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과 제자

선생(先生)과 제자(弟子)
수1:1-2





나폴레옹이 전투를 하루 앞두고 서산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내게 여호수아처럼 저 태양을 두 시간만 멈추게 할 힘이 있다면…”그의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맑은 날씨가 필요했다. 그가 자랑하는 포병은 맑고 밝은 대낮에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흐린 날씨에서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해는 어김없이 서산으로 기울고 말았다.

드디어 다음날 전투가 시작됐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퍼부었다. 길은 온통 수렁으로 변했고 나폴레옹이 자랑하던 포병은 진흙탕에 박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가 하늘을 쏘아보았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권세를 무너뜨린 워털루전투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자연의 창조자인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이다. 스승의 절대적인 필요를 느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나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이 필요합니다. 선생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선생이 없다.

지금의 심정이다. 전에는 전공하는 선생을 손꼽을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존경하는 선생이 없음이 부끄럽기도 하다. 선생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야기이다. 내가 나 된 것에 대한 일조를 한 선생을 부정한다면 좀 이상한 이야기다.

선생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의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다. 그럼으로 이기적이요 자기중심적인 인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참으로 인정할 만한 선생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참으로 선생다운 선생이 없다는 이야기다.

완벽한 선생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선생을 존경해야할 이유는 나의 생애에 무엇인가를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존재함을 믿어야한다. 스승인 고로 존경해야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나이 어린 제자를 존경하는 선생

햇병아리 첼리스트 피아티 고르스키가 첫 연주회를 가졌다. 바로 그날 그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인 카잘스가 청중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더 잘하려고 하면 더 틀리기 쉬운 법이 아니던가? 그날의 연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연회가 끝나자 카잘스가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카잘스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입어 마침내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가 되었다.

뒷날 서로 흉허물없는 사이가 된 피아티 고르스키가 카잘스에게 옛날 자기에게 보내준 까닭 모를 박수의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카잘스는 \"그때 당신은 이렇게 첼로를 잡고 이렇게 활을 놀려 바로 이 음을 낸 적이 있소. 나는 당신의 연주를 통하여 그 음을 내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이 박수를 쳤던 거요. 나는 누구를 막론하고 나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내 스승으로 생각 한다오. 그래서 그날 이후 나는 당신을 내 스승같이 생각하고 도왔던 것이오.\"라고 말했다



진정한 선생은 우리구주 예수님임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세상에는 선생은 많되 스승은 하나라고 자신을 가르쳐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본다. 그렇습니다. 주님만이 진정한 선생으로서 섬김의 대상입니다.

문제는 선생이신 주님을 닮은 선생이 우리 곁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선생은 방금 봉독한 성경 말씀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모습에서 사제지간의 관가P를 맺고 살아가는 저들의 모습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의 선생이고 여호수아는 그의 제자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많은 학교가 스승의 날을 방학을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생님들이 학부형들의 촌지를 받지 못하도록 하기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촌지로 인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없지만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고 신뢰가 무너졌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선생과 제자와의 관계에는 주고받는 촌지에서 관계를 인정하려 하는 것을 잘못이다. 다시 말해서 선생님들에게 학부형들은 내 아들 딸 잘 봐달라고 하는 촌지가 아닌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관계에서 주고받는 촌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에 내 아들 딸을 잘 돌아 보아 주었고 나의 자녀가 훌륭하게 성장하고 아름다운 인격자로 키워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하는 촌지가 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내 아들 딸을 잘 봐달라고 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많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횡평과 공의를 잃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치마 바람으로 한때 학교교육에 많은 수난을 가져온 때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이 같은 것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차원을 달리한 스승의 주일이 되도록 거듭나야하겠습니다.

그러면 모세와 여호수아와의 관계에서 선생과 제자와의 관계를 보면서 한번 다시 교훈 받기를 원합니다.



