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와 부활 마16:21-23 여러 차례의 강도 상해죄를 저지른 두 명의 범죄자들이 한 은둔자의 도움으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은둔자에게 자신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어떻게 새 삶을 살면 좋을지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은둔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성지순례를 할 것을 권했습니다. 두 사람은 곧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 길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습니다. 십가자의 무게가 대단했지만, 아직 그 정도를 짊어질 힘은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가 어깨가 붓고 저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십자가를 변형시킬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들은 어느 마을의 목공소로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십자가의 긴 쪽을 잘라냈습니다. \"자, 이제 훨씬 짧아졌지만, 그래도 십자가는 십자가지.\" 또 한 사람은 십자가 두께를 반으로 쪼개어 두 개의 십자가를 만들더니 그 중에 하나는 바닥에 버렸습니다. \"자, 이제 휠씬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엄연한 십자가지.\" 두 사람은 이제 한결 편해졌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조차 찾기 힘든 사막지역에 들어서자, 사정은 또다시 악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사흘 동안 사막을 헤매었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도시를 발견하고는 기뻐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예기치 않은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 앞에 깊은 골이 패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건널만한 다리는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우리 십자가로 임시 다리를 놓읍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십자가는 길이가 너무 짧았고, 또 한 사람의 십자가는 길이는 맞았지만 두께가 너무 얇아 약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가끔 우리의 십자가를 줄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께 헌신하였다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고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정말 우리의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이 정말 저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에 당신은 저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침묵하실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제발 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런 원망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생각 하는 시간에, 제가 바라는 욕망대로, 제가 원하는 소원대로 이루어주십시오. 이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저는 당신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골부림입니까? 얼마나 미련한 원망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런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나의 현실이 이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겨우 이것이냐하고, 현실 속에서 자기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불평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안계시다고 합니다. 안계시다면 이 우주가 생기고 서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벌써 다 없어졌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내게 벌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면 벌써 다 벼락이라도 맞아 죽었지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았겠습니까?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 밖에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내가 그것을 믿지 않는데에, 내가 그것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당신을 못박는 그 무서운 시간에 다음과 같은 귀중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가상(架上)칠언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말씀입니다마는 우리가 하나님을 간혹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의 원인, 모든 잘못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르는 것, 그 무지의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은혜되고 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잘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만 합니다. 엄연히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믿지 않고 이를 모르는 한, 그것은 나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나에게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이며, 사랑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결정입니다. 역사 안에 오신 엄청난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도 믿음이 문제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것이 무의미합니다. 내가 믿는 만큼만 나에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는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만족하시고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고 칭찬하십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행하면서 그의 말씀과 행하심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귀중한 고백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고치시는 능력을 보면서 깨 닫습니다. 그가 물에 빠져 들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것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그 군중에게 신이 나서 음식을 나누어주었으며, 그 이적을 떡을 내 입으로 맛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모든 사건, 그 모든 교훈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가르쳐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가진 믿음과 그 믿음의 성숙도에 따라서 위탁하시는 바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전에는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놀라운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말씀해 주셨는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고백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으며, 언젠가는 로마군인들을 다 몰아내고 왕국을 건설해서 이 민족에 자유와 번영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아가 메시야이신 예수는 그 새로운 왕국의 왕이 되시고, 자신은 그의 곁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는 국무총리쯤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극히 세속적인 이런 욕망에 준하여 저러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생각에 매여 있으면서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관이 잡스럽고 세속적이고 빗나간 탓입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개념이 문제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 개념을 교정하시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으로,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메시야관을 설명하심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가노라면 \'비로소\'와 \'이때로부터\'라는 두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비로소\'는 헬라어 원문에 \'엘사토\'로 되어 있으며, 이는 \'여기서 시작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데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이때로부터\'는 헬라어 원문에 \'아포 토테\'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한 바로 이 시간부터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에 신앙고백의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으로 복음을 전하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메시야로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로소 \'너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 에 살아나야 할 것\"을, 천국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고난은 자원적인 것이요, 자발적인 것입니다. 선택적 고난입니다. 십자가를 이리 저리 피하다가 부득이하게 이루어진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길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스스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무지가 낳은 고난이 아닙니다. 저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굳게 결심하시고,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십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통하는 길이요, 부활의 영광으로 통하는 길이요,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고난의 당위성이 있습니다. 