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자의 복 사회봉사주일 마25:40-46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37:28). 주시되 털 깍는 자 앞에서 그 입을 열지 않음같이 주셨습니다.
로마의 사도 바울 참수기념 교회 옆에 트라피스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 곳의 수도사들은 말하지 않는 수도원이라 합니다. 일평생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 없이 봉사하는 수도원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이 아니겠습니까? 수해 의연금이니 각종 재해 의연금, 거액의 의연금이나 헌금을 내고 이름과 사진이 나온 거에 매료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작은 교회 온 교우들에게 광고하여 몇 푼의 헌금을 거두워 그 헌금을 가지고 상기된 얼굴로 열등의식을 느끼며 하나님은 아실텐데 하면서 접수 창구에 거룩한 손 ! 너무나도 대조적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은밀하게\\\"라는 말씀을 잊었는지 왜 자꾸만 내 이름을 드러내려고 합니까? 왜 이웃에게 나타내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 왜 거액의 헌금을 하였으면 어깨가 쭉 펴질까? 적은 봉사는 왜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려고 할까? 왜 치하를 받아야만 만족을 느낄까? 사람에게 칭찬받고 치하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상급이 없는데 왜 사람에게 영광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할까? 또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고 하셨거늘 왜 많이 받고싶을까? 다시 한번 경건히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고 본문을 통해서 주는 자의 복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 인간 속에 계십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는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의 획기적인 인간관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을 주종관계,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로 파악하지 아니하고 \\\'형제\\\' 또는 \\\'자매\\\'로 파악한 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을 형제, 또는 자매로 보는 것은 인간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며, 사랑의 관계이며 피차간에 결코 \\\'타인\\\'이 아니라는 정신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형제\\\', \\\'자매\\\'의 인간관계를 뛰어넘어서 인간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끌어올리는 월등한 인간관을 제시하셨습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여기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인간 속에\\\'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1세기 가까이 로마의 식민지 생활에 시달려 처참한 모습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모친이니라. \\\"(막 3 : 35)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한 자에게 아첨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또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약한 자를 멸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복음적인 인간관을 갖는 데서 시작하는 줄 믿습니다.
2. 주는 자는 인간의 삶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 \\\'양\\\'들은 어떠한 삶을 산 사람들인가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웃이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가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도와 준 사람들\\\'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불쌍하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안타까운 불우한 환경 가운데 놓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밑바닥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상속받을 사람들은 이와 같이 불행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고 사랑의 손길을 펴는 데 인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시간과 마음과 재물을 바쳐 이웃의 불행에 동참하는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봉사\\\'에 대하여 전혀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느냐고 오히려 반문하였습니다. 여기에 봉사의 참 뜻이 있습니다. 이웃의 불행에 동참하는 희생적이 봉사를 하고서도 전혀 기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참 복음적인 봉사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 45).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까지도 인간을 위해 주셨습니다. 무덤까지도 남의 것을 잠깐 빌려 쓰셨다가 돌려주시고 가셨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대형화 내지는 기업화 현상마저도 눈에 띄지만 주는 생활, 섬기는 생활, 불쌍히 여기는 생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헌금 수익에는 열을 올리면서 섬기는 삶을 등한히 하는 것은 필경 \\\'염소\\\'의 책받을 일입니다. 봉사자의 마음은 반드시 오른손이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명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선배목사님으로부터 서양 사람들의 봉사정신을 전해 들었습니다. \\\"서양 사람은 돈을 쓰는데 목사님을 찾아가서 이 돈을 가장 가난하고 어려온 사람을 도와 주십시요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은 이 돈으로 강대상이나 반듯한 물건을 비치하십시오.\\\" 이 엄청난 차이를 언제 메꿀 것입니까. 사람보다 물건을 중시하는 사상은 참으로 복음에서 먼 것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 하나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 \\\"고 하신 말씀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 터키의 안타키아(안디옥)에 있는 베드로 사도가 목회했다고 하는 안디옥교회를 찾아보았는데 20평 남짓한 교회를 보았고 강대 좌측에는 바위터널 4.2km의 피신하는 굴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교회가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였으니 불안과 공포 속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피신해서 도망가야 하는 그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예루살렘교회를 도왔다고 하니 우리가 할 말을 잊었습니다. 오늘날 도시 교회는 비대해지고 농촌 교회는 이농 현상과 함께 점점 쇠퇴해가고 있으니 도시에 속한 교회는 부흥의 호기를 누리면서 어찌 외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
3. 왜 봉사하기가 어렵습니까?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왜 외면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봉사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죄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주의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속죄의 은총을 입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의 모든 위대한 봉사자들은 모두 다 속죄의 감격이 그들로 하여금 철저한 자기 희생의 봉사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지난번 사회부 회의 때 일산 수해현장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을 적신 일이 있습니다. \\\"제방이 무너져 물바다가 되어서 사람은 다 피신하고 개들만 주인 집 지붕에 올라가 있다가 물이 빠진 연후에 주인이 그 집에 오니까 흙감탕이 된 집앞에 개들이 엎드려 있다가 달려나와 주인에게 매달리는 것을 보고 개를 끌어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말 못하는 개의 봉사도 가히 사람의 마음에 용기를 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혈연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은 혈연에서도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와 자기가족들 뿐입니다. 동물들이 새끼를 사랑하듯 그들의 가족 사랑은 동물적인 것이며 본능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혈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코 동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피로 맺어진 가족이 성령으로 하나된 우주적 가족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타인에 대한 봉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때로부터 비로소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동양에는 위대한 정복자는 있어도 위대한 봉사자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양사상이 가족과 가문에만 집착한 까닭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 :8)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가정도 가문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과 봉사로 기초한 우주적 가족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만큼 하나님을 탕아 간다는 것입니다.
셋째, 물욕에서 해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은 혈연에서도 해방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물욕에서도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위한 봉사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기 전에는 물욕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질\\\', \\\'재물\\\'은 땀의 결정이며 생명과 같은 삶의 열매를 어떻게 남에게 거저 줄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봉사의 기회를 주심이요,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4. 주는 자의 태도
(1) 이타적인 사랑으로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 :42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하였고 누가복음6 :30에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 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라.\\\" 하셨습니다.
(2) 자발적으로 봉사하여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였습니다.
(3) 은밀하게 봉사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6 :2-4에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5. 주는 자의 축복이 있습니다.
(1) 그 의가 영원히 있습니다. 시편 112:9에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하였고, 고린도 후서 9 : 9에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2) 복을 복습니다. 잠언 22 : 9에 \\\"선한·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하였고, 누가복음 6 :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였고, 사도행전 20 :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셨습니다.
(3) 영적인 보화를 얻습니다.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7-33) 하였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하였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기를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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