[본문 말씀]

먼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성경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종자(從者) 수종자(隨從者) 시종(侍從)이라고 합니다.(출24:13, 33:11, 수1:1). 한마디로 즉 수종드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제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리에게 한번 다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으로 은혜 받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Ⅰ. 가장 가까운 곁에서 섬겼습니다.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갈 때, 회막에 있을 때, 심지어 전쟁터에서도 함께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스승인 모세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출24:13) 모세가 그 종자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광야에서 시내 산에 오를 때 되어 진 사건입니다. 즉 10가지 계명을 받으러 산에 오를 때 함께 동행 하였다고 합니다. 이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 동행하는 가까이 섬기는 제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을 멀리서 섬길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시종으로서 잘 보이는데 명령을 하면 명령을 신속하게 주인의 뜻대로 행동하기 좋게 가까이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어디로 가든지 종은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사지를 간다고 하더라도 종은 가장 가까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좋든 실든 자기의 기준이 아닙니다. 종의 기준입니다. 자신의 감정의 기준도 아닙니다. 주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니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가 기준입니다.



참제자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안ㄴ 요한은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는 자리에 있을 때 사랑하는 모든 제자들은 자신의 직업 따라 뿔뿔히 흩어지지만 요한만큼은 주님을 가장 가까이 한 제자이다. 마리아를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얻은 사람이다.



대통령보다 가까이 지내는 제자

<남태평양>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 제임스 미치너가 그 당시 대통령인 존슨으로부터 백악관으로 만찬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정중한 거절의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나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 주신 고등학교 때의 훌륭한 여선생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분을 위해서 베풀어질 저녁식사 모임에서 몇 마디의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한지 사흘 후에 백악관의 모임에 참석하라는 귀하의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본인이 백악관 만찬에 참석하지 않는다 해서 섭섭히 여기시지는 않으시리라 믿지만은 제 선생님은 아마 크게 상심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편지를 띄우고 제임스 미치너는 우수한 120명의 학자들을 위해 마련된 린든 존슨의 백악관 만찬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렇게 해서 귀크 매튜스라는 65세의 여선생은 대통령보다도 더 큰 영광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의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찬란한 백악관에 비한다면 은퇴하는 65세의 노파를 위하여 펜실바니아의 한 시골에서 베풀어지는 저녁식사는 초라하기 짝이 없을 것이지만 인간의 의리란 개인의 이해타산을 초월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물질이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고 인간 사이의 의리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세태에 있어서 이 사회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리가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보다는 선생에 대한 제자도를 발휘한 제자의 아름답게 섬기는 모습에서 우리들은 선생에 대한 예의를 가추어야 할 것이다.



Ⅱ. 주시는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따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선봉장이 됩니다.

(출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전쟁터에까지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따랐습니다.

위대한 스승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은 그리 수월한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시느이 이권이나 아니면 신분의 변화가 있을 때는 순종 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입 안에 혀처럼 철저하게 본이 되리만치 순종을 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손해 보는 경우라든가 순종한 대가가 예견되지 않을 때에는 등을 돌려 대는 것이 사람들이 갖는 마음입니다. 전쟁에 승패가 불투명하게 되고 보장이 없는 한 전쟁에 나가라고 하는 명령에 순종하기란 그리 수월한 문제가 아닙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상당한 오랫동안에 함께 동행한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많은 세월동안에 선생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함께 오랫동안에 있을 때에는 피차의 허점이 노출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보여서는 안 될 약점이 보이기도 하고 허구와 거짓된 위선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약점과 허물이 보인다면 존경심이 얄팍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명령에 순종하기란 그리 수월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에 함께 있는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그 명령을 순존 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주종관계에서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을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신적인 역사가 개입되고 허물에는 눈이 가리어지고 좋게 생각되며 잘못된 것도 좋게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이 있었음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선생과 제자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봅니다.

어느 때에든지 아무 장소에서든지 명령을 할 때 그대로 순종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제자도의 정신을 가지고 선생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모세의 제자 된 여호수아의 아름다운 신앙심을 가지고 선생과의 관계를 유재해야 할 것입니다.

