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이야기 (1) 마24:1-2
예수님은 부드럽고 위로에 가득 찬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폭탄선언도 많이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는 폭탄선언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죽임을 당할 만큼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마태복음 24장 1,2절도 폭탄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 제자들이 성전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자랑거리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께 자랑하여 보여드렸는데 예수님이 폭탄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대해서 칭찬의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모독입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가장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주님의 저주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는 폭탄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존심 성전
성전이라 하면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의 성전이 있습니다. 이 성전은 어마어마한 건축물로 자랑할만합니다. 성경에서 성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은 그 건축현황이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은 건축현황과 건축과정이 소개가 되고 봉헌식까지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성전을 보면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전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나무를 레바논 백향목으로 지었는데 기록에 보면 레바논 백향목을 벌목할 때 동원되었던 군인들이 3만명입니다. 돌을 채석하는 채석공이 8만명입니다. 현장인부가 7만명입니다. 각 곳에서 감독하는 공사감독관이 3천3백명입니다. 건축기간이 무려 7년으로 종사 인원만 해도 18만3천3백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규모는 한 곳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20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은 46년 동안에 건축한 건물로 소개가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도 훨씬 웅대하고 장엄하다 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46년 동안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유대인들은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깁니다.
그런 성전을 두고 예수님은 돌 하나도 그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저주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성전이 주후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불타 버렸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이라는 것은 그 성전 벽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 터의 서쪽에 있는 벽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전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최초의 성전이야기는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솔로몬은 7년에 걸쳐서 국력을 총동원하여 성전을 지었습니다. 봉헌하는 그날의 봉헌기도가 있고 봉헌설교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은 봉헌기도를 길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까\\\"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실 수 없는데 온 우주의 충만하신 주 여호와를 내가 건축한 전 안에 어떻게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이 성전에 거하시기로 약속하셔서 우리가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 성전 안에 계시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봉헌사를 이렇게 했습니다.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 백성들아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화합을 하고 그의 법도와 계명을 지키자\\\"고 합니다.
그러나 성전이야기는 건물이야기로 끝나는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이야기를 아주 깊이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살펴보면 성전 이야기가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이야기와 사도 바울이 가르쳐준 성전이야기를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성전관
예수님은 성전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는데 그 중에서 가장 깊은 진리를 나타내주신 이야기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나옵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 놀라운 성전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인은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라 하였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전이 없기 때문에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산에서 예배드리라 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 앞에서 아주 흥미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여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곧 이 때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라. 그러므로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성전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 말은 두 가지 성전을 말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권리가 박탈당했기 때문에 그리심산에 성전을 만들어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독점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두 가지를 다 부정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지 말라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예배 터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심산의 성전 터도 예배의 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 중에서 이런 진리를 표현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말고 산에도 가지 말고 아버지께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양이나 염소나 재물을 가지고 예배하러 가지 말고 이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예배하라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한 가지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예배하지 말고 산에서도 예배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다른 장소를 말씀하셔야 되는데 주님은 예배하는 장소를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자여, 아버지께 예배하라.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그 말씀을 할 때 여자가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메시야 그리스도라 하는 그 분이 이 땅에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그러니까 이 여인도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대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면 우리가 그 메시야께 경배를 드릴 것이라는 말을 할 때 주님은 \\\"여자여, 내가 바로 그 메시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친 이 말씀 안에 예배의 장소가 계시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닙니다. 그리심산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바로 예배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메시야와 함께 있는 이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깊은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수가성 여인과 말씀한 대화 속에 다 나타났습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예배장소로서 벌써 불합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거부해 버렸습니다. 그 성전 안에는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성전예배는 이미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의 그리심산의 예배도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니라. 신령과 진리로 하는 것이니라. 메시야를 모신 그 자리가 바로 예배하는 자리라고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성전관
여러분, 이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새김질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3장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말씀을 사도 바울이 뒷받침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한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성전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믿게 하는 데에 설교의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세운 이후에는 하나님의 성전개념이 예수님께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 각자에게로 이 의미가 발전되고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을 추가로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내가 곧 성전이요 내가 곧 메시야 라는 메시지인데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이미 자기 백성을 믿게 하셨고 예수를 믿은 그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라는 것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표어를 하나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움직이는 성전이다.\\\"
이게 참 놀라운 개념입니다. 성도들은 단순히 예수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에 가시면 성전이 직장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장에 가시면 성전이 시장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가면 여행간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성전이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너희 안에 성전이 되는 요건은 성령이 거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 되는 요건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 처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이렇게 우리 성도들 각자가 성전이라는 개념으로 옮겨옵니다. 성전이야기의 결론은 내가 곧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법궤의 의미
그러면 이제 성전 안으로 여행을 좀 해 봅시다. 성전 안을 여행해보면 성전에 필수 성물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즉 법궤와 금촛대와 분향단과 진설병입니다. 성전이 되려면 이 네 가지 성물이 있어야 됩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성전으로서 성립이 안됩니다.
첫번째 요소가 법궤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제일먼저 했던 일은 법궤를 모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 가장 중요한 성물은 법궤입니다. 이 언약궤가 있음으로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법궤의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이 있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물건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가리켜서 언약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담겨있는 그 궤가 성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궤가 없으면 성전이 되지 않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왜 불탔느냐 하면 언약궤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법궤 자체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버린 것입니다.
