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 계신 예수 눅2:40-52
우리 주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성경은 침묵(沈默)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스마트(James Smart)라는 사람이 오래 전에 「성경의 이상한 침묵(The starange silence of the Bible)」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물론 이 책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책은 아닙니다. 올바른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지 않으면 성경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책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 자꾸 그 책의 제목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그 시절에 인도에 가서 석가모니를 만났다는 얘기를 책으로 쓴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러시아에 갔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주장들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라고 보겠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일까요?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마태도, 요한은 예수님이 30세가 되어 공생애(公生涯, public life)를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기록이 없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오히려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안 다음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아서 누가복음을 기록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예수님을 알았던 흔적은 있습니다만, 그도 역시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우리의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집(全集, Collection)이 아니라 선집(選集, Selection)입니다.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들은 그것이 아무리 신통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정경(正經, Canon) 형성 과정에서 모두 배제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누가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말씀으로 유일(唯一)한 말씀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40절 말씀은 아기의 성장 과정에 대한 말씀이고, 41절부터 말씀은 예수님이 12살 때 있었던 한토막 이야기(incident)입니다. 그리고는 누가 역시 예수님이 30세가 되기까지 18년 간의 생활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자라면서 강해졌다(grew and became strong)고 했습니다. 정상적인 아기라면 모두 자라면서 강해집니다. 예수님도 육체적으로(physically)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들처럼 자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혜가 충족했다(was filled with wisdom)”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정신적으로 발달해가는 단계가 있습니다. 아동학(Child Education)이나 발달 심리학(Development Psychology)에서 이런 것을 연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성장해 가면서 보통 아이들과 달리 신통한 아이로 자랐다기 보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로 자랐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깨우칠 때 가서 깨우치고, 알아야 할 때 가서 아는 아이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영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도 잘 성장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기 아이의 신체적 발달이 잘 되지 않으면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밥만 잘 안먹어도 걱정이 많아요. 아이가 밥을 잘 안 먹으니까 엄마가 밥을 숟가락에 들고 따라다니면서 먹이데요. 재미있게 노는데 엄마가 숟가락에 밥을 들고 따라다니면서 하도 귀찮게 하니까 아이가 간혹 한번씩 먹어줍니다. 그리고 자기 아이가 제대로 뭘 알 때가 되면 알아야 하고, 깨우칠 때가 되면 깨우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또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여기까지 자기 아이의 성장에 대하여 관심을 갖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看過)합니다. 똑똑한 부모라도 자기 아이의 신앙 발달에 대하여는 거의 무지(無知)합니다. 아이가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는 노래나 좀하고, 성경 이야기나 좀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모들이 별로 걱정을 안합니다. 커서 예수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신앙도 아주 어려서부터 생기고 발달한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입니다. 로렌스 콜버그(Lawrence Kohlberg)는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도덕적 인식이 발달해 나가는지를 연구했고, 로날드 골드만(Ronald Goldman)이라는 사람은 아이들의 종교적인 사고가 어떻게 발달하는지를 연구했고, 잔 피아제(Jean Piaget)는 어린 아이들의 인식론적인 발달(Cognitive Development)을 연구했습니다. 최근에 제임스 파울러(James W. Fowler)라는 사람은 이런 이론들을 근거로해서 인간의 신앙 발달 단계(Stages of Faith)를 연구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이런 내용들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린 아이의 교육이 그렇지만 아이의 신앙 발달도 자기 부모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부모에게서 경건한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영향을 영향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도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습니만, 어머니의 역할이 항상 중요합니다. 성경에도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어떻게 길렀을까 하는 것을 짐잠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 밤중에 목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습니다(But Mary treasured up all these things and pondered them in her heart. 누가복음2:19).” 그리고 오늘 본문 51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But his mother treasured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영어 성경에 보면 “but” 이라는 전치사를 썼습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그렇게 생각됩니다. 목자가 찾아 온 것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잘 순종하면서 자란 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벌로 보고 그냥 지나쳤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나는 일들 하나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깊이 생각했습니다. 마음에 담아 두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느냐 하는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특히 우리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어떻게 자라느냐 하는 문제, 우리 자녀들이 영적으로 어떻게 성장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일차적인 책임은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혹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혹은 영적으로) 고루 고루 잘 성장하셨습니다. 12살 이후의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 52절이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자녀들의 신체적 발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자녀들의 정신적인 발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자녀들의 신앙 발달에 대하여, 내 자녀들이 영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는지 큰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마리아와 요셉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41-4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 갔다가……” “전례를 좇아” 라는 말은 영어로는 “according to the custom” 이란 말입니다. 한자로는 “앞 전(前) 자” “법식 예(例) 자” 를 씁니다. “앞에서 하던 식대로”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보면 모든 남자들은 적어도 일년에 3번 씩은,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도록 규정했습니다(신명기 16:16).” 13살이면 성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12살이었으니까 이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데려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요즘 말로 “Sunday Christian”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이 영어 사전에도 나와요. 