선생을 제자가 가장 가깝게 따르는 일은 다른데 있지 않는다. 심부름이나 아니면 저가 시키는 모든 잘잘한 일을 도 맡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으로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제자가 되어야 한다.



Ⅲ. 선생이 하던 일을 계승했습니다.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안수했습니다.

(신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그 결과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히 임하고 백성들이 모세의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에게 순종했습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을 너에게 전달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함께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사역을 계승하는 것이 스승과 제자의 좋은 관계로 인생을 산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제자는 스승이 하는 일과 무관하다면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제자라면 스승이 일을 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스승이었던 모세가 하던 일을 대신해야할 사명이 있고 그 일을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모세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분이 해야 할 일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가나안땅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의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으로 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으로 대신하지 않을 수 없고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지만 선생을 따르는 덕으로 그는 선생이 하던 가나안 정복의 위대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엘리아와 엘리사의 관계

엘리사는 선생의 하던 일을 계승하기 위해서 사모하고 따르고 곁에서 승천을 지켜보는 가운데 선생의 옷을 주어 덧입고 선생이 받았던 갑절의 영감을 받아 그 시대의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던 일은 선생이 하던 일을 계승한 일입니다. 제자는 반드시 선생이 하던 일을 계승하는 제자가 될 때 진정으로 제자다운 제자가 될 것입니다.



본훼퍼의 제자의 삶

어떻게 사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까? 한번쯤 묻거나 듣는 질문일 것입니다. 주님 제자의 삶의 모델이 여럿 있겠지만 독일의 본회퍼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본회퍼는 1906년 2월4일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의 아버지 카를 본회퍼는 의사이자 대학교수였으며 8남매 중 7번째인 본회퍼는 명문 가정에서 성장해 신앙과 학문이 어릴 때부터 탁월했다고 합니다.

17세가 되던 1923년 그는 튀빙겐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어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서 1년간 신학을 연구한 뒤 귀국 후에는 베를린대학 강사로 취임해 공과대학의 교목이 됩니다. 많은 친구들이 독일의 군국주의를 경계하여 그에게 귀국하지 말라고 권했지만 그는 귀국하였습니다. 당시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후 교회 지도자들을 포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미 히틀러의 의도를 간파 라디오 강연을 통해 히틀러 정책의 가식과 위선을 폭로하며 교회의 세속화를 우려했습니다.

이러한 격동기인 1937년 본회퍼는 그 유명한‘나를 따르라’는 저서를 출간해 나치즘하 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우리에게 밝혀주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제자의 삶이란 불의에 도전하며 저항하는 양심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하며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행동하신 대로 따라 사는 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임을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맺는 말



모세와 여호수와의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할 것을 말씀 하였습니다. 이들의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1) 가장 가까이서 따랐습니다.

2) 주시는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3) 선생이 하던 일을 계승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 우리들은 지금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이 제자의 삶은 스승을 가장 가까이서 섬겨야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존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섬기지 않고 찾아 보지 않는다면 한 사람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존재는 선생으로부터 받은 교훈과 교육에 의하여 내가 나 된 것을 생각하면서 잊혀 진 선생들을 찾아보고 은혜를 보답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종 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미국 신사가 자기 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 있었습니다. 이 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안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신사는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 잔” 주십사고 부탁했고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몹시도 배고프고 갈증이 난 인디안은 마지막으로 물 한 모금이라도 달라고 사정했지만 영국 신사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안에게 줄 물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인디안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에 영국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깊은 산 중에서 사냥개를 놓쳐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이 산 속에서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배고프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 그 때 그곳을 지나가 던 인디안은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당장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여 후히 대접했습니다. 그 신사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안은 바로 얼마 전 자기가 박대했던 그 인디안 이었습니다.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신사에게 인디안이 조용히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 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치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믿지 않고 거역하며 소홀히 여겨 많은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