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생활 막10:35-45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어느 모임에서 연설이 조금 길어지고 있었다. 앞에서 듣던 낸시 부인이 쪽지에다가 짧게 하라고 쪽지에 써서 비서를 시켜 단상에 올려 놓았다. 그런데 그만 바람에 날려 쪽지가 땅에 떨어졌다. 신문 기자가 주워서 보니까 KISS라고 쓰여있다. 그래서 그 기자는 레이건 대통령부부는 저렇게 나이가 많은데도 참 로맨틱한 부부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 KISS라는 단어는 \'Keep it short, stupid\'이란 약자였다.
말을 길게 한다고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수요일에 전신마비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못하지만 시를 써서 큰 은혜를 끼치는 송명희 자매가 와서 간증을 했다. 그 어머니가 대신 간증을 하고 나중에 본인이 두 마디를 했다. 한 마디는 \'여러분! 예수의 고난의 흔적이 있습니까?\' 다른 한 마디는 \'여러분! 바울의 선교적 고통이 있습니까?\' 젖 먹은 힘을 다해 두 마디를 겨우 했는데 그 날 참석했던 교우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그 때 저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은혜를 끼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영락동산에서도 은혜 받고 간증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강의에서보다도 봉사자들의 순수한 봉사를 통해 감동 받고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이처럼 사랑과 헌신이 담긴 순수한 섬김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를 갖다 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며칠 전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져야 할 고난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무엇인가 마음이 무거웠고 심히 괴로워 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도 아랑곳 없이 그의 수제자격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께 나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엉뚱한 간청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어떤 사람이 찾아와 긴밀하게 그리고 간곡하게 청원을 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러면 말해 보라고 한다. 가능한 들어 줄 수 있는 것이면 들어주겠다고 대답을 하게 된다. 아마 예수님도 그러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간청하는 요구가 너무나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아시고 \'내가 마시는 잔과 세례를 받겠느냐\'고 물으셨다.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요구한 주님이 영광 중에 임하실 때 하나는 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권세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소원은 모든 인간의 욕망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들 자신의 소원과 통하는 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섬김을 받고자 하는 높은 자리를 탐하며 살아간다. 이 성공과 출세의 욕망을 향해 매일매일 땀 흘리며 달려간다.
이 말을 엿들었던 다른 제자들이 분노했다. 마치 서부활극의 한 장면이나 [까라마죠프 형제]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다툼이라도 벌어질 듯하였다. 섬김을 받는 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인간이 유혹 받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이다. 이 욕망 때문에 인간은 온갖 배신과 음모의 칼을 갈며 갖은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게 된다.
이것을 어떤 이는 \'권력에로의 의지\'라고 표현했지만 우리가 역사를 돌아다보면 우리의 역사는 이 \'권력에로의 의지\'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형이 동생을, 동생이 형을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살생의 역사를 거듭해 왔다. 한국에서는 지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선거열풍이 절정에 달하고 있다. 권력 앞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다. 이것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도 이러한 큰 자에 대한 욕망이 없지 않아 있다. 종종 교회의 직분인 장로나 집사도 세상의 어떤 지위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내가 해야 되겠다든가 교파간의 연합사업에서도 회장이 꼭 우리 교파에서 나와야 되겠다는 생각은 결국 큰 자가 되려는 권력에의 의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님은 크리스천의 소원이란 남을 지배하고 남을 다스리고 남을 명령하는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도와 주고 받들어 주며 봉사하는 <섬김의 생활>이라고 말씀하신다.
본문 43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그러나 그 이유를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는 다스리는 자, 지배하는 자, 통치하는 자로 군림하시지 않고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
그는 섬김을 말이나 이론으로 한 것이 아니라 친히 자기 자신의 몸과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섬김의 도>를 본보여 주셨다.
그는 이 섬김, 봉사, 타자를 위한 삶, 이것을 그의 삶의 목표로 삼으셨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소외된 인간들에게 먹여주고 병을 고쳐주며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섬김을 가장 큰 삶의 보람으로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것을 천하게 여긴다. 부끄럽게 생각한다. 업수이 여긴다. 못난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위해 오셨다고 선언한다. 돌이켜 보건대 이 그리스도의 정신은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서마다 그 사회와 그 사회 속의 인간을 변혁시켜 준 새 삶의 원동력이었다.
