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원리

섬김의 원리/요21:15-17

섬김의 원리
요21:15-17





어떤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는 집에 불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창문을 통해서 그 사람을 끌어내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문을 통하여 끌어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너무 크고 무거웠던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제안했습니다. \'그 사람을 깨워보십시오. 그러면 자기 힘으로 밖으로 나갈 겁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깨어나지 못하면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도,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모르는 게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기기 위해서\'라고 막10:45절에서 단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사람이라 불리우는 우리들도 마땅히 주님을 좇아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서, 누구를, 왜,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실천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특별히 누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신앙인들이 가져야할 인생의 지도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부활 후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당신과의 3년을 다 지워버리고 다시 갈릴리 바다 그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수제자 베드로와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누시면서 그에게 최종적으로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목할 것은 우리 개역 성경에는 \'양\'이라는 이 단어가 \'어린 양\'과 \'양\', 두 가지로 구별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세 번 모두 각기 다른 단어로 쓰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15절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실 때 주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아르니온\'인데 이것은 \'이제 막 갓 태어난 양\', 말 그대로 \'어린 양\'을 말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16절에서 \'내 양을 치라\'할 때 사용하신 단어는 \'프로바티온\'인데 이 단어는 \'성장 중에 있는 양\', 다시 말하면 \'청년기에 있는 양\'을 말합니다. 중간 정도의 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7절의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에서 사용하신 단어는 \'프로바톤\'인데 이것은 \'성장이 끝난 양\', \'다 자란 양\'을 말합니다.
그럼 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하시면서 이렇게 다른 단어로 말씀하신 걸까요? 우리는 여기서 섬김에 대한 아주 중요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양이란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이 \'아르니온\'과 \'프로바티온\'과 \'프로바톤\'을 각기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갓 태어난 양을 가리키는 \'아르니온\'은 \'나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청년기에 있는 \'프로바티온\'은 \'나와 수준이 비슷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 자란 \'프로바톤\'은 \'나보다 수준이 훨씬 나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당부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내 기호에 맞는 사람들만을 돌보고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그러니까 천한 사람, 보통 사람, 귀한 사람 그 모두를 하나같이 섬김과 돌봄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사랑하고 존중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내리 깔고 보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하고 비슷한 사람\'은 경쟁 상대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사람끼리 진정으로 사랑하기도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나은 사람\'은 질시의 대상 또는 굴종의 대상으로 여기기가 쉽습니다. 시기 질투를 앞세워 타도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그게 무리다 싶으면 얼른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기 쉽습니다. 이래 저래 우리의 죄에 물든 심성으로는 \'어린 양\'이나 \'자라나는 양\'이나 \'장성한 양\'이나 모두 다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부인할 수 없는 죄성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주께서 아신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자기의 연약함을 깨달은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안되면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섬길 수 없고 돌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 사람, 유다 사람, 사마리아 사람, 땅 끝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변방에 있는 갈릴리 사람들이 볼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입니다. 자기들보다 모든 면에서 나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자칫하면 경원의 대상이나 증오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온갖 기득권을 누리며 수도 서울에서 사는 저들을 동족으로보다는 타도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저들은 같은 동족입니다. 비슷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농사짓고 자기들은 고기 잡는다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마디로 라이벌이 되기 쉬운 관계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갈릴리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짐승처럼 업수히 여겼습니다. 이방 혼혈민족이 된 사마리아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에게서조차도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땅끝 사람,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높은 자든, 낮은 자든, 동류든지 간에 포용하고 사랑하는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덧입게 되면 \'아르디온\'도, \'프로바티온\'도, \'프로바톤\'도 다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에서부터 \'나와 비슷한 사람\' 그리고 \'나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섬기며, 나누며, 돌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섬김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빈민을 위해 사는 사람들 중에는 부자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빈민 운동을 하는 이들은 부자의 벗이 되지 못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온 인류의 칭송을 받는 것은 바로 그 벽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일평생 빈민들의 벗이 되어 자기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경제적으로 월등히 위에 있는 자들도 똑같이 긍휼의 대상으로 여기며 적개심을 품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성직을 갖고 다른 사역에 감당하는 동료들에게도 마음을 열었기에 많은 성직자들이 그곳에 가서 사랑의 실체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거지 나사로처럼 가난한 사람도, 세리장 삭개오처럼 부한 사람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게 바로 위대한 겁니다.