성도는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성전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법궤가 없는 성전처럼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법궤의 역할을 해야합니다. 이 법궤의 의미가 없어지면 성전이 불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유대인 안식일 예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세 시간 예배를 드리는 중에 두 시간쯤 지나고 나면 안식일 예배의 하이라이트 순서가 있습니다. 열 살쯤 된 아이가 율법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어깨에 매고 회중석을 순회합니다. 순회를 할 때 교인들은 그 두루마리에 손을 대고는 입에다가 갖다댑니다. 그 율법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만져서 입에 댐으로서 그 말씀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그래서 과연 성경이 내 마음속에 들어옵니까? 성경이 그렇게 해서 영원히 양식이 될까요? 유대인들은 지금도 율법을 그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라마불교 사원 옆에는 마니퇴 라고 하는 금속으로 만든 통이 있답니다. 몽고에 있는 라마불교 사원 옆에는 그런 통을 육십 여섯 개를 만들어 놓았답니다. 육십 여섯 개의 라마경전 통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불교경전을 넣어 놓고는 순례객들이 그 통을 한바퀴 돌리면 그 경전을 일독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읽기 위해서 육십여섯 개의 통을 돌리면서 순회하는 순례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광적인 순례객은 자기가 좋아하는 경전 앞에 가서 수십바퀴 돌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경읽기를 그렇게 한번 해볼까요? 여러분,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다니는 성전이라고 하나님이 여기십니다. 나는 더러운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에 움직이는 성전으로 보십니다. 이 성전의 첫번째 요건은 언약의 말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는 인격은 성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떻게 하든 성경말씀을 가까이 해야 되고 친해져야 됩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예배 중에 설교를 통해서 듣습니다.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 안에 법궤를 단장하는 것입니다. 법궤를 모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들어야 법궤가 우리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제가 이런 당부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한글을 읽을 줄 아시거든 최소한 하루에 십분이라도 말씀 안에서 정지하십시오. 이 말씀을 십분 동안 읽으면 두 장은 읽습니다. 이건 최소한입니다. 좀 믿음으로 살려거든 삼십 분 이상 말씀을 펼쳐놓고 나 자신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있는 감동적인 구절을 붙잡고 기도하시고 그렇게 하루를 사십시오. 이것을 매일 매일 하셔야 됩니다. 교회 직분을 받은 이후에 내가 성경을 일 독도 안했다면 그 사람의 법궤는 지금 심각한 파괴현상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학생들 앞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신학생들이 공부 때문에 힘듭니다. 교수님들이 과제물을 많이 줍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신학을 졸업하는 삼 년 동안에 성경을 십 독 이상은 하고 졸업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꼭 십 독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책 덮어놓고도 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다 넣어야 된다. 아브라함 이야기면 성경을 안보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대략 엮어갈 수 있어야 할 정도로 성경을 많이 읽고 졸업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학생들이 과제물도 못해서 유급도 당하는데 어떻게 성경을 그렇게 읽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님, 비법이 뭡니까? 잠만 한 시간 덜자면 됩니다. 잠을 한 시간 덜 자고라도 성경책을 읽어야 삼 년 동안에 이 내용을 대략 머릿속에 새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 하나 제안해 드립니다. TV 연속극 하나만 포기하면 됩니다. 두 개 보는 분, 한 개 포기하세요. 그리고 그 시간에 성경을 펼쳐들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세 개 보시는 분, 하나 포기하세요.
말씀이 묻어나오는 삶
여러분, 오늘 우리 법궤가 심각한 자리에 훼손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말씀이 묻어나오질 않습니다. 속의 법궤가 지금 상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망가지면 성전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말과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묻어 나와야 됩니다. 글을 한편 쓰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묻어 나오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법궤가 살아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대화해 보면 저 사람 법궤가 지금 훼손되어 있구나 당장 판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되고 읽혀져야 되고 이 말씀 앞에 우리가 정지하고 무릎꿇는 시간이 매일 있어야 합니다.
리처드 백스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에게 밥상을 차려 주면서 본인이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남에게 전도는 잘하면서도 자기 영혼은 굶어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섬기면서도 그의 영적 상태는 지금 굶어 죽어 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죄와 벌」을 썼던 도스도예프스키 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죄와 벌을 읽어보면 성경에 있는 어떤 한 스토리 같습니다. 내가 지금 성경을 읽고 있나 소설을 읽고 있나 할만큼 성경이 묻어 나오는 대목이 많기 때문에 그 소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도스도예프스키 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소설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의 향기를 풍길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행적을 보니까 그는 스물 여덟살에 사상범으로 어떤 진보단체에 가입했다 해서 그 죄를 뒤집어쓰고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드디어 여러 죄수들과 함께 사형을 받는데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남기라고 하였지만 도스도예프스키는 스물 여덞 살에 죽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여 할 말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순서가 지나가기 전에 놀라운 황제의 특사령이 통보되어 그때의 사람들이 다 죽음을 면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배를 가는 길에 누가 주었는지 모르지만 도스도예프스키의 손에 성경이 한 권 잡혔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죽음의 세월을 보내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사상과 모든 삶의 전부가 성경의 깊은 바다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죄와 벌이라는 아름다운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성경이 거짓임을 내게 증명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사람 말보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겠다.\\\"
맺는 말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묻어 나옵니다. 우리가 걸어다니는 성전입니다. 이 성전이 하나님의 말씀의 향기가 묻어 나와야 됩니다. 우리의 말과 행위 속에 그리고 삶 속에서 법궤가 살아있는 역할을 해야 됩니다. 이 법궤가 죽어버리면 성전은 불탑니다. 우리 안에 성전이 유지되려면 법궤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의 감동을 붙잡고 일하십시오. 내가 성전이 되기 위해서 법궤를 관리해야 합니다. 이 법궤가 빼앗겨 버리면 성전이 되지 못합니다. 이 법궤가 훼손되면 성전이 심판을 받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법궤를 관리해볼 시기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법궤를 관리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이 우리의 삶에 살아 있는 성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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