민주주의니 인도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것도 결국 이러한 그리스도의 정신적 바탕 위에서 싹트고 발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서구사회에서 장관을 영어로 minister라고 부르는데 그 뜻을 살펴보면 \'섬기는 자\'란 뜻이다. 말하자면 기독교 정신에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병자를 돌봐주는 의료사업이나 고아를 돌보는 고아원 사업이나 노년들을 보살펴 주는 양로원사업 등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의 대부분이 기독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참된 만족과 행복은 반드시 많은 것을 소유하고 권력을 얻는데 있지 않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의 말년은 오히려 모두 비참했다. 어떤 실험에서 대학생들에게 한 주간 동안 다른 사람들을 다섯 번 이상 도와주고 와서 그 결과에 대해 보고하게 했다. 그런데 두 가지 결과가 나왔다. 하나는 학생들의 행복감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준 회수와 정비례했다. 즉 많은 이웃을 도와 준 학생의 행복감이 더 높았다. 둘째는 아는 사람보다 낯선 사람을 도와준 경우에 행복감이 더 높았다. 이것은 대단히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마음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의 장기를 주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행복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을 통한 기쁨이요 행복이다.
흔히 현대문화를 3S(speed, sports, sex)로 나타내는데 기독교 신앙도 3S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salvation, 즉 구원의 신앙이 바로 정립되어야 한다. 둘째는 sanctification, 즉 성화의 신앙이다. 이것은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service, 섬김의 신앙이다. 신앙이 어느 정도 자라면 자기 하나만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이웃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해야하는 것이다. 섬기는 것이 시간과 물질과 정력을 소모하고 손해보는 일 같지만 사람은 섬김을 통해 더욱 믿음이 자라고 자기 세계의 울타리가 넓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약아졌다.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이해타산에 빠르다. 조금이라도 손해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스도가 본보여 준 어리석음이나 종의 모습은 전혀 없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아예 멀다. 세상 사람보다 더 섬김을 받기를 좋아하고 큰 자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이것이 곧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부정적인 현대 그리스도인의 상이다. 또한 이것이 지배하고 통치하는 큰 자가 되는 길을 택했지만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실은 지극히 무력하고 생명력이 없는 작은 자가 된 이유이다. 이 점에서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섬김의 삶을 되찾아야 하겠다. 그리고 이 섬김을 통해 얻어지는 참 으뜸이 되는 축복을 계속 누려 나가야겠다.
아마 시대와 장소를 따라 우리의 섬김의 형태는 다소 달라질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해온 자선사업이나 사회사업은 이젠 안 믿는 불신사회나 정부도 열심히 하게 됨으로 교회가 독점해 오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봉사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우리는 다 지적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아는 사실은 이 세상엔 우리가 해야 할 수많은 봉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1. 우리는 \'듣는 귀\'를 가져야 한다. 형제나 이웃이나 지역사회 속에 뛰어 들어가 저들의 요구가 무엇이며 저들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들을 수 있는 청종의 귀를 가져야 한다. 오늘 많은 교회들은 불행하게도 이웃의 고통이나 부르짖음에 대하여 아예 귀를 틀어막고 있다. 이러한 교회가 어찌 참된 봉사를 감당하는 교회가 되겠는가?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밤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
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고 그의 여행코스를 변경시키면서까지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저들의 친구가 된 일이 있다. 이러한 이웃의 아픔과 외침에 청종할 수 있는 사람만이 봉사자가 될 수 있고 그러한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새 질서 속에 참여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11월호 Christianity Today지 표지 인물로 새들백교회 릭 워렌목사를 선정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관해서 묘사하기를 \'just a regular guy who may be America\'s most influential pastor\'라고 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개척교회를 하면서 그는 믿지 않고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need가 무엇인가를 들으려 했기 때문이다.
2. 자기를 낮추는 자만이 참 봉사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상대방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 사람보다 낮아져야 한다. 우리가 낮아지지 않고서는 바른 섬김을 행할 수가 없다. 가난하고 병들고 천대받는 불쌍한 사람들을 봉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 갈 수 있는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러기에 주님은 온갖 종류의 인간을 섬기기 위해 친히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이것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한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에 옮겨 보려는 운동이 역사를 통해 수없이 시도되었다. 그 중 한 예가 19세기 중엽 모리스 등을 위시한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하겠다. 남을 섬기려는 봉사자가 이 겸손의 미덕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 많은 수고와 봉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미국이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많은 원조와 봉사를 하고도 늘 좋은 소리를 못 듣고 비난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물론 많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겸손의 미덕을 잃은 때문이다. 주는 자가 범하기 쉬운 과오가 자기는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받는 자는 저 낮은 장소에 세워 두는 일이다.
