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제자

행복한 제자
신33:24-29





오늘 본문은 아셀 지파에 대한 모세의 최후의 축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 33:1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12지파 각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이 기록되던 중 본문은 마지막 지파 아셀 지파에 대한 모세의 최후 축복입니다.

적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세는 이제 그가 묻힐 버스가 산에 오르기 전에 성령에 감동되어 백성들을 향하여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모세의 고백이요, 바람이며 동시에 예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유언 중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너는 행복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자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는 중요한 과제와 시련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어떤 일이 있을지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행복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행복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배경과 이유를 살펴 보면서 우리도 행복한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25절에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인간의 유한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해 오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 그날 도와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서 비록 자신도 떠나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변함없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모세는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당신들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구체적인 축복의 실례들을 여기서 들고 있습니다.


(1) 아셀은 자자한 복을 받으며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자녀들을 키우면서 체험한 행복들을 기억하시는지요?

자녀들이 제공한 밝은 웃음과 티없는 기쁨과 자랑스러운 보람을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친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어린 아이들의 존재가 그들에게 커다란 힘과 격려를 주고, 생존의 의의와 동기를 자극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실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없는 사람은 믿음의 자녀를 전도해서 기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내 아들아 라고 부를 수 있는 디모데 디도,오네시모 같은 영적인 자녀들을 도처에 두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2)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빌 1:26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어다\" 라고 하셨습니다.


섬길 수 있고 기쁘게 해 드릴수 있는 그리고 생애 속에 기억할 수 있는 존재들이 내곁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살 것입니다.

없어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존재, 기다려지는 존재 요구되는 존재로서 인생을 살수 있도록 축복하실 것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어다.



구약에 보면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그 자리에 취임할 때 기름을 머리에 붓습니다. 기름을 넘치도록 많이 붓게 되면 발조차 기름에 잠기게 됩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할 일이 있을 때 우리를 부르면서 기름을 부어 일을 맡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지상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행복한 역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많은 고난과 많은 시련과 많은 갈등 앞에 직면하여 역사를 꾸며 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는 독특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소명의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가운데 선택하시고 삶의 과제를 맡기셨습니다.

이웃에게 전해야 할 소식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책임과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살아갈만한 의미와 값어치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들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며 네 삶의 보금자리는 그렇게 견고할 것이다.



가정이 있다는 것 때문에 감사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지상의 어떤 처소와도 바꿀 수 없는 곳이 가정입니다.

비바람과 마음의 눈보라와 마음의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집, 고독과 허무와 슬픔의 늪에서 위로하고 건져내는 아름다운 가정이 사람의 피난처, 이 보금자리를 주신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5)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우리는 한 주간 후를 예측할 수 없고 한달 후의 삶을 알지 못하고, 일년 후의 삶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을 사는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나에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건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산상보훈 가운데 내일 일을 염려 말 것을 말씀하신 곳이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을 설계해주신 하나님, 내일을 설계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앞으로도 살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모세는 그런 체험을 누구보다도 많이 했습니다.

물이 없는 광야를 지나기도 하고, 독사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참담한 장면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을 체험했던 모세는 백성들을 향해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그러므로 \"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당신들은 행보한 사람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둘째로는 이스라엘을 행복한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배경과 이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돌보심 때문이었습니다.



26절을 보면\" 여수론이여 하나님 같은자 없도다\"

여수론이란 출판사도 요즈음 생겼습니다만, 그 말은 \"계약\"이라는 의미와, \"의\" 라는 의미의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수론이란 \"의로운 백성이 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신33:26-27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모세는 위에 계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나를 도우시려고 창공을 나시고 바람을 타시며 그 분의 능력과 존귀함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이 우주를 운행하시고 지배하시는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인 것을 아는한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나를 둘러싸고 계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둘러싸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저는 나의 피난처시오, 나의 요세시오.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로다\" 라고 노래합니다. (시 91:1-2)



도단섬에 있던 엘리사가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람의 적군이 둘러싸고 있는 풍전등화 같은 위험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종(하인)은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릅니다. 그때 엘리사가 이 하인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와 함께 한자가 저와 함께 있는 자보다 많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사환이 보니까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대하 6장) 그때야 그는 평강을 소유했습니다. 상황은 똑같은데 영안이 열리니까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불말, 불병거를 보고는 평화 스런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나를 둘러싸고 보호하고 계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믿으십니까? 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 내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깊은 곳에 대한 공포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범죄에 대한 지옥의 공포가 영혼을 삼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팔이 나를 지탱하고 붙들며 인도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받쳐주시는 영원하신 팔, 이 팔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이후에도 있을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 하나님의 팔이 모세를 도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셨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역경과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의 팔이 그에게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팔을 체험했던 모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 영원하신 주의 팔이 네 아래있을 것이다. 때문에 너는 행복 자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는 앞에 계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 앞에서 대적을 쫒으시며\"



인간에게는 미래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의 설계자시며, 내일의 경영자시며, 내일을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길 때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나보다 앞서가시며 내손을 붙들고 따라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에 계신 그 하나님 아래도 계신 그 하나님, 나를 둘러싸고 계신 그 하나님, 앞서 가시는 그 하나님, 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 때문에 모세는 백성들에게 \"당신들은 행복자 입니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행복자라고 말할 수 있는 배경과 근거는 하나님의 구원 때문이었습니다.



