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

부활 신앙/막16:1-11

부활 신앙
막16:1-11





무엇이든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수도 있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도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대체로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많은 생각과 고민을 거쳐서 무엇이든지 결정하는 반면에 적극적인 성격의 사람은 모든 일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특히 신앙은 더 더욱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은 늘 어둡습니다. 언제나 슬픕니다. 그러다보니 매사가 부정적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즐겁게 믿지를 못합니다.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구석이 있습니다. 마치 불러도 대답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늘 투정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신앙을 <무덤 속에 있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무덤의 종교가 아니라 <부활의 종교>입니다. 즉, 기쁨과 소망과 희망의 종교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그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신앙도 더 이상 무덤 속의 신앙이 아니라 희망적이고, 소망적인 부활 신앙이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으로 사는 자들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여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평소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수발을 드느라 분주했을 그들이 지금은 아무런 활동이 없습니다. 더 이상 봉사할 대상도 없고 말씀을 들을 스승도 없습니다. 더 이상 치유의 기적도, 상담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새벽부터 무덤을 향해 달렸고,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을 뿐입니다. 마27:61에 보면“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고 그들의 형편을 설명합니다. 커다란 기대와 뜨거운 열심을 품고 힘써 달려 온 먼 길이었건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공허한 빈 무덤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자꾸만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저녁에도 가고 새벽에도 갔습니다. 가고 또 갔습니다. 여러분,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어디>로 달려가는 중입니까? 그 <누가> 있기를 바라면서 달려갑니까? 그 <무엇>이 있기를 기대하며 뛰어갑니까?

갈릴리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여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으며 마지막 힘을 모아 새벽을 깨우며 달음박질했건만 이미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며 그 분의 시체라도 보려고 달려 왔건만 이중적인 실망감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갖은 고초를 겪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마리아는 극도의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적으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 마27:6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이 말 속에 응고 되어 있는 마리아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무덤 속에는 십자가의 거친 못질로 파열된 육체와 채찍과 가시면류관으로 찢겨진 상처투성이의 예수님의 시신이 뉘어져 있습니다. 이 무덤을 향하여 막달라 마리아의 가슴이 오열하며 피 눈물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안식 후 첫 날 이른 새벽에 향품과 향유를 가지고 장례 준비를 하려고 무덤에 갔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또 한번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이중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사람이란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엄청난 실망을 느끼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이 절망 속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가 그토록 찾고 있는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다다른 절망의 빈 무덤 앞에 부활하신 모습으로 함께 서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보려고 무덤을 향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허상>을 보고 예수님은 <실체>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시선은 실체가 아닌 <빈 무덤>에 고착 되었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마리아의 온 몸>에 부어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바로 내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언제나 내 앞에 있는 텅 빈 무덤 속에서 돌아가신 예수님만 찾고 있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겪는 문제들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은 내 눈 앞의 문제들에 너무도 골몰하여 내 뒤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이 엉뚱한 곳에만 머물러 있다면 영적시력이 난시가 됩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혼란스럽고 황망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빈 무덤에 정신이 빠졌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돌아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고통스러운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하고 동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어디에 서 계셨습니까? 마리아의 등 뒤에 서계셨습니다. 마리아가 처음에 무덤에 왔을 때는 다른 여자들도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새 생명을 계시하실 때에는 다른 여자들은 다 돌아가고 마리아만 홀로 남았을 때였습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가장 외롭고 고독한 슬픔이 밀려 올 그 때에 주님께서 “마리아야!”하고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어두운<무덤을 향하여>앉아 있으면 두려움과 좌절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마리아처럼 빈 무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요한의 표현처럼 하염없이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만 들여다보면 (요20:1)천사들의 말이라도 슬픔을 씻겨주지 못합니다. 또 한편으로 요20:15에 마리아가 주님께“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예수님을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애원한 대목은 참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리아의 헌신이 너무나 아름답고 고결했어도 살아계신 주님을 찾을 능력이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부터<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찾기만 했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찾는 자가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자신의 부활을 예고했지만 아무도 이 말씀을 믿고 기대하던 자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마저도 그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끝났구나하고 제각기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참 우스운 얘깁니다만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혹시 예수가 예언한대로 부활을 만들기 위해서 제자들이 무슨 일을 꾸미지나 않을까 싶어서 빌라도에게 무덤을 지키자고 건의하고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에도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는 말로 끝납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신앙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바로 내 등 뒤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봐서 문제란 말입니다. 나를 위하여서는 철저하게 신앙생활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은 있는데 내 삶에 부활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신앙이 없어서 언제나 어둡고, 늘 비관적이고, 항상 부정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자기식의 믿음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없이 빈 무덤 앞에 섰던 막달라 마리아는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동산지기로 여겼습니다. 그처럼 애석해하며 열심히 보고 싶어 했던 주님이었건만 마리아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빈 무덤을 향해 앉아 있는 자들이 겪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입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그 분의 새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만 우리들의 빈 무덤 신앙이 새 생명의 부활 신앙으로 바뀔 수 있겠습니까? 주여! 주여 하고 내가 주님의 이름만 부르고 있으면 됩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앞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이름을 수없이 불러보았을 것입니다. 그랬어도 그녀는 부활의 주님을 자기 힘으로는 만날 수 없었고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즉 자기의 사랑만으로 빈 무덤을 향한 그녀의 신앙이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그 장면이 요20:16입니다.“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랍오니>라고 하는 말은 “나의 선생님”혹은“나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하고 자기의 이름을 불렀더니 그제야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바로 “나의 주님”으로 고백되는 것입니다. “마리아야”라는 주님의 부름 속에 부활생명이 흐르고 “랍오니여”라는 대답 속에 마리아의 부활의 신앙이 꽃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아무개야!”개인적으로 불러 주십니다. 그 음성은 무덤 속에 있는 시신의 음성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 부르심 속에는 우리가 더 이상 빈 무덤을 향하여 살지 말기를 원하시고, 더 이상 지치고, 실패하고, 부정적인 신앙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바람이 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을 의지하고, 우리를 향해 사랑을 베푸시는 그 분과 진실한 사랑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스텐버그]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사랑의 3요소를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친밀감>이라고 했습니다. 가깝게 느끼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행복을 증진시키고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찹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갓난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눈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니다. 이것은 두 생명의 연합을 말하는 겁니다. 이게 친밀감이요, 곧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이런 친밀감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는 <정열>입니다. 사랑하면 온통 그곳에만 관심이 있고 사랑의 대상에 몰두합니다. 희생도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 가치가 있고, 봉사도 오직 그를 위해서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피차가 서로의 사랑을 담뿍 받으면서 아무 구속이 없습니다. 자유하며 행복합니다. 이 정열이 믿음이라는 것이요, 곧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위한 이러한 열정이 있습니까? 이게 있어야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세 번째 요소는 <전적으로 위탁>을 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다 맡기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그에게 다 위탁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뜻을 그대로 나의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돼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도 이제 장차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헌신이요, 그것이 행복이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엄청난 자유와 용기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고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더 이상 빈 무덤에 머무르는 신앙에서 벗어나서 새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라하십니다. 다투지 말고 사랑하자하십니다. 시기하지 말고 위로하자하십니다. 흉보지 말고 칭찬하자하십니다. 어둡지 말고 밝자고 하십니다. 부정적이지 말고 긍정적이자 하십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이 빈 무덤에 머물렀던 신앙이었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부활의 신앙>으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