즉 상대방을 섬기는 자나 형제로 대하기보다는 자칫하면 값싼 동정의 대상으로 대하기 쉽다. 다시 말해서, 멸시나 천대 또는 2등, 3등 인간으로 취급하는 과오를 범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기독교 신학자들 중에는 구제나 자선이란 용어 그 자체가 받는 자의 인격을 침해하고 주는 자의 겸손을 무디게 하는 좋지 못한 용어라고 혹평하는 분들도 있다.
권투 선수 마호멧 알리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 번은 비행기를 탔는데 그가 seat belt를 매지 않은 것을 보고 스튜어디스가 seat belt를 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수퍼맨은 seat belt가 필요 없는 것을 모르느냐고 교만하게 대답하였다. 그 말은 들은 스튜어디스가 한 마디 했다. 진짜 수퍼맨은 비행기가 필요 없는 것을 모르느냐고. 그래서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사람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
3. 사랑의 마음이다.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기를 낮출만한 겸손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뜨거운 사랑이 없을 때 아름다운 봉사나 섬김은 이뤄지지 않는다. 위대한 봉사의 삶을 살아간 분들의 생애를 검토해 보면 저들에겐 남다른 사랑의 마음이 저들 가슴 속에 불타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저희 교회 금년에 등록하셔서 나오시는 김원석장로님이라고 있다. 포항 근처 흥해라는 곳에서 교회를 섬기시다가 미국에 오셔서 택사스에 사시다가 금년에 저희 교회에 등록하셔 출석하신다. 한번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6.25 동란 전에 섬기시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목사님이 술담배를 했다고 해서 노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본교회에서는 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노회에서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때만해도 한국교회가 술담배에 대해서 아주 엄격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을 제명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 장로님이 그 문제는 저희 교회에 맡겨 주시고 6개월의 기간을 주시면 저희가 해결해 보겠다고 해서 잘 해결이 났다. 돌아와서 장로님들이 의논하기를 그 목사님을 계속 모시는 데는 문제가 있어서 내 보내야 하겠는
데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하다가 그 교회가 국회로 보내기로 결정을 하고 그 지방에서 영향력이 있는 그 교회가 전적으로 밀어서 그 목사님을 국회의원에 당선을 시켰다. 참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 다음으로 오신 목사님이 저희 교회 정계성목사의 할아버지가 되는 정용철목사님이 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분이 시무하는 동안 6.25 동란이 발생했다. 6.25 때 그 동네 12명이 인민군에 붙들려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정목사님도 그 때 붙들렸다. 인민군이 한 사람 한 사람씩 너는 무슨 일을 하는가 묻는다. 어떤 분은 면장을 한다고 자기 직업을 말했다.
그런데 정목사님은 목사라고 했으면 아마 총살당했을 터인데 교역자라고 하니까 교육자라는 말로 생각하고 따로 세우더니 혼자만 살려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총살을 시켰다. 그런데 정목사님이 바다쪽으로 피신해서 가다가 생각하니까 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인민군들이 점령하고 있는 마을로 들어와 교회 청년들을 데리고 함께 피난을 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목사님을 참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12명이 총살을 당했는데 그 중에 한 청년은 총을 맞고 살아났다. 그래서 그 후에 그는 신학을 공부해서 목
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 분의 아들이 김원석장로님의 사위가 되었다고 했다. 그 사위부부는 그 아버지의 부탁으로 특수장애자들을 위한 공부를 하고 지금 저희 교회 소망부에서 섬기고 있다.
얼마나 감동되고 은혜되는 이야기기인가?
John Ruskin이란 사람은 원래 화가였는데 그의 아름다운 화폭 위에 그려지는 그의 손으로 창조되는 창백한 인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동안에 그는 불쌍한 빈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정의감에 북받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운동가가 되고 말았다.
