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문이 열렸 습니다.

돌 문이 열렸습니다/막16:1-7

돌 문이 열렸습니다
막16:1-7





지나간 역사를 뒤돌아보면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오랫동안 전쟁을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 1815년 6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전쟁할 때의 일입니다. 모든 영국 국민들은 전쟁터에서 승리의 소식이 날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워털루에서 영국해군과 프랑스해군이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통신기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치루고 있는 배에서 신호를 보내면 육지에서 그 신호를 보고 전세가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추측할 뿐이었습니다. 바다에서 매우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을 때, 영국 국민들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바다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바다에 있는 배로부터 신호가 왔습니다. 그 내용은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패하였다.’고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모든 영국 국민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 패배의 소식에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육지에서는 바다에서 진행되는 전투상황이 더 궁금했지만, 바다에 자욱이 낀 안개 때문에 더 이상의 전쟁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영국국민들과 전쟁터에 아들을 보낸 가족들은 비통한 심정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런데 절망의 깊은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새벽, 안개가 걷히자 배에서 다른 소식이 왔습니다. 그 신호는 ‘웰링턴 장군의 영국군이 적을 패배시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먼저 보냈던 신호와 나중에 보냈던 신호는 같은 내용이었는데,

갑자기 바다에 안개가 자욱이 끼는 바람에 배에서 보낸 신호를 육지에서 잘못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영국해군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했다는 소식이 다시금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영국의 모든 국민들은 길거리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침울했던 런던은 갑자기 기쁨과 환희의 도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예루살렘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에 무시무시한 채찍을 맞고, 양손과 양발에는 녹슨 못이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허리에는 굵은 창에 찔린 채, 금요일 오후 3시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주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이 나중에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안치할 목적으로 준비해 놓았던 무덤에 장사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무덤과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이나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땅바닥을 파서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그 속에 집어넣고 흙을 덮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통 큰 바위나 절벽 속을 파낸 후 동굴을 만든 다음, 그 굴속에 시체를 넣어 둡니다. 요한복음 11장 38절과 39절에서 ‘무덤이 돌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통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아 놓습니다. 바위나 절벽이 없는 곳에서는 흙 동굴을 만들든지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집을 지어서 그 안에 시체를 넣고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놓습니다. 예수님의 시신 역시 아리마대 요셉이 만들어놓은 동굴 형태의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빌라도 총독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주여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마27:63~64) 빌라도 총독은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 입구를 육중한 돌문으로 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돌문에 인봉까지 했습니다. 여기 ‘인봉‘ 했다는 것은 완전히 봉쇄해서 아무도 그 돌문을 열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 관습에 의하면 밧줄로 돌문과 무덤 양쪽을 동여맨 후 밧줄에 양초나 흙으로 밀봉을 합니다. 그래서 아무나 이 돌문에 손을 댈 수 없게 만듭니다. 만약 돌문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인봉이 깨어지게 되고, 인봉을 깨뜨린 사람은 로마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생각되어 벌을 받게 됩니다.

또한 빌라도 총독은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자 군사들로 하여금 무덤을 굳게 지키게 했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시신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성인 남자 7~8명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육중한 돌문을 옮기고,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봉을 부수고, 24시간 동안 철통 같이 지키고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령 예수님이 완전히 돌아가시지 않고 잠시잠깐 정신을 잃었다 할지라도, 예수님 스스로 그 무덤을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손에서 해방시켜 줄 줄 알았는데,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찾아 번듯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 모든 꿈이 무너져버렸습니다. 특별히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너무 실망하여 다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국민들과 전쟁터에 아들을 보낸 가족들이 비통한 심정에 사로 잡혔던 때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 패배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고, 무기력하게 무덤 속에서 잠자고 있다는 생각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의 깊은 밤을 보낸 지 사흘이 되었을 때, 기쁜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웰링턴 장군의 영국군이 적을 패배시켰다’는 소식처럼, 예수님이 사단을 패배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치 다운을 당하여 KO 패 당할 것 같던 선수가 벌떡 일어나 한방에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KO 승을 거둔 것같이, 예수님은 상황을 역전시키셨습니다.