얼마나 이 시대에 “Sunday Christian”이 많으면 이 말이 영어 사전에까지 나오겠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형식적인 신앙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에서 정해 놓은대로 모든 율법의 규정들을 성실하게 지키는 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부모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요셉 가족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그만 잃어 버린 것입니다. 어저께 저녁에 저희 딸이 성경을 읽으면서 저에게 물어봐요. 누가복음 8:20에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이 말을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Jesus’ brothers라는 말이 나오는데 brothers라는 말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상하지 않다고 예수님에게 brother가 많이 있었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정말이냐고요. 그래서 내친 김에 더 놀라게 해 주려고 예수님에게 sisters도 있었다고 했더니 “Really? Really” 하면서 놀라 까무러쳤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이 외아들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도 “독생자(獨生子, only begotten Son)” 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정말 그래요. 예수님에게는 형제들도 많이 있었고, 여동생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집에가서 마태복음 13:55-56을 보세요. 요셉과 마리아가 이 아이들을 다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당시 풍습에 보면 대개 가족이 짐을 가지고 움직일 때는 걸음이 느린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처진 사람이 없도록 남자들이 뒤에서 따라 갔답니다. 요셉 가족도 그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요셉과 같이 오겠거니 했고, 요셉은 예수님이 마리아와 같이 있겠거니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미루다가 나중에 예수가 정말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사흘 만에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그 당시에 유월절 같은 큰 명절이 되면 유명한 랍비들이 순례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였다고 합니다. 순례자들을 그런 기회에 랍비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주로 이런 일들이 성전 마당(temple court)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성경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 교육을 받았다고 했는데, 바울 역시 성전 마당에서 가말리엘에게 율법을 배웠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주로 랍비에게 듣고, 또 묻기도 하고, 때로는 토론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주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하는 율법의 해석에 대한 문제들이 아니었을까요? 예를 들면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괜찮습니까? 이런 문제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결예식(淨潔禮式, ceremonial cleansing)에 대한 랍비의 강의나 이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을 것이고, 랍비의 해석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교수들도 학생이 질문하는 내용을 봐서 그 학생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질문도 잘 준비해서 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괜히 질문했다가 무식이 탄로나는 것입니다. 요즘 컴퓨터에 대한 지식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용하다가 보면 여전히 모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좀 잘하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무식이 탄로날 때가 있습니다. 주로 어른들에게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요. 어른들이 컴퓨터에 대해서 질문을 하거나 말하는 것을 보면 아주 무식한 말들이 많습니다. 컴퓨터 용어도 잘 모르고 개념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46-47절 말씀,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 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제 12살 된 예수가 저명한 랍비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 중에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이 말 때문에 예수님은 앉아서 가르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 틈에 앉아서 랍비들의 말을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listening and asking)” 했던 것입니다. 질문하는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에 대해 주석 책을 읽다가 보니까 예수님의 질문을 “probing questions” 라는 말을 썼더라고요. 그런데 이 “probe” 라는 말이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 말이 원래 파생된 것은 라틴어 “probare”라는 말에서 왔는데 “테스트를 한다” 혹은 “조사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의학에서나 또 실험하는 사람들이 무슨 물체를 조사하려고 그 안에 집어 넣은 기구(divice) 같은 것도 probe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주석책을 쓰신 분이 아주 적합한 말을 사용했다고 보겠습니다.
앞에 앉아서 랍비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도 학생들을 가르쳐 보기도 하고, 설교 단에 서서 교우들을 대하기도 하는데, 경청하는 사람은 눈에 금방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간혹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이 장난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듣는 랍비들이 당황할 질문들입니다. 그 질문이 황당해서도 아니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어서도 아닙니다.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들, 아직까지 유명한 랍비들도 보지 못했던 것들, 오히려 그의 질문을 들으면서 랍비들이 자신들의 무지와 그리고 허위의식들이 폭로되는 그런 질문들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라는 독일의 화가가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판화 작가입니다. 그가 그린 유명한 그림 중에「기도하는 손」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뒤러가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랍비들의 얼굴 표정을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표정은 어떻습니까? 또 성경 삽화가로 유명한 구스타프 도레(Gustave Dore)도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랍비들의 표정을 보십시오.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마리아가 가까스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예수님의 자기 발견(self-awaremenss)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 이미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자기 생의 사명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 때부터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준비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50절에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성전에 계신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earthly father)와 하늘의 부모(heavenly father)를 구별해서 불렀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그 뜻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예수님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미처 그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는 더더구나 몰랐을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다시 18년간 나사렛으로 가서 요셉과 마리아의 양육을 받습니다. 목수의 아들로서 그는 성장했습니다. 어쩌면 요셉이 일찍 죽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받들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훗날 그의 말씀처럼,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자기 발견의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7-9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생의 사명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자기를 발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발견하십시오. 이 일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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