목회를 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모든 인간의 현실은 오십보 백보\'라는 겁니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의 아픔이 있고, 잘사는 자는 잘 사는 자대로의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중증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송명희 시인은 \'나\'라는 노래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목회자들 중에도 운동권 성향을 가진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옳다 그르다, 잘한다 못한다가 아니라 그들의 약점 중에 하나가 \'어린 양\'은 잘 섬기는데 \'자란 양\'은 잘 못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한계적 상황에 고민하다가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목회궤도를 수정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주님은 \'어린 양\'만 먹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란 양\'만 먹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양들을 다 먹이고 치라 하십니다. 저들 모두를 섬김과 돌봄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 목회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겠습니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섬김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선교요 증거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는 걸까요? 구체적인 섬김의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한 여론 조사기관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 중 53.1%가 \'자신은 비종교인\'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절반 이상이 자기는 종교가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뜻밖의 설문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각 종교단체의 보고를 받아 집계해서 발표하는 문체부의 통계발표에 따르면 굉장히 많은 종교인이 있는 것 같았는데 설문결과는 다르게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인들이 우리 나라의 종교 실태에 대해 질문할 때 \'비종교인이 53.1%\'라고 대답하면 \'비종교인의 비율이 그렇게 높느냐\'며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인이 90%가 넘고, 이슬람교인이 90%가 넘고, 불교인이 90%가 넘는 나라가 허다합니다. 이 지구상에 국민의 절반 이상이 비종교인인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건 상당히 심각한 얘기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53.1%의 국민들은 법망을 피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절반이 넘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 나라가 종교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위기상황에 놓여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 53.1%의 비종교인 중에 49.7%는 \'이전에 종교를 가진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73%는 \'과거에 개신교 신자였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계산이 나옵니다. 전국민의 53.1%*49.7%*73%=19.3%... 그러니까 전 국민의 19.3%가 개신교에 한때 발을 들여놓았으나 개신교에 실망하고 다시 비종교인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숫자로 치면 580만명입니다. 현재 개신교인의 수를 1000만으로 잡을 때 그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음의 설문결과입니다. 그 비종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앞으로 종교를 택한다면 어느 종교를 택하시겠습니까?...\' 응답은 이렇게 나왔습니다. 불교 40%, 천주교 37%, 개신교 22%... 한국의 3대 종교 중 개신교가 가장 인기 없는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섬김과 사랑의 부재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말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보여주신 섬김과 사랑의 실천은 어떤 것이었나요? 오늘 본문인 요21장에서 그 사랑의 실체를 함께 찾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요21장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1절에 보면 주님께서 디베랴 바다로 돌아가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당신을 등진 저들을 주님은 친히 찾아가셨습니다. 비난하기 위해서도, 질책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찾아가 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이 찾아오심은 부활 후 세 번째 찾아오심이었다고 했습니다. 거듭 거듭 주님은 당신께 등돌린 저들, 외면한 저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축복하시며 가라앉은 저들의 기분을 당신의 영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찾아가 만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시선의 부딪침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PC 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해 온라인상의 만남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다툼과 싸움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화로만 주고받다가 오해하는 경우도 많고, 글로만 주고 받다가 피차에 상처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만남이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서로가 얼굴을 맛대고 서로의 눈을 쳐다보는 그런 관계라야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6년 전 프랑스 빠리에 갔을 때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본적이 있습니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명화입니다. 가이드는 세로 80센티, 가로 50센티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그 그림이 명화인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가로 세로 비율이 가장 이상적인 황금비율\'이라든지, \'최초로 분명한 원근법이 사용되어 입체감이 분명하다\'든지 하는 전문적인 회화기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그림이 명화 중의 명화인 것은 \'눈을 어느 각도에서 쳐다보더라도 보는 이와 시선이 맞부딪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나리자\'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명작인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정말 그런가 아닌가 시험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습니다. 오른 쪽에서 봐도, 왼쪽에서 봐도, 아래에서 쳐다봐도, 가까이 다가서서 봐도, 심지어 걸어가면서 봐도 정말 시선이 맞부딪쳤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눈\' 같았습니다.
