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고난

은혜의 고난/욥13:15,요9:1~3

은혜의 고난
욥13:15,요9:1~3





이번 주간부터 우리는 고난주간에 들어갑니다. 예수의 고난에 대한 아픔을 생각해보는 귀중한 주간입니다. 흔히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겪을 때마다 갖는 생각은 ‘이 고난이 왜 나에게 생겨났을까?’, 또 이 고난에 대한 생겨나는 원인규명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면서, 이것은 신약성서의 본문 말씀처럼, 이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는 점에 주요한 관심들을 갖게 됩니다. 저는 구약에 있는 욥기를 생각해 보면서, 욥의 고난의 인내를 통하여 우리들이 얻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욥기 23: 15절의 말씀과 요한복음9: 1-3의 말씀을 가지고 ‘은혜의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생각합니다.

고난의 개념을 담고 있는 성서의 용어들은 히브리어로 12개, 헬라어로 21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어들은 ‘고난을 당한다, 고난을 견딘다, 고난, 고통, 괴로움, 아프게 한다, 환난을 당한다, 억압을 받는다, 괴롭힌다, 떠난다, 홀로 남는다’ 는 등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고난이 있는가에 대해서 성서를 살펴보았더니, 몇 가지로 구분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또 고난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한 감정의 이입으로서, 고난은 다른 사람의 형벌에 대한 대속적인 담당으로서, 고난은 진정한 회개와 신앙으로서, 고난은 보다 큰 악을 막기 위한 경고로서,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자 하는 훈련을 통한 의미로 성서는 풀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각 형태의 고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그 존재의 이유만큼 각기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차이점들은 고난의 목적을 일반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부당하고 오도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고난은 고난으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초기 학자들이 하나님의 초월을 너무 강조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너무 초월적이므로 인간의 고난 때문에 고난당하시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초월성을 강조함으로써 비롯된 논리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인간성을 강조한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바르트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고난당한다는 모든 것을 고난당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그리스도의 고난주간을 격렬하게 고난 받으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철저한 고난의 수용입니다.

욥은 강렬한 고난을 통하여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결함을 증거하였습니다. 사탄은 욥의 신앙이 이미 받은 일시적인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탄으로 하여금 욥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과 그의 건강까지도 빼앗음으로써 욥의 충성을 시험해보려고 허용하는 것을 욥기에서 알게 됩니다. 욥의 경우에 있어서의 고난은 어떤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거로서 욥이 겪는 고난이 죄인의 죄를 속량하는 가치를 드러내려함이었습니다. 욥은 언젠가 올 고난의 구세주(예수)의 그림자로서 앞선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든 질병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신약 본문에서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서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오니까, 그 부모오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은혜로 고난을, 어려움을 극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헤아려 보아야겠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치유는,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에 대한 핵심적인 증언을 하게 함으로써 고난의 생활을 종결짓게 합니다

. 우리가 고난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의 증거로서 경험하게 될 때 어떤 자세가 합당하겠습니까? 우리는 고통 중에 인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겠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영웅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희롱과 채찍질뿐만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으셨으며, 돌로 맞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저희가 광야와 산중에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여 있느니라”고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며 그것이 미래의 영광을 약속한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해 볼 때 현재의 고난은 가볍다고 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씌어진 구약성서 욥기는 인간고를 테마로 한 세계문학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욥기의 특색은 욥을 찾아온 세 친구가 인과응보의 고정관념을 지킨 데 반하여, 욥은 자신이 겪는 괴로움과 고난이 인과응보가 아닌 사람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줄기차게 대답하는 데 있음을 주목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인생고를 통하여 구원을 이룩할 자,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악과 죽음의 신비스러운 뜻을 결정적으로 나타나려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욥기의 기록자는 그 욥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아름다운 운율을 바탕으로 한 장중한 시문학을 그려낸 것이었습니다.

