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헐라

성전을 헐라/마21:12-17

성전을 헐라
마21:12-17





오늘 살펴 볼 내용은 우리가 익숙히 들었던 \\\'성전청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하는 성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성전 내에서 자행되던 여러 가지 잘못된 일들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였지요. 그러나 그 이상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보고 우리가 성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며 예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 일이 행해진 장소는 성전 내에 이 방인의 뜰이라 하는 경내인데 지방에서부터 성전?올라와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자들이 먼 길을 드릴 제물을 가지고 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에 와서 구입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 있어서 제사법은 일년 된 양, 수소 이런 것들을 정할 때 흠이 없고 만 일년 된 것이어야 하고 이런 제사에 합당한 기준에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와서 사자하는 식이였고 그것이 편리하고 편한 것이어서 이런 행위가 일반화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당시에 외국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성전에 와서 바치는 헌금은 규정된 화폐 즉 유대인들이 쓰던 화폐를 사용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환전소가 필요했고 거기에서 차액을 많이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이 악덕한일을 많이 저지르곤 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분노하신 것입니다. 그 분노의 원인이 악덕상인에 대한 분노요 폭리를 취한 환전소나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지만 그것을 구입하는 자들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 내용은 상거래자체에 대한 폐기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으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지으리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성전 된 자기 몸을 가르치심이라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성전 경내를 일반 장사하는 저작거리로 격화시켰다든가 상거래 상에서 폭리를 취했다던가 하는 일반적인 죄악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것은 성전, 제사 등 구약에서 허락한 제도 자체에 대한 폐기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앞서 있었던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장면에서도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성취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과 유대의 왕, 만왕이 되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전청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됨과 그의 사역의 목적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말라기를 한번 봅시다. 3장 1-3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나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서 드릴 것이라\\\' 여기서 \\\' 그의 임하는 날\\\'에서 그 날이라는 것은 메시야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대로 하면 \\\'말일, 말세\\\'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날에 너희가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의 사자, 약속된 하나님의 종 메시야가 오셔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그가 와서 레위자손을 깨끗케 하고 의로운 제물을 바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제사의 완성을 예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이 일로 메시야가 오실 것이요 그렇게 하시는 분이 메시야입니다.

이것을 스가랴 14장에서는 더 뚜렷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슥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가나안이라는 단어는 상인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여호와의 전에 상인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매매하는 일들을 금하시며 상인들을 내어 쫓으시므로 그것이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전을 성결케 하는 것이 성전과 율법으로 대표된 구약적 예배를 폐지하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원과 하나님과의 화목과 예배의 중심이 되심을 선언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물론 율법과 제사제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으로 하나님과 회복되는데 역부족이지요.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회복되는 하나의 예표라는 점을 알아야 됩니다. 예레미야 7장에 가면 구체적으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 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이 꾸중을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가진 열심이 이 전을 지었고 이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제도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 저들의 생활은 공의롭지 못하며 악한 죄를 짓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이 전이 너희에게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도적질한 저들의 요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생활에서 죄를 짓고도 성전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 한 자기네는 의로운 자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안심하고 또 하나님을 속여 그 보호 속에 숨는 짓을 한다는 차원에서 도적의 굴혈이란 말을 쓰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전 청소를 하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실 때는 그것보다 좀 더 깊은 뜻을 이 내용을 인용하십니다. 그것은 \\\'성전은 밖에 나가서 죄짓고 와서 아닌 척하는 위장과 허식의 자리가 됐다\\\'라는 지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부패를 설명할 수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성전이나 제사 제도 갖고는 도적밖에 만들 수 없다\\\'가 되는 것입니다. 저들이 중생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저들의 영혼이 새로워질 수 없는 한 결국 성전은 계속적으로 도둑놈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전은 필요 없는 것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도적으로 만드는 것을 중단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성전청소는 메시야가 오셔야 마땅히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지으리라\\\'가 더 쉬울 텐데 상행위를 특별히 부각시켜서 성전 청소를 하셨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방사회에 사는 유대인들이나 혹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자들이 제사를 지내려면 율법을 기준한 제사 제도에 규격과 기준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상거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폐기시키는 것은 율법을 근거하고 율법을 기준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일 자체를 폐기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기준하거나 근거해서 드리는 예배는 폐기되고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하나님께 나가는 일이 가능해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는 일에 율법이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받는 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런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은 최고로 가진 사람이나 전혀 없는 사람이나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율법에 따르는 규칙이나 율법이 없어졌습니다. 조건에 맞추어 돈을 바꾼다든지, 짐승을 사는 일이 없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로 상거래를 폐지하고 저들을 다 내어 쫓으시고 난 후 곧 바로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가 붙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소경에 저는 자들은 불치병이기에 천형을 받는 자들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외면당하면서 살았다는 것이지요. 이들을 고쳐주신 것은 앞의 것과 얼마나 대조됩니까? 율법에 기준하고 그 조건에 맞아야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누구나 받아 주는데 천형을 받는 자들도 다 받아 주는 것입니다.