역전시키신 예수님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오늘 새벽 일찍이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일행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유대 관습에 따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안식일이 되기 전에 급하게 장례를 치르느라 예수님의 시신을 제대로 닦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닦아 드리기 위해 향품을 준비했다가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다같이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는 도중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을 막고 있는 그 큰 돌문을 열어 줄 수 있을까‘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우리에게도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큰 돌문을 열어 줄 수 있을까‘라고 탄식했던 여인들의 탄식이 어쩌면 우리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몸을 아프게 하는 질병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인생을 비겁하게 만들고 손가락질 당하게 만드는 가난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이 될 수도 있고,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죽음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돌문이 우리 앞을 가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힘으로는 나를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만약 제가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을 방문하기 위해 차를 몰고 백악관 정문을 향해 간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백악관 앞에는 테러를 방지하지 위한 방어용 바리케이트가 겹겹이 쳐있습니다. 또한 정문 주위에 수많은 경찰들과 경호대원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리 부시 대통령을 만나려고 해도, 부시 대통령의 초청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바리케이트를 뚫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경비들의 제지를 무시한 채 자동차를 몰고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곧바로 제가 탄 자동차는 백악관을 지키는 경호대원들이 쏘아대는 무수한 총알을 맞아 벌집처럼 박살이 날 것입니다.

반대로 제가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러면 정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 경비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조목사님, 이미 연락받았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맘 놓고 들어오십시오.” 그래도 제가 걱정이 되어 “아니 정문 앞에 쳐져있는 바리케이트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하면, 아마 경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써 다 치워 두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내 힘으로는 나를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나 혼자 힘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돌문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큰 돌문을 열어 줄 수 있을까‘라고 탄식을 하며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무덤을 막아놓았던 육중한 돌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예수님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였습니다.

놀라는 그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다같이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예수님께서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막9:31).”고 말씀하신 그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부활이 우리 기독교가 세상의 종교들과 다른 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스텐리 존스라는 영국 선교사가 인도에서 선교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노방 전도를 하고 있는데 모슬렘 교도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가지를 가지고 있소.” 스텐리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소. 그래서 우리는 마호메트가 정말로 과거에 생존하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가는 예루살렘에는 예수의 빈 무덤밖에 없다고 하지 않소? 그러니 예수가 정말로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소?” 메디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유적지입니다. 모슬렘 교도들은 이곳을 ‘메카’라고 부르며 성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모슬렘교를 창시한 마호메트의 무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라마단이라는 모슬렘들의 금식기간이 되면, 수 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메디나를 방문하여 참배를 합니다. 모슬렘교도의 이 말에 스텐리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잘 지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선생의 말대로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기독교가 모슬렘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밖에 없습니다.” 또 언젠가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인도를 위시한 많은 불교국가에서 한동안 떠들썩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보물과 같은 석가모니의 뼈들을 앞세운 채 수백 만 명이 시가행진을 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뼈가 안치되어 있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엎드려 경의를 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옆에 있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를 하나라도 발견한다면, 기독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그렇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가짜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헛수고에 불과하고, 우리가 배우는 성경은 쓰레기통에 던져져야 하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다 헛된 거짓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죽은 종교이지만, 우리 기독교는 살아있는 기독교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모슬렘 사람들은 메카에 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마호메트의 무덤을 자랑하고, 불교도들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자랑하고, 이집트 사람들은 바로왕의 무덤인 거대한 피라밋을 자랑하고, 인도사람들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지은 타지마할 묘를 자랑하고, 중국 사람들은 진시황이 묻힌 지하 아방궁을 자랑하지만, 우리 주님은 자랑할 무덤조차 없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주님의 시신이 들어있는 무덤이 없습니다.

