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부활에 증인이 될수 있을까?

누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가?/막16:1-11

누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가?
막16:1-11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고민이 두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미국과의 관계였고, 다른 하나는 대북관계에서 북핵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 였습니다. 북핵 문제는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좌우되기에 노무현 당선자의 통치 이념을 잘 전달하고 미국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노 당선자는 특사를 파견하기로 했고, 정대철씨를 비롯하여 미국도 인정할 만한 지적 능력과 설득력을 지닌 몇 사람을 뽑았습니다. 이와같이 꼭 성사시켜야 될 일을 위해 특별한 사람을 뽑아 일에 효율성을 더하는 것은 상식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의미를 전달하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인류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셨던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심과 이 놀라운 소식을 증거하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누구에게 맡겨 이룰 것인가 깊이 생각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은 꿈만 같은 일이요 이적과 기적으로 어떤 사람이 전하느냐에 따라 사실이 잘못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귀한 소식을 여성 중에서도(당시에는 여자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일곱 귀신 들려 제 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기억되던 사람에게 맡기셨다면 대체 이 여인의 무엇이 다른 사람과 달랐기 때문입니까?

여러분은 가장 값지고 보람 있는 인생이 어떤 인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를 통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전해져,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고 궁핍하게 살던 사람이 풍족하게 되는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부를 축적하고, 권세를 부리며 자기 소욕대로 사는 인생이 보람되다하지 않습니다. 아니, 역사와 현실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람,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만큼 복된 인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부활의 증인으로 사용될 희망이 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학벌이나 문벌을 보고 제자들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쓰신 주님은 나를 통해 중요한 계획을 이루심에 대해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의 어떤 점이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서게 했습니까?

첫 번째,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첫 만남은 마가복음 보다 누가복음 8장에서 더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 열두제자가 함께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요8:1~3)’ 의사 누가는 과학자의 눈으로 예리하게 관찰하여 여인의 활약상을 기록하고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역사적인 만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전 7장에서 또 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한 여인이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습니다.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닦으며 향유를 그 위에 붓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 시몬이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이 누군지를 알았더라면 저렇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셨을 거야.’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질문하십니다. “시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졌는데 한 사람은 50데나리온 또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둘 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 주인이 두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면 두 사람 중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습니까?” 시몬이 대답합니다.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오늘 이 여인은 자신이 많은 죄를 탕감 받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인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시고 또 시몬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그런데 시몬, 내가 할 얘기가 또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들어올 때에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에서는 손님이 올 때 주인이 발 씻을 물 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더 반가운 손님이라면 그 뺨에 키스하며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맞춤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 머리에 부을 감람유(감람유는 값싸고 보잘 것 없는 기름입니다.) 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내가 들어왔을 때에 눈물로 나의 발을 씻었고 여성의 상징인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았고 값비싼 향유로 발 위에 부었습니다. 내가 들어올 때부터 여인이 계속해서 내 발에 입 맞추며 나를 사랑하는 모습을 당신도 보지 않았습니까?”

이 일을 통해서 주님께 많은 은혜 받은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십니다.

학자들은 향유를 부은 여인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8장)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향유를 사용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계실 때 향유를 가지고 왔던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여인은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입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이나 정신 질환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겐 대개 마음의 상처가 깊고 많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가득해서 자기 힘으로 주체할 수 없을 때 귀신은 그 상처에 발붙입니다. 정신병원에 가보면 알게 되지만 정신병과 정신분열증이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착합니다.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에게 욕할 것 다 욕하고, 할말 다 하는 사람은 정신병을 앓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 자신의 삶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이 멍듭니다. 그런데 착한 사람이 병에 걸리는 이유는 아픔자체보다도 그 아픔을 함께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며 함께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뭔가 큰 죄를 지어 그럴 거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그럴 거야.’라고 생각하며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 가슴속에 아픔과, 고통, 괴로움보다 더 힘든 것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조롱과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 헨리(O. Henry) 단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도가 어떤 집에 총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손들어!’ 그랬더니 집 주인이 ‘제가 손을 들고 싶지만 신경통 때문에 손을 못 듭니다.’ 갑자기 강도의 눈빛이 변하며 ‘그래요, 나도 신경통 때문에 약값 구하러 도둑질하러 왔어요.’하고 총을 내려놓고는 서로 어루만지며 위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여인, 귀신만이 차지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아니 무거운 짐 진 사람이라면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이 세상 어디가도 마음 붙일 곳 없었고 내 무거운 짐 내려놓을 곳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쉬게 하겠다 하시는 구나.’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또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고, 귀신에게 잡혀있던 내 인생을 하나님 사람으로 바꾸어주신 그 분.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절대로 찬성하며 따라갈 거야.’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은혜를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할 때 우리 중에 나는 아니라고 누가 말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짐 진 사람,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정녕 죄인은 없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다 했습니다.(엡2:1) 이미 죽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대한 헌신은 구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그 분의 은혜를 얼마만큼 깨닫고 아는가에 따릅니다. 운명을 바꾸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부활의 증인 삼으십니다.

