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의미 요11: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5-27>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주 앞에 모인 여러분들 마음속에 하늘의 신령한 평강한 은혜로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오늘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본문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으로부터 평소에 사랑을 받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다니 촌에서 살고 있던 나사로란 사람인데 그가 어느 날 병들어서 죽게 됩니다. 그가 죽은 지 나흘이 되던 날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서있을때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여, 그대는 부활을 믿느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습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나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니 어떤 다른 종교를 창시한 교주들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어떤 종교를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났던 교주들은 한결같이 무덤 속에 지금 들어있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텅비어있습니다.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 없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이 부활은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며, 주님의 부활이 주는 교훈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저는 오늘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허위와 거짓, 속임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고 다 드러나는 것이며 진리와 진실만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 이게 바로 부활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종교 지도자들, 그들이 지은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겉다르고 속다른 죄를 외식하고 겉으로는 양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노략하는 이리가 들어있는 그래서 화있을진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 이렇게 책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하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히 옳소. 당신 말이 옳습니다. 내가 정말 잘못했소. 나의 죄를 용서해주오.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변하여 새사람되는 부류의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잘못을 지적한 사람에 대해서 악감을 품고 기회만 주어지면 복수라도 하겠다는 악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 죄악을 지적한 예수님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죽일꼬 하다가 거짓증인을 세우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느니 율법을 어겼느니, 이런 사람은 살려둬선 안되느니 하고 아우성을 치며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 거짓말로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죽으면 사흘만에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그 예언은 더욱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무덤에 장사지내고 난 뒤에 밤에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해 가고는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거짓말하는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또 믿고 현혹될 것이니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지켜야 되겠다. 그래서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서 무덤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을 해달라고 요청하니 빌라도는 허락합니다. 그래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밤새도록 지켰습니다. 그런데 안식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서 무덤을 찾아갔는데 그때에 놀라운 일이 전개됩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그 지역이 움직이고 하늘에서부터 빛난 옷을 입은 천사가 내려오더니 큰 돌,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려 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거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군병들이 너무 놀라서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그 때 천사들이 여인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 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너희는 빨리 가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예수님이 사셨다 말하고 갈릴리로 가라 하라. 예수님께서 그 곳에서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들이 그 곳을 떠나 나오려는 순간 예수님이 거기에 서 계십니다. 주님이 여인들에게 묻습니다. 평안하뇨? 이 여인들이 너무 반갑고 또 놀라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고 갈릴리에서 나를 만나자고 말해라. 그래서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달려오는데 한편 정신을 차린 군병들이 일어나서 보니 예수님은 무덤에 안 계시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급히 성중에 들어와 대제사장들을 만나고 새벽에 일어난 일들을 다 고하니 이 대제사장들이 다시 놀라게 되고 백성의 장로들을 다시 불러모으면서 상의합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꼬. 우리 이렇게 합시다. 밤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좀 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군병들을 불러놓고 이 예수님의 시체가 밤에 없어졌다는 것을 총독이 아는 날 너희들도 문책받을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이렇게 하라. 돈을 많이 줄테니 앞으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 절대로 하지말고 우리가 깜빡 잠든 사이에 그들이 밤에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해 갔다고 말하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은 고로 그렇게 말하였으니 그 소문이 온 유다에 퍼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된 일을 돈으로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부활을 총칼로 권세로 막으려고 했던 사람들, 모두가 실패했습니다. 