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굴려라 막16:1-6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1947년 10월 1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에서는 역사적인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미공군의 챨스 척 예거(Charles E. \'Chuck\' Yeager) 대위가 조종하는 Bell X-1 비행기가 세계 최초로 음속을 돌파하는 비행실험이었습니다. 비행기가 음속 0.7에서 0.9로 달리면서 점점 떨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 속도가 음속 0.92에서 0.97로 올라가는데, 비행기 자체가 얼마나 떨는지 조종사가 조종간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정도로 떱니다. 비행기가 오히려 추락할 것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래 상황실에서도 애가 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꽝!”하는 큰 소리가 났습니다. “아! 실패했구나!” 관계자 모두가 한숨을 쉬고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비행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유능한 조종사를 잃었다는 생각에 깊은 시름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말입니까? 폭발했다고 생각되던 비행기가 그들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비행기는 하얀 구름을 내뿜으며 아주 빠른 속도로 날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굉음은 비행기는 음속을 돌파하는 순간 소리가 한 점에 모이며 났던 아주 큰 소리였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 우리는 이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현상을 경험하곤 합니다. 폭발로 여겨졌던 순간은 바로 새로운 장을 여는 순간이었습니다. 절망이라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은 오히려 새로운 희망으로 곧 바뀌었습니다. 죽음이라 생각했던 순간은 오히려 새로운 세계로의 길을 여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절망의 고통을 겪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모든 마음이 흔들리고 다리가 꺽이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 알지 못해 불안함 가운데 살아가곤 합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듯한 상황 속에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이제는 끝이구나!”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이제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여야 할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연약한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신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향하면서 심적인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 두려움을 이기고 서슴치 않고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더 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는 실질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 그 이상의 일로 인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무덤의 문을 막고 있는 큰돌이 문제였습니다. 건장한 남자 두, 세 사람이라야 움직일 수 있는 돌이었습니다. 세 여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의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서로 말을 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여기에는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덤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그들의 염려와 두려움을 완전히 해소시켜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무덤의 돌이 벌써 움직여져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염려는 그냥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이 이미 그 누군가에 의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돌문을 여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을 옮기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열어가게 하였습니다.
이는 여인들의 염려와 두려움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예수의 부활을 계획하고 계셨기에 그 돌문을 여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여인들이 그 무덤을 향하여 왔고 그들이 걱정했던 바가 이미 해결된 것을 알게 된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들은 그것을 잊어 버리고 걱정하였고 근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언했던 부활의 사건을 기억하였더라면, 그들은 그러한 염려와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고 또한 무덤까지 갈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큰돌로 인해 큰 두려움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그 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가로막고 있는 그 큰 돌은 과연 무엇입니까? 철학자 사르트르에게는 ‘벽’일수 있습니다. 이는 자기 존재를 잘 알지 못하게 하는 단절을 의미합니다. 문학자 까뮈에게는 ‘부조리’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커는 이를 ‘절망’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키에르케로는 이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를 막고 있는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 인생의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아니면 꿈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현실입니까? 아니면 당신 옆에 앉아 있는 가까운 가족 혹은 이웃을 보십시오? 바로 그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십시오? 그 사람입니까? 그들이 아니라면, 바로 여러분 자신은 아닙니까? 바로 나 자신이 나에게 가장 큰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이겨 나갈 용기도 없고 꿈도 없을 때 나 자신이 나에게 있어 큰돌과도 같이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러한 길을 걸어가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하였습니다. 대구제일교회에 부름을 받고 와서 지금까지 약 2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목회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막연히 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결할 줄도 모르면서 그냥 걸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뻔히 아닌 줄 알면서도 걸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걸어왔습니다. 바로 그것이 제 앞에 놓여진 큰돌이었습니다. 장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저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막혔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에 의해 길이 열림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길에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놓여져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것이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일이신 것입니다. 부활의 역사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삶속에서 실제로 역사하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저로 하여금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마치 여인들이 한 청년의 선언을 통해 예수님이 얼마 전에 예언하셨던 말씀을 생각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저로 하여금 저에게 말씀하셨던 것들을 하나 하나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장을 열어주시려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단지 제가 그것을 잊어 버리고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계시는데, 내가 이미 포기된 것처럼 생각하는 잘못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너무나도 큰 사명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너무 거창하여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장애물을 밀어 굴려내시고 부활의 세계와도 같은 새로운 세계를 여시고자 하십니다. 기대합니다. 또한 그 일을 위한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나와 연관된 세상의 일에 대한 큰 염려와 걱정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신이 풀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며 더욱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위해 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좌절하지 맙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그냥 이루어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걷는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길이 엄청난 일이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 같은 상황이라 할찌라도 길은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 이 때 우리는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이미 예언한 바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걸어가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예언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이루어 나가실 것인지를 기대하십시오. 바로 그러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당연히 하시겠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까지 우리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많이 일어났습니다. 쉬운 예를 찾아보면, 사도 요한도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밧모섬에 갇혔을 때 그는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특히 그가 오늘날에 그의 기도처로 여겨지는 동굴에 들어가 기도할 때는 마치 예수님의 무덤 속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가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순간에 하나님은 놀라운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환상이요 이 세상의 종말에 관한 역사를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 절망의 순간 그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였고 그러한 역사가 오늘날 교회에까지 이르러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역사는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약속이 살아있는 한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특별히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이 원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새로운 장으로 도약하여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부모의 보호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이를 도약시켜 독립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요 의무입니다. 무엇으로 그 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많은 부모들은 이미 세상에 꽉 짜여진 가치관 속에서 자기의 자녀들을 기르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에 묶이고 매달려 허둥지둥 양육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무덤을 막고 있는 돌과도 같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치우지도 못하면서 그저 걱정하고 두려움에 쌓여 살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를 향해 부활의 삶과도 같은 장을 열어 놓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하여 열어 놓고 계시는 새로운 장을 바라보십시오. 어린이날 그리고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시는 부모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있어 오도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될 때마다, 우리는 자포자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뚫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적과도 같은 삶으로 이어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를 이미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부활에 대한 약속을 하셨기에 단지 이를 이루시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자신을 되돌아보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이를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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