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간에 사랑과 섬김의 교제 공동체

상호 간에 사랑과 섬김의 교제 공동체/막10:35-45

상호 간에 사랑과 섬김의 교제 공동체
막10:35-45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도 우리가 생각했습니다만, 사람은 서로가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사람은 서로 간에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진정으로 살맛 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가 바로 이런 공동체의 역사라 말할 수 있습니다. 홀로 하지 못하는 일도 서로 힘을 합해서 공동으로 노력하면 더 큰 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상호관계를 맺으며 공동체를 이루지만,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로 인격적인 만남과 생명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로 진정한 의미로 교제와 공동체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서로 관계를 맺는 관계이며 교제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에 되는 교제는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에게 별 다른 소득을 주지 않는 공동체나 관계는 어떻게 하면 끝낼까 하면서 합당한 명분을 찾기에 급급합니다.

심지어는 합당한 명분도 없이 과감하게 끝내버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만날 뿐입니다. 한정된 재화를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서로 간에 경쟁하는 관계입니다. 서로 간의 이해관계와 이해득실 때문에 만나며 관계를 형성합니다. 오늘날 교회안에서도 이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방향에서 교회를 결정하고 또한 떠납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지체를 섬기며 교회를 섬기는 이타적인 삶의 태도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 사람 아담 이후의 인간들의 모습이며 세상의 질서입니다. 세상의 삶의 법칙입니다. 끼리 끼리는 어울리며 함께하지만, 이해관계가 다른 경쟁의 대상자와는 참된 연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이며,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더욱이 현대 사회로 오면서, 도시사회로 발전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서로를 섬기며 사랑하는 공동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이런 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허덕이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씀입니까? 진정으로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관계,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되는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천국과 같은 관계, 사랑을 가슴 가득히 한아름 안고 행복에 겨워할 수 있는 관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그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곳이 교회요 하나님 나라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새 언약의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런 행복한 관계를 만날 수 있으며,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창조하시는 새 시대의 삶의 질서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의 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후에 그리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때 세베대의 두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나와서 주의 나라에서 우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청탁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시는 말씀인데, 주께서 죽음을 통해서 세우시는 주의 나라의 질서와 특성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방인 나라의 질서와 대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세우시는 나라는 이방인의 나라처럼 큰 자가 죽은 자 위에 군림하는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큰 자가 섬기는 나라이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나라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병행되는 말씀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마20:20-28절). 마태복음에서는 세베대의 두 아들이 직접 예수님께 청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가 치마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합니다. 그러나 그 전반적인 내용은 마가복음과 거의 비슷합니다.

또 누가복음은 오늘 말씀과 직접적인 병행은 하지 않지만, 최후의 만찬석상의 자리에서의 일을 보고해주고 있습니다(눅22:24-30). 예수님께서 성만찬식을 제정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선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사이에서는 주의 나라에서 누가 더 큰가 하면서 권세와 명예 자랑을 하는 광경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마태나 누가복음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처럼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손수 대야에 물을 더러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요13장). 예수님께서 주와 선생으로 친히 본을 보이시면서 예수님께서 죽어 떠난 후에도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며 겸손으로 섬김으로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권면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 창조하신 새 시대의 교회의 특성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와 공동체를 창조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비교하신 이방 나라의 질서와 특성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정권 다툼과 권력싸움과 자리 다툼을 하고 있는 제자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통해서 구약의 나라의 특성과 질서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공동체의 특징

본문에 보면은 세베대의 아들들 혹은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 주의 나라에서 자리를 청탁하고 있습니다. 또 이 일 때문에 제자들이 분노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착잡한 심정인데 제자들은 권세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싸우며 자리를 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약적인 삶의 방식과 가치관 때문입니다. 구약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큰 자가 작은 자를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분명하게 계급의 질서가 존재하는 구별된 나라입니다. 구약의 나라는 남녀노소의 질서가 유별한 나라입니다. 빈부귀천의 차이가 분명한 나라입니다. 레위지파와 일반지파의 구별이 엄격히 구분되는 나라입니다.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의 구별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규정을 따라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 위에 군림하며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 위에 군림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소망은 큰 자라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런 원리와 가치철학을 기초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어떤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시점에 이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주께서 세우실 나라에서 보다 큰 자리를 탐하며 논쟁하는 것이며, 치마바람을 일으키며 큰 자리를 청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새 시대의 나라의 질서와 특성을 바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많은 세월을 함께 했지만 여전히 구약의 질서와 가치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 세계의 특징