오늘 우리는 내 가정과 삶의 다른 영역 속에 주님을 초청합니다. 주님은 매력 있는 존재입니다. 나쁜 말도 하시지 않을 것 같고, 좋으시기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을 가정과 삶의 영역에 초청하고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는 우리는 아닙니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말씀이 머물 공간이 없고, 주님이 오셔서 쉬실 수 있는 공간이 없도록 하는 우리는 아닙니까? 주님을 모시기는 했지만 진정한 사랑과 환영을 가지고 맞이하기 보다는, 내가 하는 일을 능력으로 뒷받침 해줄 모습만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리새인 시몬이 바로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주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명을 맡기신다면 나에게 그 일을 맡기실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그가 가장 귀중히 여기시는 사명을 내게 맡기실까하는 질문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그 은혜를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변치 않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얼마나 깊게 깨닫고 감사드리십니까? 우리는 부활의 아침, 주님의 은혜를 처음부터 다시 기억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지 않으심을 기억하십시오. 막달라 마리아, 그는 너무나 큰 어려움 가운데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구원의 크고 놀라운 것을 깨달은 바로 은혜를 아는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역 즉, 예수의 메시야 되심과 구원하심의 사역을 희생하며 섬겼기 때문입니다. 16절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향품은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흔히 사용되던 향기 좋은 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러백(Billerbeck)이라는 주석가는 시신에 향품을 바르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장례 모습은 아니었다고 하며, 향품을 바르는 것은 왕의 시신에 행하는 절차였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향품을 준비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시신을 단순한 시체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으로 여긴 신앙 고백적 행동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해 돋는 때’라고 하는 단어는 마가의 독특한 표현 방식입니다. 마태는 ‘미명’이라 했고, 누가는 ‘새벽에’라고 했으며, 요한은 ‘아직 어두운 때’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한 시간이 단순히 해 돋는 때였음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는 사탄의 지배 아래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살아온 인간을 향해 구원의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해’라고 번역된 ‘헬리우’의 원형 ‘헬리오스’는 태양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우월성, 영원성을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알고, 그 예수님께서 어둠과 사망의 권세 아래 매여 있는 성도들에게 부활의 아침을 주시는이 동터오는 역사를 준비하고자 헌신적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헌신적으로 섬겼다는 사실은 누가복음에 더 정확하게 나옵니다. 누가복음 8장 3절 보면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섬겼습니까? 1~2절에 보면 ‘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전하다’라는 ‘퀘로스’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령, 사자로서 증거했다는 의미이고 반포하다의 ‘유안겔리조메노스’라는 단어는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써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이 여인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가지고 헌신적으로 도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물질, 정성, 시간,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과 복음이 증거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헌신했던 이 여인들을 주님께서 쓰셨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리는 신앙의 세 가지 영역을 얘기했습니다. 하나는 성서적 지식입니다. 성서적 지식이 없이는 신비주의에 빠져들게 됩니다. 또 하나는 체험입니다. 체험이 없이는 신앙은 신념과 관념주의에 빠져들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봉사입니다. 이 봉사가 없으면 그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믿음에 따르는 봉사의 삶을 살면서 신앙이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복음이 증거되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선포되는 그 곳에 어디까지든지 따라갔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두려워 예수님을 버려두고 다 도망갔던 그 때에도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까지 따라갔습니다.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하는 고백을 하며 그 여인들은 골고다의 언덕까지 갔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게 다가온 그 복음을 귀하게 여기며, 주님께서 메시야 되심을 전하는 이 놀라운 사역 앞에 쓰임 받는 자신들의 삶을 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메시야 되시고, 그 사실이 선포되는 복음이 증거 되는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고 계십니까?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얼마나 헌신하고 계십니까? 벳세다 맞은편 광야에서 일어났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의 사건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리떡 두 마리와 물고기 다섯 개는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미물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때 하나님의 역사에 기록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나 자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셔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어 죄 값을 치르게 하신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주님 앞에 오늘 어떤 모습으로 헌신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어떤 모습으로 부르고 있습니까? 나의 계획하는 일을 그 능력으로 도와주십사하는 관점에서 예수님을 부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가진 지식과 젊음과 물질을 복음이 증거 되는 그 일에 얼마나 헌신적으로 쓰고 있다는 말입니까!