총칼이, 세상의 권력이, 돈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거짓된 것이 진실된 자를 향해서 잘못됐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 포장을 하고 위장을 해서 진실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 것은 거짓과 위선과 속임은 오래가지 못하고 백일하에 드러날 날이 올 것이며 그렇게 드러나는 날, 거짓으로 속인 사람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그는 수치와 심판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1440년 어느 날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며 또 문헌학자였던 로렌조 발라라고 하는 사람이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합니다. 700년동안이나 진품으로 알았던 그 누구도 감히 의심치 않았던 콘스탄틴 기증서가 거짓문서였다는 것을 밝혀냅니다. 이 콘스탄틴 기증서라고 하는 것은 로마 교황청이 그 권위를 드높이고 로마교회에 막대한 토지소유를 정당화하게 하기 위한 문서였습니다. 그 문서의 내용은 심한 나병에 걸렸던 콘스탄틴 황제는 자기 병 치료를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은 허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감독 실버스타 1세에 의해서 그가 병고침을 받고 보니 그 은혜 감사 표시로 로마에 있는 궁궐의 터와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많은 땅을 로마 감독에게 기증했다는 내용입니다. 콘스탄틴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기의 귀한 것들을 아끼지 않고 모든 땅을 로마감독에게 바쳤으니 여러분들도 모든 재산을 로마 교황청에,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 바쳐라. 이렇게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논 그 문서가 가짜였다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있어서 하나님 교회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것이 결정되어지고 문서로 남으면 그것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많은 백성들을 기만하고 눈가림으로 속임수로 재물을 착취하기 위해서 거짓 증서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 로렌조 발라라는 학자에 의해서 들추어졌으니 이 로렌조 발라가 그 콘스탄틴 기증서를 깊이 살펴보니까 그때 4세기 경에 썼던 라틴어하고 8세기에 썼던 라틴어가 많이 변형이 일어난 것을 알고 있는 학자로서 4세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8세기에 쓰던 말로 썼으니까 그것이 거짓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교황청에서 천주교에서 이 로렌조 발라라고 하는 사람을 위협도 하고 그 말을 취소하라고 했지만은 진실을 진실되게 말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게 되었고 결국 이 소문이 온 세상에 알려지자 결국 교황청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며 로마의 카톨릭을 멀리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거짓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사탄의 계략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은밀한 가운데 사람이 죄를 범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죄를 천하가 알도록 들춰내시는 분이고 은밀한 가운데 선을 행한 사람의 선도 하나님께서 만민 앞에 축복으로 주는 일이 많으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거짓은 반드시 패배하고 진실된 사람이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인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거짓을 다 버리고 진실되게 살아가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두번째, 이 부활의 의미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한문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괴로움이 다 지나간 뒤에는 좋은 일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들의 책상에는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는 글을 써붙여 놓고 어떤 합격이라는 목표를 정해놓고 합격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나는 극복하겠다, 절제도 하고 참아내겠다고 하는 의지가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어떤 고난이 있을 때 그 고난을 믿음으로 부활정신으로 참아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하는 일이 대단히 간교하고 마귀의 능력과 권세가 또한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24절에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귀도 기사와 이적을 행합니다. 마귀의 능력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못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는 사랑을 못합니다. 마귀가 못하는 것은 용서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을 계속 갖거나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직은 미숙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용서, 그리고 사랑, 이보다 위대한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죄악과 싸워야 합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장가를 들어서 첫번째 얻은 아들을 므낫세라 이름하였고 두번째 태어난 아들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지었습니다. 므낫세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잊어버림이란 뜻입니다. 무엇을 잊어버리겠다는 뜻입니까? 그동안 요셉은 잊혀지지 아니하는 마음의 큰 상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배다른 자기 형들이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여자가 넷이 있었고 그 네명의 여자를 통해서 여러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열한번째로 이제 태어난 아들입니다.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를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랬더니 배다른 다른 열 명의 형들이 그것을 시기 질투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요셉이 나이 열일곱살 때에 꿈을 꾸었는데 꿈의 내용은 장차 자기가 지도자가 될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셨고 그것을 형제들에게 말했더니 그때부터 더 미워했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 되겠다는 말이냐? 그래서 더욱 그를 미워했는데 어느 날 이 요셉은 아버지 심부름차 저 들녘에 형님들의 안부를 물으러 가는데 형들이 요셉이 나타나자 하는 말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우리 미워하는 그가 오는도다. 우리 이번에 저를 없애버리자. 자기들이 모의를 하고 저를 죽이자 그래서 이 항아리형으로 파져있는 물없는 광야의 구덩이에 던져버렸습니다. 거기에 한번 들어가면 못나옵니다. 그때에 어린 이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형들이 아니라 원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신들이 사람이야? 짐승이지! 그런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노예상인들이 그 앞을 지나갑니다. 이스마엘 족속들이 지나가는데 야! 우리가 저 요셉 끌어내서 돈 받고 팔자! 그래서 그를 끌어내서 은 이십냥을 받고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인신매매범이 요셉의 형들입니다. 