엡 2:11-18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백성들과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가 됐는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둘은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원수 되었던 막힌 담이 헐렸다고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 생각했고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선민이요 율법을 받은 자요 제사와 성정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이나 육신적인 것이나 이런 것을 폐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방민족들이나 하나님을 모르고 율법도 없고 신앙의 무슨 기준도 감각도 목표도 없는 자들에게도 십자가의 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도 구원에 있어서는 잘 난 사람이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잘날 사람도 없고 자랑할 자도 없습니다. 무엇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현실에서 신앙의 힘을 못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적당히 외면하고 타협하고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신앙의 현실에 승리가 적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신앙의 현실에서 실패하고 패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갈등과 싸움을 어느 한 순간도 안 가지는 때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편하게 살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산다는 것, 인생을 산다는 게 얼마나 고달프냐하면 어느 순간도 편안한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사회적 보장을 가지고 사는지 모르지만 직장이나 그 동안 벌어 놓은 돈이나 또 알고 계신 많은 사람들로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 가지로 안전장치를 해놓으셨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마는 행복한 날은 말할 것도 없고 편안한 날도 그의 없습니다.

사람 중에 행복하고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은 딱 한 종류밖에 없습니다. 정신병자들입니다. 현실의 감각과 책임의 감각 없이 저들이 웃고 다니지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 치고 그 인생의 영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잠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는 동안 잊고 살라고 푹 자고 자는 동안 모든 것을 잊으라고 말입니다. 잠을 오래 자면 잘수록 행복한 사람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많으면 잠도 잘 안 옵니다. 사실 눈 뜨고 있어봤자 행복할 게 없습니다. 신앙적인 싸움에서도 늘 집니다. 지는 가장 큰 원인은 부족해서 입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죄의 세력에 비해서 우리의 믿음과 실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의 신앙이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신앙상담해 줄 때와 자신이 신앙을 적용할 때가 너무도 다릅니다. 설교할 때와 집에 가서 생활할 때가 너무 다릅니다. 잘 안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느낍니다.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끊임없이 느끼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항복을 받아 내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내 힘으로 살아서 승리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바 신앙의 승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내 힘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있습니다. 나는 내가 살면서 끊임없이 실패했습니다. 신앙 면에서는 더욱이 좌절하고 실패 투성 입니다. 그때 우리가 아는 것은 나를 나 혼자 책임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사 나를 구원시켰습니다.

이것만큼 놀랍고 신비하고 은혜 되는 것이 사실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 성장하면 할수록 느끼는 감격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솔직하게 \\\'주여 도와주십시오. 이대로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이런 신앙의 울부짖음이 이런 아우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권세는 어디 있습니까?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율법을 기준하면 잘잘 못이 나오고 잘못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 등장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