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 주는 선물 벧전1:3-7
오늘은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부활이 주는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가지 큰 명절이 있습니다. 그 중에 첫째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방이라는 선물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자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자기네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덕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 노예의 생활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유월절이 주는 선물은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둘째로 수장절입니다. 가을철에 농사를 지어 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일주일 동안 축제를 합니다. 하나님께 일년 농사를 지어 풍성히 쌓고 누릴 수 있는 복 주심을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기업을 통해서 양식의 복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이 주는 선물은 재물의 선물 즉 기업의 선물입니다.
셋째로 오순절 혹은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처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제일 먼저 거둔 밀을 하나님께 바치며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가면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기독교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결국 오순절의 선물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주님의 부활이 또는 우리의 부활이 주는 선물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산 소망의 선물 (3-)
살아있는 소망이 있다면 죽은 소망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잠언 11장 7절을 보면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악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자기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죽음과 함께 끝이 나는 것이기에 죽은 소망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들에게는 죽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본문 3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말할 수 없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예수 믿고 있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는 중에 한 이야기가 본문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핍박을 받고 죽는다 할지라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 가지 이유는 때문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긍휼, 둘째로는 예수님의 부활, 셋째로는 성령으로 거듭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긍휼 까닭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괘씸하다 하시면 그 인생이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역대상 21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만 두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국력이 이 만큼 막강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너희들이 언제 국력을 믿고 살았느냐? 하나님을 믿고 살았는데 왜 그 일을 하려느냐? 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윗 이상으로 권력의 자리에 올라갈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윗 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괘씸히 여기시므로 엄청난 재앙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시매 7만명이 죽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한번은 제자들을 데리고 나인성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상여가 나오고 있습니다. 상여를 메고 나오는 뒤에는 과부 어머니가 따르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쫓아 나왔습니다. 묘지로 가서 장례를 치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때 성경은 예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셨더니 벌떡 일어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때 살길이 열렸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불쌍히만 여겨 주시면 죽어 죽어 하는 길에도 살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우리들에게는 소망을 주고 살길을 열어주는 귀한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에 가서 우리의 죄를 몽땅 뒤집어쓰고 죄인이 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 대신에 죽고, 저주받을 대신에 저주를 받으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께서 그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나의 죄 문제를 전부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끝나고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다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하시고 일어나신 것입니다. 즉 살아나셨다는 말입니다. 살아 나셔서 우리에게 자기의 의를 덧입혀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 주는 선물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으면 의롭다 함을 얻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산 소망을 선물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로는 성령의 거듭남 까닭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가 언제 예수님께 우리를 위해 죽어 달라고 부탁했습니까? 자기가 죽고 싶어서 죽어 놓고는 너희를 위해 죽었다고 하십니다. 그 맹랑한 소리가 믿어지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믿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예수를 통해서 보내 주셨기 까닭입니다. 그 성령을 받아 거듭난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버지 이상으로 믿어지고 이천년 전에 죽었다는 예수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를 입혀 주셨다는 사실이 100%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아스팔트 고속도로를 뚫어 놓았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출발할 때는 출발 지점밖에 모르지 않습니까?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부산까지 가는 길입니다\" \"웃기지 마십시오. 당신이 언제 부산에 가 보았오? 나는 믿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부산에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래요. 믿습니다. 가보겠습니다\"하고 차를 몰고 가면 가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구원의 고속도로를 뚫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습니다\" 하고 달려가면 하늘나라 영원한 기업에 이어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의 거듭남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예수님의 부활, 성령의 거듭남 까닭에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산 소망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둘째, 영화의 선물 (4-5)
말은 비슷해도 전혀 뜻이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성화\'와 \'영화\'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까? 구원 얻은 다음에 우리가 날로 날로 새로워지고 죽을 때까지 계속 거룩해 지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영화\'는 우리가 죽었다가 부활한 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머니의 태 중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너는 내 것이라\'하고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십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이 됩니다. 그 하나님의 선택을 내가 과거에 받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내가 태어나서 부름 받아 교회에 나오고 믿음 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주여 믿습니다\'라고 하는 순간 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재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을 보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믿습니다\'라고 하면 그 순간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받고 있는 구원입니다.
