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서 뵈리라

갈릴리에서 뵈리라/막16:1-8

갈릴리에서 뵈리라
막16:1-8





1. 부활절은 기독교 최대의 축제다.

세상은 연말과 상업성이 깃들인 성탄절을 대대적으로 기념하지만, 의미상으로는 사실 부활절이 더욱 소중한 절기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처형과 함께 한 때의 해프닝으로 끝날 뻔했던 기독교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 것은 부활 사건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가능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침내 생명이, 결국은 하나님의 정의가, 세상의 악과 인간의 불의와 죽음에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2. \'장미의 이름\'에서 인상적인 장면 - 집시 소녀와 귀공자 아서가 수도원 부엌에서 운명적으로 만난다. - 집시 소녀가 아서의 가죽옷과 가죽 신발을 벗긴다. 아서의 몸을 감싸 죄고 있던 가죽옷과 가죽 신발은 중세의 억압을 상징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꽁꽁 싸서 묶어 놓았다. 그 속에 인간은 자기를 드러낼 수 없었다.
집시 소녀가 가죽옷을 벗기고 아서의 몸 그대로를 꺼내는 것 - 이것이 15세기 서양의 르네상스다.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르네상스는 재생/부활이란 뜻이다.
죽어 있던 것을 다시 살려낸다. 잊혀졌던 것을 다시 회복한다.
이 때 다시 살려내는 것은 인간이었다.
서양 중세 천년은 사랑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는 그대로의 인간을 기독교 교리로 억압했는데, 이제 교리와 규율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알몸 그대로의 인간을 되찾자는 단순한 운동이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꾸어 놓았다.
르네상스는 교회에 의해 질식해 있던 인간의 재생/부활이었다.

3. 그리고,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다시 르네상스/부활의 역사를 단행해야 할 때를 맞고 있다.
지난 500년 동안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워졌다.
인간의 행동에 하나님은 전혀 간섭할 수 없었다.
우주에 로켓을 발사하여 우리 것이라고 하여도, 유전자를 조작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도, 인간의 욕심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마구 짓밟으면서도, 사람은 하나님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아도 되었다.
인간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중세와는 반대로 \'근대(modernism)\'라는 가죽끈으로 꽁꽁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한쪽에서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인간의 과학 기술의 바벨탑을 쌓고 있고, 또 한쪽으로는 심각한 비인간화 현상과 지구 전체가 공멸할지도 모르는 공포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라는 이름으로 가두었던 인간을 재생시키듯이, 과학과 욕심으로 가두었던 하나님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이것이 위기 앞에 서있는 인류의 유일한 생명길이다.
아니, 이미 죽음을 뚫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더 이상 하나님은 갇혀있지 않으며, 살아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큰 소리로 선언해야 한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 가서 만날 수 있는가?

4.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3일 째 되는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3명의 여성이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무덤에 갔다. 예수님 시신에 향료와 기름을 발라드리려고.
이것도 참 특이한 사건이다.
그렇게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무서워 떨고 있는데, 이름도 별로 없이 따라다니던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는 것 - 기독교 신앙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남성/여성, 학벌, 미모, 재력, 권력, 지식 그 어느 것도 신앙의 중심 요건은 아니다.
오로지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신앙의 구성 요소다.
얼마나 사랑이 뜨거웠으면, 새벽에 여자들이 무덤을 찾는가?
아마도 남자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는데, 무서워서 거절했을 것 같다.
부활의 영광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주님에 대한 사랑 - 목숨 건 사랑 끝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미 무덤을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은 굴려져 있었다 -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뛰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무덤에 들어가니, 무덤은 비어 있었고, 흰 옷 입은 젊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여인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죽었던 예수를 찾는데 그는 여기 계시지 않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 거기서 너희는 주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인간 만능의 세상 때문에 죽음 앞에 서 있다.
우리가 멸망의 백성이 되지 않고 구원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에 의해 억압된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여 그 자리를 돌려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디에 가서 주님을 만나는가?

5.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 가야 만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건설할 수 있는 곳은 갈릴리이다.
오늘의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서부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전 세계 모든 갈릴리에서나 만날 수 있다.
도대체 갈릴리는 어디인가?

6. 갈릴리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지난주 설교에서 예수님과 적대자들을 지역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과 갈릴리의 대립이라고 했다.
예루살렘은 돈, 힘, 쾌락이 몰려 있는 곳이다. 부족한 것이 없다. 평안하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데 가장 무서운 장애물은 고난이 아니다.
오히려 평안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늘어지게 하고, 갈릴리의 치열함을 제거한다.
우리로 갈릴리로 나서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우리의 인생과 세계를 구원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평안하게, 느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복음이 이런 치열함 없이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선언하기에 예수님의 구원을 싸구려 구원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순례자다.
서양 중세의 순례자들은 독일,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그 멀고 위험한 길을 걸어서, 굶주리면서 목숨 걸고 순례했다.
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런 고행이 치떨리게 힘들지만, 이 순례의 끝에는 거룩한 구원의 삶이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이 확신이 위험과 배고픔과 피곤함을 꿰뚫고 일어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 순례의 길에 나서지 않는 사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사람에게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7. 우리는 모두 보다 평안하기를 원한다. 보다 풍족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가 만나서 생명과 구원에 이르려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아픔에 맞서는 치열한 삶을 회복해야 한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극복해야 할지조차 잊어버린, 그래서 삶이 그저 느슨해져 버린 곳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주님은 분명히 선언하셨다 ; 가난한 자가 복 있다 / 애통하는 자가 복 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기를 떠나 평안과 풍요와 쾌락 속에서는 이제 만날 수 없다.
지금 가난하고 아프고 힘든 사람은 감사하라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지금 행복하고 평안한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갈릴리를 찾아야 한다.
내게 평화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아파하는 이웃에게로 가서 동참하라.
고통받는 세계로 나가서 그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한다 - 이것이 축복이다.
잠시의 평안을 접고 영원한 안식을 위해 갈릴리의 치열한 삶에 동참하는 자에게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과 죽음의 기세를 뚫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감사하며 기쁘게 갈릴리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