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깨끗히

성전을 깨끗이/사56:68, 마21:12-17

성전을 깨끗이
사56:68, 마21:12-17





예수께서 수난 당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처음 하신 일은 우리가 아까 읽은 마태복음 21장의 말씀 성전의 잡상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성전 대 청소를 단행한 사건입니다. 성전이라 함은 눈에 보이는 것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성 어거스틴이 `Visible Church, Invisible Church, 보이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늘에 있는 교회다` 고 플라톤의 철학적 이론을 도입하여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교회가 예루살렘의 성전이라 한다면,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성전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결하면서 세 가지 성전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마태복음 21장12절 이하의 말씀에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가셔서, 재물을 팔고, 환전을 하고 비둘기도 파는 상인들의 상을 뒤엎고 내쫓으시며 이사야에 기록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울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과연 누구 이길래 감히 성전 일에 간섭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 성전에는 유대교의 대 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어서, 유대교의 중심인 이 성전을 책임 있게 관리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권리로써 예수가 성전에서 이렇게 행동을 했을까?

필경 이 사건은 예수의 예언자적이고 메시아 적인 사상과 행동이 깃들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고 생각합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순수한 신앙적인 기능을 이미 상실한 지 오래 된 것입니다. 상인들은 성전안 뜰에서 재물을 거래하고 환전을 함으로 인하여 성전 뜰 밖보다 더 값비싸게 팔아먹고, 그 이익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제사장에게 바치고, 제사장은 대 제사장에게 ,대 제사장은 총독에게 바치는 이러한 구조적인 악이 그 때에 나타난 현실입니다.

예수는 이 구조적인 악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뇌물을 바치며 형식적인 제사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온갖 복합적인 인간들의 죄를 나타내는 사건을 예의 주시하고, 사람들이 알아도 항거할 수 없는 이 막강한 정치적, 종교적 불의에 대하여 도전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의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않는 한 유대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이 성전을 깨끗이 한 이 행동은 그를 미워하고 모함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를 죽일 수 있는 좋은 빌미를 찾는 기회도 되었을 것입니다.

제도적 교회라는 것은 그 권력이 막강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그냥 교인으로서 교회에 출석하시면 그 교권이 얼마나 막강한 가를 잘 모르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교단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의 권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보면 금권과 정권과 짝짓기를 하고, 협력하여 교권의 이익을 챙기고 제도적인 교회의 권위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희생시키는 역사의 피비린내 나는 그런 전철을 밟아 왔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16세기는 중세기 교회가 교황 절대주의, 성직매매, 속죄권 판매로 인해 크게 부패하여 있을 때 독일에서는 마틴 루터가 프랑스에서는 존 칼빈이 반기를 들고, 성서중심주의 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자 카톨릭교회는 그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목숨가지 빼앗을 계략을 꾸몄습니다.

이에 마틴 루터는 영국의 성공회에 들어와서 숨고, 존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했습니다.

18세시 존 웨슬리도 영국교회가 생명을 잃었을 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외쳐 파면 당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도 교직도 빼앗기고만 웨슬리는 들판에서 시장바닥에서 외치게 되어 버렸습니다.

나 자신도75년에 교권주의가 극도로 부패하여 타락한 감리교회의 갱신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약 5년 동안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려 노력하는데 그 일을 통하여 온갖 비난과 모욕과 회의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예수 당시나 지금이나 제도적인 교회라는 것은 다른 모든 사회제도처럼 부패하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 때 희생을 무릎 쓰고 개혁하고 갱신해서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미래 세계를 위한 새로운 종교로 탈바꿈하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에크레시아 레포르문다 센페로`

이 말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교회는 항상 새로워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종교라 하는 것은 인간의 삶의 정신적인 근거이므로, 이 근거가 잘못되게 되면 인간과 인간 사회를 망쳐버리고 말게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예루살렘을 청소함으로, 교회를 청소함으로서, 유대교를 새롭게 하려고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할 뿐만 아니고 요한복음 2장19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46년에 걸쳐 세워진 예루살렘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재건축할 수 있다는 물리적인 표현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고난 받으시고 죽었다가 사흘후에 부활하신다는 은유라고 학자들은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예수 자신이 성전과 같이 귀한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6장6절 이하에 보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나가다가 배고픔에 못 견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자, 이를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비방을 했습니다. 안식일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안식일에 제사장이 성전에서 죄를 범하게 된다면 율법적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성전보다 더 큰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자신을 성전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성전이라 함은 그 건축이 46년이 걸린 예루살렘성전이나 200년이 걸린 노뜨르담 대성당이나 250년 걸린 밀라노 대성당이나 100년을 짓고도 아직도 몇 백년이 더 걸릴지 모르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성 가족대성당에 해당되는 말만은 아닙니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교회는 5000명,10000명수용 가능한 교회를 2,3년에 뚝딱 지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성전에 속하는 교회는 아마 하나도 없을 지도 모릅니다. 성전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의 상징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삶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날마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표현하여도 조금도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인류 구원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완전히 비우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성전의 잡상인과 제사장들과는 달리 인간의 모든 욕망과 유혹을 떨쳐 버리고 오직 하나님 뜻만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 지식 신앙 사랑 모두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고 자기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알게되었고 믿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은 예수와 한 분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고 사시고 희생당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자기의 모든 인간적인 것을 희생시키므로서 그리스도가 되었다. 예수는 자기의 모든 인간적인 욕망 자기의 자존심 위신, 욕구, 모두 다 바침으로서 결국 그리스도로 승화되었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에 교회 마당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공손히 절을 하면서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죄송하여 이러시지 말라고 말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가만히 놓아두어라 내가 하고싶어 하는 것이다.

나는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있는 곳에 항상 함께 있다.

예수께서는 곧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이고, 예수의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4장16절,17절에서 말하기를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성전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 말했습니다 .

또 고린도 후서 6장16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서 걸어 다니시며 그는 우리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고 바울은 말하면서 모든 죄의 사슬에서 풀려 나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 바울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실로,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최고의 특권을 주는 반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모습을 따라서 만드시고 코에 생명을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과 영혼 속에 이미 들어오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반역하고 우리의 뜻대로 방황함으로 인하여 길을 잃은 양처럼 죽음의 골짜기를 헤메일 때 그리스도의 자기 부정과 희생으로 통하여 다시금 새로운 존재 곧 하나님의 모습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우리의 신앙적 행동과 결단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우리 마음 속에 잡다한 생각과 욕망과 유혹을 몰아내고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뜻을 묻고 대화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하는 일 의로운 일 평화를 위한 일에 참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20-21절에서`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가 그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건물전체가 서로 연결되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이 말씀은 크리스찬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인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 전체가 또한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면서 그것은 생명의 유기체이기 때문에 점점 자라고 마지막에는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라 함은 그것이 생물학적이건 정신적이건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거기에서 오는 사회적 개인적 고난을 감내할 때 그 사람은 발전하고 건강하고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 아니하고 자기 희생도 없이 고통도 없이 십자가도지지 아니하고 공짜로 손쉽게 나 밖에서 그리고 어떤 큰 교회당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는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은 절대로 계시지도 아니하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신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될 때에 참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을 저희들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은 네로의 파괴로 인하여 이미 망가졌고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쫓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영원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므로서 우리의 성전을 아름답게 세워야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