그런가 하면 앞으로 받을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육신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해서 믿지 않는 사람과 똑 같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3일만 굶겨 보십시오. 사람 죽인다고 펄펄 뜁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은 3일을 굶겨 놓아도 괜찮습니까? 똑같이 죽는다고 펄펄 뛰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조금만 손해를 끼치고, 헤꼬지를 해 보십시오. 밤새도록 잠을 못 자고 한숨을 쉬면서 죽이고 싶도록 미워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의 육신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여 정욕이 샘솟듯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세월이 가면 늙어집니다. 제가 광성교회에 온지 37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광성교회에 올 때는 젊은 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카락이 다 희어졌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빨이 다 빠지고 머리가 다 빠질 것입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천국에 가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늘 나라에 가서도 역시 이가 다 빠진 모습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들어 감기에 걸려서 바깥출입도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원을 얻지 못한 몸이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천국에 가면 큰 일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썩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 내 육신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날 때에는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병들지 않습니다. 반드시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령한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똑 같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오늘 제목의 말씀대로 하면 영화롭게 되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영육간의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 완성됩니다. 이것이 앞으로 받을 구원입니다. 이처럼 구원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과거에 받은 구원, 현재에 받고 있는 구원, 앞으로 받을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5절을 보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천주교와 기독교와 공동으로 번역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내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 재림할 때 나타내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받을 구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의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세계에 흩어져서 예수를 믿으며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고난 중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그네들에게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믿음을 보고 보호해 주시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영화롭게 하시고 구원을 얻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재림과 동시에 부활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선물은 영화의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이 영화에 모두 동참하도록 약속을 해 주신 것을 믿고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기쁨의 선물 (6-7)
지금 제 손에 돈 한 보따리가 들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돈이 한 보따리가 생기면 기쁘겠습니까? 기쁘지 않겠습니까? 기쁩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도둑놈이 와서 들고 가 버렸습니다. 입이 무거워서 가지고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들고 간 것입니다. 기쁨이 남아 있습니까? 떠났습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다 들고 갈 수 있고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주님이 빼앗지 않는한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0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악당들에게 붙잡혀 가서 가진 고통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이것이 무슨 꼴입니까? 온갖 것을 다 포기하고 희생하면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이 왕으로 등극하는 날에 한 자리를 차지하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따랐는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저 악당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우리가 따르던 예수님을 죽였는데 우리도 잡아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싶어서 얼마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는지 모릅니다. 혼자 흩어져 있으면 더 두렵기 까닭에 함께 모였습니다. 유대 지방이 낮이면 얼마나 덥습니까? 그러나 문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순간 얼마나 마음이 평안했겠습니까? \'주님이 죽으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구나. 죽음 저편에는 이런 세계도 있구나. 죽음은 겁낼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혹시 우리가 허깨비를 본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만져 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몸을 만지고 상처를 확인하더니 주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가지를 못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를 보고 기뻐하는 것 때문입니다. 부활이 주는 선물이기 까닭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에서 7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순금덩어리가 어디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순금을 얻으려면 금광석을 깨내야 합니다. 금광석에 도토리 알만한 금덩어리가 박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쪼아 내면 됩니다. 그러나 아니지 않습니까? 그 큰 돌덩이 어디에 금이 들어 있는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알지를 못할 정도입니다. 전문가가 보면 여기에 금이 들어 있다 하여 그것을 깨내지 않습니까? 돌을 깨낼 때에 입을 주어서 말을 하라고 하면 돌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돌을 깨낼 때 돌이 \"사람이 죽는다\"고 펄펄 뛸 것입니다. 그리고 1,000도, 2,000도, 3,000도 용광로에 녹여서 찌꺼기를 버릴 때 역시 입을 주어서 말을 하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람 죽는다고 난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찌꺼기를 버리고 나면 순금이 나오지 않습니까? 주먹만한 순금덩어리라고 할지라도 금광석을 4톤 트럭에 한 트럭을 가져다 준다고 해서 바꾸겠습니까? 금광석 자체는 써먹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빼낸 순금은 귀한 보배가 되고 귀하게 쓰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고 교회에 나올 때 처음 믿은 믿음이 순금 같은 믿음인줄 아십니까? 금광석과 같아서 온갖 것들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람 죽는다\"할 정도로 고난을 주어서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고, 또 고난을 주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면서 믿음의 찌꺼기를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흩어진 나그네들이 \"사람 죽는다\"할 정도로 고난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 가운데 찌꺼기를 제하고 순금을 빼내려는 하나님의 의도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고난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 끝에 반드시 순금과 같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도가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고난까지라도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순금 같은 믿음이 되어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쓰시면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러기에 성도가 받는 현재의 고난은 부활할 때 받는 칭찬과 영광은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즉 반드시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반드시 십자가의 과정을 통해서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는 날 그리고 우리가 부활하는 날에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부활하신 주님 재림하실 때에 부활한 성도들이 상급을 받으면서도 기뻐하는 이 기쁨은 부활이 주는 선물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활이 주는 선물은 첫째 산 소망입니다. 산 소망은 하나님의 긍휼, 예수님의 부활, 성령의 거듭남 까닭입니다. 둘째 영화의 선물입니다. 구원에는 과정이 있는데 과거에 받은 구원, 현재에 받고 있는 구원, 앞으로 받을 구원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몸이 부활하여 영화롭게 됩니다. 영화의 선물입니다. 셋째 기쁨의 선물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십자가만을 보았을 때는 불안이요, 근심이요, 좌절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부활이 주는 기쁨의 선물이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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