단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빈 무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망권세 깨뜨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죽은 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산 자를 믿는 줄로 믿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을 믿는 기독교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고전15:20).

첫 열매가 되셨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뿐 아니라, 여러 부활사건들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엘리사 선지가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또 사도 베드로는 욥바에서 병들어 죽은 다비다를 살렸고, 사도 바울은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과 예수님의 부활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모든 사람은 결국에는 다시 죽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부활을 체험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부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잠시 동안 생명을 연장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다시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다. 감람산에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신 후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죽은 사람을 ‘죽었다’라고 하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한 곳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마가복음 5장 38절과 39절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또 구약성경에 보면, ”열조와 함께 자니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 잠이란 것은 다시 깨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피곤해서 어떤 사람은 10시간도 잘 수 있고, 15시간도 잘 수 있고, 20시간도 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을 자다가도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깨어나든지, 배가 고파서 깨어나든지, 너무 오래 잠을 자는 바람에 허리가 아파서 깨어나든지, 언젠가는 깨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깨어난다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이 다시 깨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을 첫 첫 열매라고 합니다.

여기 ‘첫 열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정착해서 얻은 수확물 중 첫 열매를 드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유래했습니다(레 23:10~14).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은 모든 수확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첫 열매를 받으심으로써 모든 것을 다 받으신 것으로 여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첫 열매‘란 대표성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성도의 부활을 대표한다는 의미입니다.

등산 용어로 ‘러셀’이란 말이 있습니다. 산에 눈이 하얗게 덮이면 전혀 다른 산으로 변해 버립니다. 길도 보이지 않고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변해 버립니다. 그래서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등산객들이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종종 얼어 죽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산장 같은데서 머물면서 등산객들을 도와주고,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조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구조대원들이 눈을 헤치고 길을 터놓는 것을 ‘러셀’이라고 합니다. 구조대원이 눈길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놓으면 등산객은 그 길을 따라 산 밑으로 무사히 내려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눈보라 속에서 조난당해 죽어 가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구원의 길, 영생의 길, 축복의 길을 터놓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면 중요한 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궁금해서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지만, 천사는 그 여인들에게 빈 무덤에서 초점을 맞추지 말고 갈릴리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같이 7절을 보겠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천사는 여인들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가서 빈 무덤을 전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7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빈 무덤보다는 갈릴리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빈 무덤이 중요했다면, 천사는 여인들에게 빨리 가서 사람들에게 빈 무덤을 전하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빈 무덤을 전하라고 하지 않고 갈릴리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28장 10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 갈릴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의 무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아름다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시지 않고, 그렇다고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로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갈릴리 지역이 어떤 곳인 줄 아십니까?

갈릴리는 제자들이 어릴 때부터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느끼며 살던 곳입니다. 갈릴리는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고기를 잡던 곳입니다. 갈릴리는 의견 차이로 가족들과 갈등하는 곳이요, 보기 싫은 이웃이라 할지라도 매일 만나는 곳이요,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친구들이 있는 곳입니다. 갈릴리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삶의 현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처해진 삶의 현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갈릴리는 처음 주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무언가 결단을 했던 곳이고, 꿈과 비전을 발견했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배반하고, 자신들도 죽임을 당할까봐 문들을 꼭꼭 닫고 그 안에 숨어 지내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잃었던 신앙을 다시 찾으라는 것입니다

. 과거에 품었던 감격과 열정을 다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릴리에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멀리 가서 전하기 전에 먼저 갈릴리에 가서 주님께서 사망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 시간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망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 시간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도 새롭게 출발하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분들은 죄의 눈보라 속에서 조난당해 죽어 가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구원의 길, 영생의 길, 축복의 길을 터놓으신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이미 믿고 구원받은 분들은 갈릴리에서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현장인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업장에 가셔서 거기에서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 잃었던 믿음과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힘차게 창공을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사망권세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힘차게 날아오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