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며 좋아합니다. 퍼레이드는 언제나 이렇게 우리를 흥분시킵니다. 함께 소리 지르면 억압된 감정을 발산시키고 싶게 만듭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환호하며 구호를 외칠 때로마군인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의 행차나 다름없는 거대한 환호가 예루살렘 거리를 메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행진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에 의해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에 처하게 되는 빌미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왕국 가운데 가장 강한 왕국이 다윗의 왕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묘사하면서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은 로마왕권을 뒤엎고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새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이 열기는 군중봉기로 이어져 겉잡을 수 없는 혼란과 정치적 붕괴 현상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군 당국은 예수님을 죽이는 음모에 합의를 했고 예수님의 죄목은 내란 음모죄와 같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붙여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 내란 선동자는 이렇게 처형된다는 사실을 목격케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호산나’ 외침은 이렇게 로마 관료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슴을 떨게 만든 것입니다.

이 날의 행진이 흥분되는 진실된 이유는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오시는 행진이기 때문입니다. 눅4:16-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영적으로 갈급 해 하는 자들에게 복음(Good News)을 전파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는 어떤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함보다는 일반적으로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으로 오신 분입니다.

(찬송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그분 밖에는 구원자가 없으며,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함을 받고자 하면 그분을 주(主)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 밖에서도 구원이 결코 불가능합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살아납니다. 세상의 모든 질고와 실패로 절망되어진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때에 영원한 소망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소리 높여 문제의 해결자로 오시는 주님을 환영하고 찬양합시다.

4.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인간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불행한 삶을 사는 부자들을 얼마든지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 즉 구원 받은 삶을 살지 못하는 까닭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행복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죄에도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는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인간은 구원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셔서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그를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서 십자가를 보지 않고 인간을 보기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제도를 보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떼고 자꾸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신앙의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보았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십자가을 바라볼 때 상한 심령이 고침받고 쓰러지는 심령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있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씻어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악를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있는 곳에는 절망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바로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공자가 죽은 자를 살립니까? 석가가 죽은 자를 살립니까? 소크라테스가, 아니면 모세가 살립니까? 바울이 살립니까? 베드로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찬양나팔 510 험한십자가 능력있네)

오늘 종려주일에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함으로 환영하고 찬양해야 할 줄 믿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