그것을 경험하고 나니 왜 그 그림을 세계 최고의 명화라고 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많고 많은 명화들 중에 그 그림만 방탄유리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레오날도 다빈치가 67세에 죽기까지 그 그림만은 자기 옆에 걸어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열 번 이상 시체를 해부하면서 특히 얼굴을 세심하게 관찰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랑은 시선을 맞추는 것입니다. 아무리 안좋은 관계라도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그 감정이 곧 풀립니다. 눈을 맞추지 않는 건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을 내리깔거나 딴 곳을 보는 것은 그 마음에 사랑 대신 미움이 차있다는 증거입니다. 서로의 시선이 오고갈 때 거기서 사랑의 열매는 영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 후 현관에서의 만남을 중시합니다. 불과 몇 초만의 짧은 만남이지만 그 만남을 통해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반갑게 다가와 밝은 얼굴로 인사하는 분도 있고 슬며시 옆으로 빠져나가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한 걸음 다가서서 시선을 맞추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향해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섬김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말을 먼저 건네는 것\'입니다. 4-5절 말씀을 보면 날이 새어 갈 때에 주님은 저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참으로 주님의 사랑은 넓고도 깊습니다. 제자들은 세 번씩이나 자신들을 찾아온 주님을 알아보질 못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도록 저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서운한 마음이 왜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주님은 말을 건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렇게 사랑은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불필요한 오해들이 쌓여가기도 하고 나중에는 치유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사실 사랑은 아주 작은 겁니다. 사랑은 말을 걸어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웃과 말을 주고받으십니까? 얼마나 사랑의 시선을 보내십니까? 행여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심하고 무뚝뚝한 모습으로 그렇게 스쳐 지나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때로 눈길을 주지 않고 말도 건네지 않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서 서운한 것만을 보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3장에서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여기 \'바란다\'는 헬라어 \'엘피조\'는 \'상대방에게 있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해서 그 아름다움이 그의 참모습이기를 바란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실 때 무엇보다도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저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랬기에 서운함에 돌아서지 아니하고 저들에게 더 가까이 가서 친밀하게 말을 건네셨던 것입니다.
주님처럼 말을 먼저 건네시기 바랍니다. 먼저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작은데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밤새 허탕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조반을 마련해서 먹게 하십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가난한 갈릴리의 어부들의 현실과 처지를 주님은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이렇게 사랑은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누가 이웃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까?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마11장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하셨고, 마5장에서는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여기 \'온유\'란 말은 헬라어로 \'프라우테스\'인데 이건 야생동물에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거친 성품을 가진 야생마가 조련사의 조련을 받으면 그 품성을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주인을 위해 쓰게 됩니다. 이게 바로 \'프라우테스\'입니다. 그러니까 \'온유\'란 내게 있는 기질과 성격을 나의 감정대로 쓰지 않고 주님의 말씀 따라서 쓰는 겁니다. 이럴 때 남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알게되고 남의 필요를 채워줄 줄 알게 됩니다. 온유치 못하면 필요를 채워주는 게 아니라 상처만을 주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온유(溫柔)\'란 무엇보다도 \'생명의 등가성\'을 깨달을 때 채워지는 성품입니다. 생명의 등가성이란 \'저 사람의 생명과 내 생명의 가치가 동일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남의 아픔과 불편을 내 것처럼 여길 때만이 우리가 온유할 수 있고 남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겁니다. 지난 금요일 우리는 \'환우들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 시간 거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생명의 등가성\'이었습니다. 형제의 고통이 내 고통으로, 형제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느껴지는 그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마음에 가득했던 \'연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등가성\'에 무감각해지면 남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게 됩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 이건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됩니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내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내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남이 나에게 채워주는 도움만 받고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물질로만 남의 필요를 채워주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손도 없고 발도 없는 자가 석가모니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무엇으로 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석가모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얼굴로 하거라. 얼굴로도 얼마든지 남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느니라...\' 우리의 밝은 얼굴 표정 하나가, 따스한 미소 하나가, 진실된 인사 한 마디가 참으로 상대방에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 기독교 여류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가 척추 질병으로 인해서 병원에 수년간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미우라는 병실의 환자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래, 그리스도인은 이런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기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래서 그녀가 병원에 있는 동안 한번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고 간호사가 오면 더 부드럽게 웃었고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다. 나는 주님이 말씀하신 섬김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습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 나와 \'같은\'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나누고 돌보고 섬기는 사랑의 삶을 살아왔습니까?... 전도가 안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섬김의 원리가 일상 속에 작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갈릴리에만 머물 뿐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을 향해 문을 열고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추상적이고 공허한 신앙생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섬김의 원리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찾아가십시다. 먼저 말을 건네십시다. 하나님이 내게 것으로 이웃과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십시다. 초대교회는 그러한 섬김의 원리를 쫓는 순종의 사람들로 인해서 부흥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자기 안에 말려들어 숨고, 입떼기를 두려워하고, 손을 오그라뜨리고 인색했던 자기 세계를 깨뜨리고 주님이 본보이신 섬김의 원리를 따라 찾아가고 말을 건네고 필요를 채워주는 섬김의 삶을 사십시다. 거기서 우리는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신앙의 희열과 보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생명 있을 동안에 주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원리를 따라 보람된 선교와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