아주 옛날 그 옛날, 태고이던 시절, 에돔 지방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흠이 없고 정직한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여 부정을 저지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슬하에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둔 행복한 아버지였고, 양 7천 마리, 낙타 3천 마리, 소 300겨리, 암나귀 500마리와 수많은 종들을 거느린 부자였습니다. 에돔과 아라비아에 걸쳐 그의 장막, 텐트는 구름처럼 이어져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그를 알기를, 앞지를 만한 부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하나님 앞에 천사들이 모여 섰습니다. 그때 옆에 사탄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물었습니다. “어디를 너희들이 다녀왔느냐?” 사탄이 대답합니다. “이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욥이라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욥이 어떤 사람이었더냐?” 하고 하나님이 물어보셨습니다. “욥을 살펴본 결과 욥이야말로 진지한 사람, 흠이 없는 사람,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일컬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기 때문에 불의를 저지른 적이 없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사탄도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사탄은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고 반문을 합니다. 왜냐하면 욥이 가지고 있는 것은 대단히 풍족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복을 빌어주시기 때문에 그 소유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넘치게 부자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아마도 그는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 아닙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명하십니다. “그래, 욥이 가진 모든 것을 네게 맡길 테니 네 마음대로 한번 해보아라. 그러나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
사탄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맏아들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스바 사람들이 몰려와서 가축을 모두 다 빼앗아갔습니다.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던 나귀도 몰고 갔습니다. 그들과 싸우던 종들도 살해를 당하였습니다. 또 이어져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떼와 목동들이 다 죽었습니다. 연쇄적으로 환난이 임하게 되는데, 갈대아 사람 세 무리가 낙타떼를 모두 끌고 갑니다. 지키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겨우 몇 사람만 살았다고 보고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네번째 경고를 알리는 종이 들어오더니, “저는 큰 도련님 댁에서 왔습니다. 주인어른 따님과 아드님들과 한창 음식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광야에서 강풍이 불어닥쳐 집이 무너졌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젊은 사람들은 모두 깔려 목숨을 읽고 저 혼자만 겨우 빠져나와 이렇게 소식을 전합니다” 종의 말을 들은 욥은 벌떡 일어나 옷을 찢고 머리를 매만진 다음에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말합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 욥은 투덜거린다든가 저주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최후 마지막으로, 또 다음의 시험을 신청하여 유도합니다. “욥에게 아픔을 주지 않으면, 육신의 고통을 주지 않으면, 육신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면 사람은 무슨 짓이라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의 뼈와 살을 쳐 보십시오. 그때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나 우리 지켜보십시다.” 사탄은 사정없이 욥을 들볶았습니다.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악성 종기가 돌았습니다. 욥은 가려움증을 참지 못해서 잿더미에서 뒹굴었습니다. 옹기조각으로 가려운 몸을 전부 긁어내기 시작합니다. 아내조차 위로의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비웃었습니다. “이 꼴이 되어서도 아직 성인인 척하십니까?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오히려 속시원합니다.” 아내의 성화가 거칠어만 갔습니다. 그러나 “바보 같은 소리!” 하고, 욥은 아내를 타이르면서 묵살하고 맙니다.
욥의 재앙의 소식을 듣고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하 사람 빌닷, 나마 사람 소발 등 세 사람이 욥을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 에돔으로 온 것입니다. 그 고통 중에 욥은 욥기서에 있는 대로 그들에게 말을 풀어갑니다. 이 대화의 글들이 욥기서에 있습니다. 욥은 세 사람이 가지고 온 수소와 수양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죄인을 하나님께 중재하는 자가 되고자 기도합니다. 욥이 겪는 괴로움이 죄인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량하는 가치를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욥은 언젠가는 올 고통의 사람인 구세주의 그림자였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게 됩니다. 한생명의 탄생은 반드시 해산의 고통이 따르듯이 구원, 그것은 괴로움 속에, 고난 속에 담긴 의미임을 욥은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고난’이었습니다.