그는 애굽의 노예시장에 가서 보디발이라고 하는 사람 집에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노예로 출발은 했지만은 워낙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고 성실하고 근면해서 주인으로부터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그 가정 총무가 됩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서 바로왕이 무서운 꿈을 꾸고 해몽을 하지 못해서 괴로워할 때 요셉이 가서 꿈 해몽을 하므로 그 나이 삼십세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장가들어서 아들을 낳았을 때 므낫세라 하고 나는 지난날 내 마음의 원한과 형들에 대한 미운 감정을 오늘로서 잊어버리겠다. 나는 그들을 무조건 용서하리라. 그런 마음으로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난 아들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했으니 에브라임이란 뜻은 두배의 결실, 풍성함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물입니다. 요셉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버지께 사랑받은 것이 죄입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요셉의 형들은 원수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겠지. 그런 생각을 갖고 그는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 요셉에 대해서 시편 105편 17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진 고난, 시련, 연단이었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이 그 연단이 끝났을 때 영광스런 보좌로 그를 이끄셨으니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 있습니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연구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많은 시련과 연단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더 큰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 고난을 극복해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늘을 새처럼 나를 수 없을까를 생각했던 라이트 형제, 그 두 형제는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대학교는 고사하고 고등학교도 가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매일 기도하더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얻고 그래서 비행기를 발명할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왕 헨리포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브라임 링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 많은 지식, 좋은 환경을 부르짖지만 성경에 나온,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 빛을 발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좋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체적으로도 결함이 있던 사람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에게 없는 하늘의 지혜와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고 큰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꼭 아이큐 높은 사람만이 성공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만은 아이큐가 105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 이후에 최고의 물리학자로 일컫는 스티븐 호킹박사는 루게릭이라고 하는 근육무력증을 앓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초대대통령, 워싱톤같은 사람, 트루먼 같은 사람은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어떤 큰 일을 하는데 장애물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나는 남같지 못한 환경과 남같지 못한 신체적인 어떤 열등적인 것들, 그런 것들 때문에 여러분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것들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무릎을 꿇고 주님의 도움을 구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통한 이후에 부활의 영광같은 좋은 것들로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결코 포기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아침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승천의 영광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무릎이 예수님 앞에 꿇을 날이 올 것이라는 그 영광스러움을 바라봤기 때문에 고난과 수치의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무한한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인내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부활의 의미는 부활생명을 우리도 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일이 객관적인 일이 나의 주관적인 사건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어야 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나의 부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 위에 살아계신 주님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는 일이야말로 내 자신에게 위대한 힘이 되는 것이고 복음을 확신있게 전할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예수 만나기 전에는 적지 않게 교회에 피해를 주었던 사람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완전히 본 어게인(Born again), 다시 태어났습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완전히 벗어 버렸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 어느 한 자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철야예배 시간에 나와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저는 저희 남편도 무시했습니다. 저는 인생이 뭔지 왜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디스코장으로 그리고 나이트 클럽으로 다니면서 방황했습니다. 인생살이가 재미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너무너무 좋아서 요새는 열심히 나와서 전도하고 우리 부부 사이도 너무 너무 좋아졌다고 간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우리가 모시게 되면 첫째는 죽은 영이 살아납니다. 