이런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새 시대의 나라의 특성과 질서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특별하게 이방 나라의 질서와 비교해서 가르칩니다. 이방 나라의 특성은 어떤 나라입니까? 42절입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알거니와\\\". 여기 한 절에 이방 나라의 질서와 특성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 위에 군림하는 나라입니다. 통치자들이 권세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나라입니다. 구약의 나라는 그래도 통치자들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율법에 정한 규례를 따라서 다스리며 통치하지만, 이방 나라는 왕이 바로 법입니다. 권세있는 자가 바로 법이며 힘이며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들 마음대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에서는 진정한 공동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람이 사람을 대하여 인격적인 교제나 사귐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상명 하복의 질서이며 공동체일 뿐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이해관계를 따라서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 시대의 공동체의 특징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새 시대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질서는 어떠합니까? 신약의 교회 공동체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은 어떠합니까? 43-44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바로 이것이 새 시대의 삶의 방식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방식이며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새 시대의 나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은사와 재능을 나에게 주신 이유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지체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세상의 원리처럼 떵떵거리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하나님 나라와 이웃과 지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더 많은 돈과 재물을 모으기 위해 수고하며 애쓰는 이유는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이며,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더 많은 재능과 더 많은 지위와 더 많은 은사가 있다고 목에 힘주며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손하고 헌신하는 삶이 새 시대의 삶의 원리입니다. 여기에 진정으로 인간다운 냄새가 납니다.

이런 공동체에 진정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나타납니다. 이런 사랑과 겸손을 따라 서로 섬기며 돕는 교제에서 진정한 성도의 사귐이 커갑니다. 세상에서 찌들리고 고통당하는 백성들이 진정으로 쉬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런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런 의미로 교회 공동체가 사람과 사람의 참된 인격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참된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찌들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는데, 교회안에서조차 큰 자가 작은 자 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위화감을 느끼며,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냉냉하고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모습이 보이면, 두 번 다시는 교회 문을 밟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입니다.

새 시대의 삶의 질서에 대해서 선언하신 후에 예수님은 자신도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하셨고 헌신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던지면서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삶의 모범이 되어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친히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시는 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가 서로 섬기며 겸손으로 하나되도록 하기 위해서 몸소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들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셔서 주의 나라 백성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교통하며 성도 상호간에 사랑의 연합을 이루며 교제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어진 나라는 이방 나라와 같은 나라가 아닙니다. 또 구약의 나라와 같은 나라도 아닙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새 시대의 나라입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나라입니다. 성도 상호간에 서로 사랑하고 겸손이 낮아져서 섬기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로 이 곳이 천국입니다.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쉴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제자가 되는 나라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나라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장점과 은사와 능력을 최대로 살려서 이웃을 위해서 배려하며 사랑으로 헌신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이런 사랑과 헌신의 교제가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같은 교회 교인들끼리도 누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교회는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이 더 맞는 말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케네디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마시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오\\\"라 말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며 성경적인 삶의 질서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교회의 모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계산해보고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이웃과 지체가 나를 위해 얼마나 이용가치가 있는가 혹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바라기 전에 내가 이웃을 위해서 지체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교회가 성숙한 교회요, 이런 성도가 성숙한 성도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상처받고 비난하기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장점과 열매를 발견하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교회와 성도가 성숙한 교회이며 성도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자기 희생적인 헌신으로 똘똘 뭉쳐진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살맛 나는 교회입니다. 바로 이런 교회가 천국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 말입니다. 이런 성도간에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소그룹 단위로 작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규모가 크고 덩치가 그면 피상적인 만남만 이루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인격이 부디끼며 삶과 삶이 부디끼며 사랑의 교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8-12명 정도의 소그룹 단위로 교회의 조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새 백성교회는 금년 3월부터는 이런 소그룹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이런 조직체로 전환하려 기도하며 준비중에 있습니다. 일주일만에 교회에 왔는데 성도 간의 교제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봉사하며 헌신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리만 채우고 앉아 있다가 교회문을 떠나가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일주일간의 주중의 삶에서도 성도들끼리 규칙적으로 만나는 공동체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그룹은 우리 시대의 요구입니다.

바로 우리 새 백성 교회가 앞으로 이런 교회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타적인 삶의 모습이 몸에 베게 해야합니다. 이웃의 필요를 살피며 필요를 채워주는 관심과 사랑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모습은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이타적이며 이웃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두 팔을 거둬 붙여야 합니다. 아무쪼록 겸손과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원리를 실천하며, 섬기며 낮아지는 삶을 통해서 진정으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영과 영이 통하고 인격과 인격이 대면되는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도록 열심히 노력합시다. 성령안에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통과 교제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교회가 되도록 서로가 사랑으로 감싸 안읍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