이것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것이요, 구원을 위해서는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희생의 피가 필요합니다. 피흘림이 없는 사함은 없다고 성경도 말씀합니다. 여러분, 사랑을 해보셨습니까? 사랑을 받아 보셨습니까? 사랑의 언어는 희생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사랑의 언어에는 주는 말도 없으며, 듣는 말도 없습니다. 많은 선 물이 오가고, 많은 사랑의 행위가 있으되, 희생은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전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당위성입니다. 여기에 밀알 하나가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여기에 당위성이 있습니다. 또한 고난의 필연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된 것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께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고 머무신 목적이 이 사명에 잇습니다. 이것은 선택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들을 불러서 대화하시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24:25)\" - 성경에 예언한 것을 왜 곧바로 믿고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자기 욕망이 성경의 진리를 객관적으로 순수하게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깨우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이 영광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어이없게도 베드로는 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런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께서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23절)\"하고 소리치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 말에서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방해하는 세력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귀는 성령의 역사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은혜 받고 거듭난 기쁨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훼방을 놓습니다. 또한 마귀는 하나님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쓰는 방법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사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부수고 무너뜨리려는 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피해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는 결코 구속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또한 오늘날 우리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단은 항상 십자가를 피해 쉬운 길을 택하라고 종용합니다. 자신을 지키고 인생을 즐기라고, 너는 십자가를 원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 사람, 옛 성품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더 이상 육체를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여전히 \'네 자신을 아끼라. 십자가를 피해 육체를 따라 즐기며 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가리켜 사단이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도 예수님의 영광도 알고 있으며, 또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아!\"라고 단호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성경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지신 능력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우리의 충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결하게도 십자가라니 말도 안됩니다.\' - 베드로는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절)\" 이렇듯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이므로 더 이상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자기 생각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라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제자의 길은 자기 부인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령을 좇는, 예수님 안에서의 새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의 육신적 삶은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은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육체를 좇아 살면서 동시에 성령을 좇는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좇던 옛 사람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작업을 날마다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에게서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외부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내 힘으로는 도무지 되지 않는다. 누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 바로 여기에 우리의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한 몸부림을 더 이상 칠 수 없을 때, 즉 구원을 요청하는 외침을 시작하게 될 때, 바울이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한 고백에 우리도 이르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체에 속박되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내가\"라는 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8장에서 성령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서 이 말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의 삶, 영광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합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선물을 다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아는 길, 받는 길, 깨닫는 길도 고난을 통하여 주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길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고난을 통해서만 얻습니다. 고난이라는 언어를 통해서 비로소 바른 음성을 듣게 됩니다. 시메온 벤 야하이라는 유명한 랍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셨다. \'토라\'와 \'이스라엘 땅\'과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고난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고난을 통해서야 주시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서 깨닫고, 고난을 통해서 믿고, 고난을 통해서 이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성자 베르나르(Bernard)는 가슴을 치며 탄식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나는 어찌하여 여전히 쾌락만을 즐기고 있는가?\" 여러분, 고난의 십자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이렇습니다. 첫째, 고난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우연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필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고난의 의미가 있으며,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둘째, 고난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고난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생명으로,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있음을 알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 예수님께서 이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수용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통하며, 이 사랑과 고난은 합동하여 선을 이룹니다. 다만 나의 깨달음과 나의 믿음만이 문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여러분, 우리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나야 죽든 살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잘되든 못되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망하든 흥하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 나를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의 일,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큰 구원의 사역, 하나님의 일 안에서 나를 생각할 것입니다. 나의 존재와 현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말에 가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모든 고난, 모든 실패, 모든 역사의 흐름을 다 합쳐서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낼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 모든 고난을 감수하면서 천사의 미소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이에서 해결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고난의 의미를 어느 만큼 알고 있습니까? 어느 만큼 믿고 있습니까? 고난 당하는 자를 구원하시고자 고난 당하시고, 저주를 받는 자를 살리시고자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죽어 가는 자를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셔야만 했던, 그 고난의 의미를 말입니다. 나로 하여금 신령한 세계로 들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영생 지향적인 생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 귀한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귀한 생명의 역사는 이 순간에도 쉼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