여기서 말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 하나님과 교제가 끊겼던 사람이 주님과 교제가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끝장났다는 것이 아니고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물 속에서 살아야 할 고기가 물 바깥으로 나왔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땅 속에 뿌리를 뻗어야 할 나무가 뿌리가 뽑혔다, 분리된 상태를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생들, 영적으로 죽어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생수가 계속 흘러 들어와야 할 호수에 흐르는 물이 그치고 고인 물이 썩으면 그 곳에 있는 고기들도 함께 죽고 썩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꼭 그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 그의 영으로 우리가 새로워지게 되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가 서로 회복이 되고 그래서 예수 안에서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영혼을 다시 거듭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25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나니 이는 항상 살아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깨닫고 말씀을 통해서 그의 흘리신 피가 내 죄를 사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날, 우리 영은 다시 살아나게 되고, 영이 살아나게 되면 예수님이 나의 영원한 생명이 나의 소망이, 삶의 의미요 가치요 나의 힘이요 지혜요 나의 모든 것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내 영이 살게 되면 두번째 죽었던 양심도 살아납니다. 죽어있는 양심은 감각이 없습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해도, 부활을 이야기해도 감각이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화인 맞은 양심, 굳은 양심, 죽은 영들은 그렇습니다. 원래 양심이란 말의 본래 뜻은 함께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알고 내가 압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이 살아나면 양심이 회복되는데 그 때부터 정한 양심, 선한 양심, 청결한 양심을 갖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착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죄를 고의적으로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을 눈가림으로 적당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보든지 안보든지 언제나 자기와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킵니다. 이 양심의 회복은 도덕성 회복입니다. 요즘 세상이 도덕 불감증에 걸렸습니다. 죄를 지어놓고도 뻔뻔스럽습니다. 이 세상이 밝아지기 위해서 도덕성 회복이 되어야 되고 세 번째는 이어서 사회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성 회복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입니다. 이 사회성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당신은 나를 위하여 존재한다, 여러분 모두는 나를 위하여 존재한다,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형상으로 바꾸어지고 도덕성과 사회성이 회복되어지면 반대로 생각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살겠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본분인줄 알고 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성이 회복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말하는 가장 큰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 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면 모든 것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남의 짐을 내가 지겠다고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볼 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내게 있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고 그를 등에 엎고 병원으로 달려가서 그를 구원해 주어야만 되는 그게 바로 사회성 회복입니다. 이 땅이 왜 어두워지고 살기가 어렵습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살벌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회성 회복도 과거의 자기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서 달리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가정에서 아픔을 경험해본 사람은 가정사역이 귀하다고 외치고 나타날 수 있고, 처절한 가난의 설움을 경험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야 된다라고 그 쪽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죽을 병으로 사경을 헤매다고 주님의 은혜로 고침받고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병든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여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사회성 회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의 눈은 주님의 시각으로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봐도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 마음속에 예수님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에 대한 관심이 있을 때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은 진정 거듭난 사람인가? 외형적으로 교인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서 더욱 악을 행하게 될 때 주님은 우셨습니다. 어느 날 감람산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은 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던 사람들,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했던 사람들, 예수님을 문바깥으로 쫓아냈던 사람들, 그들에게는 이제 심판만 있게될 것을 바라보니 마음이 답답하고 너무 슬퍼서 주님이 우셨습니다. 구원받아야 될 사람, 회개해야 할 사람이 고집을 부리고 교만하여 강퍅해서 계속 곁길로 갈 때 그들의 영원을 가슴에 끌어안고 여러분은 울어본 일이 있습니까? 정치를 잘못한다, 경제가 엉망이다, 누구를 지탄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에요.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학자이든 간에 그 속에 예수 없으면 다 자기 이익 챙기기에 바쁩니다. 이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는 길은 예수 믿는 우리 속에 남아있는 죄악의 찌꺼기를 성령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요셉이 자기 마음속에 형들에 대한 나쁜 감정을 다 버리기로 한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도사리고 있는 증오심과 미운 감정과 복수심과 이기심, 탐심, 욕심, 시기, 질투,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죄없이 십자가 지고 가셨던 주님,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그의 삶으로 우리의 남은 여생을 한번 살아보겠다고 하는 이런 마음가짐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고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가는 곳마다 주님의 능하신 손길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새역사가 전개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 다시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부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여러분의 생애에 이런 새로운 출발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