욥의 육신의 병을 낫게 하여 건강을 되찾아주면서 이전보다 2배나 되는 복을 하나님은 그에게 내렸습니다. 그의 소유는 양이 1만 4천 마리, 낙타 6천 마리, 소와 나귀가 각각 1천 마리가 되었습니다. 욥의 장막은 지난날처럼 에돔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초원을 덮었습니다. 일곱 아들과 아름다운 세 딸을 또 낳았습니다. 새로 태어난 자식들이 장가들어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욥은 장수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날이 차서 이 세상에서의 모든 날이 찼을 때 그는 평안히 눈을 감을 수가 있었습니다. 욥의 고난을 통하여 보면서 인간은 삶 속에 어찌하지 못할 괴로움과 고난을 겪고 사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인간들이 살려고 하는 의지로 바둥바둥대며 살고 있지만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두가 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죽음에 삼킨 바 됩니다. 이런 방도로 논리를 전개하면, 하나님도 죽은 자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없이하므로 죽음을 극복한다는 새 생명의 길을 열었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영원한 삶의 약속으로 이해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깊은 뜻이 있고 해결의 열쇠가 담겨 있는 사건에는 반드시 고통이 내재하고 있음을 압니다. 고통을 피하는 것도 좋고 고통을 참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뜻있게 이용하여 거기서 더 높은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은 더욱 고귀합니다.
예수가 바로 그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상의 예수의 절규는 구약성서 시편 22: 9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주는 실감어린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시편에 “나는 시궁물같이 쏟아집니다. 모든 뼈는 어그러집니다. 내 심장도 촛물같이 내 속에서 녹습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같이 됩니다. 내 혀가 이틀에 붙었나이다. 악당들이 내 수족을 찔렀습니다. 나는 내 모든 뼈를 셀 수가 있습니다. 저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내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시편 22: 14-18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리얼한 본모습이 예수의 극에 달한 장면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죽음의 고난을 당하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은 그 고난을 더 큰 사랑으로 승리할 때의 영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의 죽음으로 역사의 바퀴를 역전시키신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그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만 인정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머리로 생각한 교리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산제물을 드리는 생활로써 한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스데반은 돌로맞아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니까 자랑할 것도 없고, 다만 자랑이 있다면 다만 자기가 복음을 위하여 더 많이 고난당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항상 예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진 것은 예수의 생명도 자기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떳떳하게 되기 위하여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고와 매맞음과 잡힘과 소란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겪은 고난을 자랑삼아 열거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어느 사도들보다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유대인에게 40에 하나 덜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당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 중에 강의 위험과 강도 만남과 동족의 냉대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춥고 헐벗었고, 거기에다 밤낮 여러 교회들 때문에 걱정했다”고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이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욥의 고통은 선한 사람에게는 번영이, 악인에게는 심판이 임한다는 도식적인 인과응보의 사고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해 봅니다. 그러기에 은혜는 고난 속에서 생겨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제목으로 삼는 말씀입니다. 욥의 고난 뒤에 숨겨진 목적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당신의 뜻을 알리시거나 욥을 치유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계속되는 육체의 고통과 친구들의 논박 속에서도 욥은 오직 하나님만을 앙망하였습니다. 예컨대 욥의 참소망은 재산이나 자녀나 건강이나 우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자기의 존재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자의 모습입니다. 욥은 그가 체험하게 된 삶으로 고난에 대해 항전합니다. 욥기의 전편에 걸쳐 처참한 고난을 몸소 겪은 욥이라는 한 인물에 대해 심오한 진리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욥기 13: 15은 욥기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로, 하난님의 궁극적 섭리에 의한 축복을 처음에는 의심하지만 곧 회개하고 믿음으로써 승리하는 사람으로서의 욥을 그리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길을 보여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인 앞에 구원을 열어주셨습니다. 고난 없는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은혜의 고난으로 한 삶을 보여준 욥은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그림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