지금부터 약 1세기 전 일이다. 미국 뉴 잉글랜드 어느 지방에는 전쟁에서 두 팔을 잃은 어떤 상이군인 하나가 나룻배를 부려서 간신히 그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팔이 없어서 노를 저을 수가 없으므로 배에다가 발로 움직이는 페달을 장치해서 그 나룻배를 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Robert Fulton이란 사람이 그의 배 젓는 모양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도 러스킨 모양으로 이 가엾은 뱃사공을 동정하고 도와주고 싶은 사랑이 그의 마음 속에 들끓을 때 그 순간 그는 자연의 밑바닥에 앉아서 미래의 증기선을 구상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편리하게 이용하는 인류의 항해술은 풀톤의 사랑의 마음에서 싹텄다. 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은 섬김과 봉사의 원동력이다.
물론 사랑의 언어는 다양하다. 사람마다 사랑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채널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고 표현했는데 상대방은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다. 게리 채프만은 사랑의 5가지 언어를 이렇게 말했다. 하나는 Words of affirmation이다. 이것은 자주 \'I love you\'(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어야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Quality time, 즉 시간을 투자해서 함께 있어줄 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Receiving gifts, 선물을 계속 사 주어야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는 Acts of service, 이것은 설거지를 해준다든가 집안일을 해줄 때 비로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마지막은 Physical touch인데 이것은 안아주거나 신체적 접촉이 있을 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사랑을 받아들이는 채널이 조금 다르다.
4. 힘을 다하는 열심이다.
두 청년이 어느 날 총을 메고 산으로 사냥을 갔다. 산 중에서 길을 헤매다가 다행히 다리 하나를 발견했다. 그 다리는 오래된 썩은 다리였다. 한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강을 건너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성급한 다른 친구는 자기가 먼저 건널게 따라 오라고 말하면서 먼저 건너갔다. 중간쯤 이르렀을 때 그만 다리가 무너져 이 청년은 강의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갔다.
이 물에 빠진 친구는 다른 친구를 향해 사람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한 친구는 그 친구의 비명에 아랑곳 하지도 않고 쳐다만 보고 있더니 갑자기 총을 들어 그 물에 빠진 친구를 향해 조준했다.
물에 빠진 친구는 저 놈이 친구라고 하면서 구조는 커녕 오히려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격분했다. 강변 가까이 이르렀을 때 쏜다 하고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물에 빠진 친구는 분해서 어떻게 해도 살아야 되겠다고 죽을 힘을 다해 겨우 헤엄쳐 나왔다.
그리고 밖에 있던 친구에게 격투를 청했다. 그랬더니 그 밖에 있던 친구가 \'여보게 자네가 급류에 말려 들었을 때 내가 뛰어 들었다면 나도 죽고 자네도 죽었을 거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를 이렇게 총을 쏘면 자네가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 나올 줄 알고 그렇게 했더니 정말 내 생각대로 자네가 힘을 다해 헤엄쳐 나왔네. 그러니 내가 그대의 은인이네.\' 이 말을 듣고서야 그 친구는 \'정말 자네가 내 속에 나도 알 수 없는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네\' 하고 감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총을 겨누었던 친구가 바로 저 유명한 독일의 철혈재상이라고 불리우던 비스마르크였다. 그의 청년시절의 한 에피소드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힘을 다 써보지 못하고 일생을 살아간다. 만약 죽을 힘을 다해 자기 속에 있는 힘을 다 써서 봉사한다면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모두 모세나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봉사자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힘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적은 그릇의 봉사자가 되는 것뿐이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 가운데 [키탄잘리](\'신께 바친다\'는 뜻)란 시가 있다. 그 내용은 어떤 구걸하는 거지가 황금마차를 타고 오는 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흥분한다. 이제 자기의 운명이 달라지리라 큰 기대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 황금마차가 자기 앞에 서고 그 안에서 님이 나타나더니 오히려 \'네가 나를 위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 얼떨떨해진 이 거지는 자기 동냥주머니 속에서 동전하나를 꺼내 그에게 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참 허전했다. 그러나 그 주머니를 들여다보았을 때 그 주머니 안에는 황금동전이 하나 있었다. 그 때 그는 깨닫고 후회한다. 왜 내가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드리지 못했는가?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모두 섬김을 통해 참으로 큰 자로 살아가는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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