여인들에게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열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갖으시는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받칠 수 있는 사람,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쓰시지 않겠습니까?
153전도 운동은 단순히 사람을 교회로 전도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이벤트도 아닙니다. 나의 삶의 통해서 주님께서 가장 관심 갖는 그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시도록, 그가 복음에 접촉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다가가는 영적인 운동이며 신앙고백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을 복음에 정면으로 투영될 수 있도록 하는 사역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우리 인생에서 우리의 소유로 진지하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복음의 증거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삶에서의 예를 들어봅시다.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꼭 필요한 심부름 시키실 때 어떤 자녀에게 심부름을 시키십니까? 자기의 임의대로 부모님의 뜻을 해석해서 꾀를 부려가며 일하는 사람을 시키지 않습니다. 부모가 이야기하는 뜻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감 없이 분명하고 정확하게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정말로 귀한 그 사역을 나에게 맡기실 수 있을까 부활하신 주님 앞에 스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받아들일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 앞에서 매우 당황하고 놀라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막달라 마리아는 동굴속의 청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이에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자기 임의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샘 모리스 박사는 ‘그의 말씀하신대로’라는 저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와서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그 아이가 건강해져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에게 어떤 장소에 가면 매어놓은 나귀 새끼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말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했고 고기 입에서 세금을 낼 돈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의 말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물 주전자를 가지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인데 유월절을 그 집에서 지내게 될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말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는 예루살렘에 가게 될 것이며 그가 배반을 당하고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며 십자가에 못 박히며 매장되지만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말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그의 적들은 그의 말씀하신 대로 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일을 방지하기 위해 무덤에 경비병을 세웠지만 정작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믿지 않았으며 막상 그 일이 일어나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그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이 여인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실망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말씀하신대로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설명하시고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발걸음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표정도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가 죽음과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꾸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힘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를 우리는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46편 5절에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말씀하신대로 죽으신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부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셔서 믿음 안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주님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축복하시고, 영원한 기쁨을 함께 나누실 것이라는 그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신화가 아닙니다.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고 구원하실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약속의 말씀을 잊어버린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힘을 낼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사건이 사실임을 보고도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부활의 아침에 회복할 것이 있다면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한 사람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수로서가 아니었다면 가 볼 수 없었을 만한 옛 소련의 강제 수용소에 보리스 니콜라이비치 코든 펠트라는 유대인 의사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동방정교는 유대인들을 심하게 박해했기 때문에 이 의사는 기독교인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소련에 공산주의가 들어올 때 이들을 환영했었는데, 막상 맞닥뜨려 본 후 이 의사는 스탈린 체제를 비판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사인지라 다른 수용자들 보다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한 그리스도인 죄수가 다가와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인권이 말살되는 것을 보면서 그 마음속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귀담아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고생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간수를 수술 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까 고민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동맥을 꿰매는데 어설프게 마무리를 했다가 3일 뒤 정도에 저절로 터지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자신 안에 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생각했습니다. ‘내 속에 무서운 죄가 있구나. 이 고난과 징벌을 받을 만한 이유가 나에게 있구나.’ 그는 거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이후에 그는 죄수들을 죽이는 건강진단서에 더 이상 싸인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환자들의 음식과 약을 훔쳐 먹는 간부를 고발했습니다. 지난 얼마간 계속해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이것은 간부들을 고발한 사람들이 밤에 죽어나간 것이었고 수용소 당국은 그것을 묵인했습니다. 이제 이 의사도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잠자리에 제대로 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데 한 젊은 청년이 대장암 수술을 받고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외로워 보였습니다. 또한 몹시 지쳐보였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때 이 의사는 자기 속에 일어나 그 변화를 이 청년에게 이야기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취가 덜 깬 그 청년에게 자기 속에 일어난 변화를 증거 했습니다. 청년은 마취로 정신이 혼미했지만 의사는 힘을 다해 이야기 했고 서서히 이 젊은 청년은 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깨었을 때 어수선한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자신에게 복음을 증거 하던 고든 펠트는 어떤 사람에게 머리를 망치로 8번이나 맞아서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그 이야기가 끝이 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의사의 고백은 청년의 가슴속에 살아났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청년이 197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련의 반체제 작가 솔제 니친입니다. ‘수용소 군도’라는 작품을 통해서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세주 되심을 전하며 어려운 수용소의 생활을 폭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미미한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오늘 내가 복음의 부담감을 가지고 전했던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복음의 역사를 이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복음의 증인,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복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존귀하게 쓰임 받다가 주님의 존귀하게 쓰임 받는 자들의 받는 복을 누리는 복된 우리의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