29절을 보면 \"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 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 누구뇨 무엇을 주고 내가 얻은 이 구원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소유하자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종국의 아들신분 궁궐, 권력, 모두를 거절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늘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았습니다.



신앙의 최대 위기는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값없이 나를 용서하시고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천국을 보장하시고, 하늘의 시민권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평생에 나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놀라운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 내 인생 생애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자이십니다.



\"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 자로다.\"

\" 마닐라 한인연합교회 성도 여러분들이시여!! 여러분은 행복자이십니다 \"

할렐루야!! 아멘!!!







.상속자인 제자



(마 19:26-29)



마19:26, 빌 4:13, 막 9:23 세곳의 말씀은 적극적 신앙생활의 근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마19:26 \"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할 수 있느니라\"



빌4:13 \"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막9:23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길이 없느니라\"



여러분!!

안된다, 힘들다, 어렵다, 곤란하다. 해보지도 않고 미리 단정해 버리는 것을 \'자기 암시\'에 빠져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로 그 일이 안되어서 불가능해서 안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미리 안된다고 단정해 버리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된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안된다\"고 단연 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시는데 내가 안된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가능하다고 하시는데 내가 불가능하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대개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아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반드시 기억할 몇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약1:6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고 구해야 응답을 받습니다.



눅18:38에 믿음으로 부르짖는 여인에게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실 줄로 믿고, 이루어 주실 줄로 믿고 허락하실 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형편 그대로 아뢰며 기도해야 합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지금 받기 원한다면 상세히 숨김 없이 이야기합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내 삶의 형편, 처지를 자세하게 말씀드리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권지 하십니다.(사람도...) 그러나 부모가 자식 학교 생활을 직접 듣기를 원하듯이 하나님은 정도가 직접 자세히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소경이 기도할 때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던 것과 같습니다.



셋째로 순종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순종이 없는 기도는 응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부자가 영생문제로 예수님께 상담했을 때 예수님께서 해답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순종하지 않고 근심하고 돌아갔습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기에 그는 영생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 순종해야 합니까?



(1) 주님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2) 순종하면 유익만 있고 손해가 없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3) 순종의 결과는 많은 것을 보상해 주시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면 이렇게 큰 유익이 기다리는데 사람들은 불손종 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넷째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겸손하게 눈물로 기도드리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겸손을 기도를 들으실 때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 들의 겸손 무엇입니까?

(1)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2)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구세주이십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3) 나의 크고 작은 범사는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마음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낮은 마음이 곧 겸손 인것입니다.



다섯째 인내하며 응답시까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눅18:7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자녀가 부모님의 뜻을 알고,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길이 있습니다.

사랑의 열쇠 구멍이 막혔을 때 하나님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내게 희망의 길이 막혔을 때 하나님께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입니까?

(1)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마19:26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면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막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놀라 물었습니다.

구원의 표준과 주권은 사람의 행실이나 공적에 있지 않고 즉 구원의 길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요14:6에는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안에서는 과거도, 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2) 하나님께는 치유의 길이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때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막 9:23 이하)

인간에게 건강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러기에 하나님께는 치유의 길이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병들은 정신질환 신경성 질환입니다.

불안.. 초조...긴장... 갈등...



주님께는 치유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주여 내가 믿나이다\" 믿음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3) 하나님께는 형통이 길이 있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수 있다 사람 - 건설적, 진취적, 발전적입니다.

할 수 없다 사람 - 폐쇄적, 퇴폐적, 낙후적 사람입니다.



예수님, 바울 모든 능력의 분들이 할 수 있다의 사람입니다.



교회도 \" 할 수 있다\" 라는 사고를 가진 성도가 많을수록 발전합니다.

할 수 있다는 가정이 발전합니다. 할 수 있다는 사람이 발전합니다.



유한한 나, 무기력한 나, 부족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내게 힘을 주시기 때문에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기도...

이레 중 하루를 구별하셔서 거룩하고 복되게 하신 성일을 맞아, 주성삼위 존전에 주님의 권속들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수고에 지친 몸을 쉬게 하시고, 죄로 상한 영혼을 소성케 하소서.

이 시간 성령의 갈등으로 충만케 하시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케 하옵소서.

우리의 심령 속에 주님의 평강으로 채워 주셔서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 큰 영광 받으옵소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제자의 삶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 입은 제자)

(갈 5:13-18)

1. 자유의 종류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종에서의 자유 (레 25:10, 렘 34:8-9)

(2) 투옥 중에서의 자유 (행 24:23)가 있습니다.

(3) 양심에서의 자유 (고전 10:29)가 있습니다.

(4) 율법에서의 자유 (롬 7:1-4)가 있습니다.

(5)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 ( 요 8:36, 갈 2:4)

미국 오클라호의 대학의 한 연구팀이 15년 된 침팬지에게 140가지의 사인 랭귀지( Sign Language)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생각하여 표현할 수 있도록 유도해 보았습니다. 물론 침팬지는 가르침을 받는 동안에 최고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최고의 음식으로 잘 먹고 편안히 지낼 수 있는 모든 여건들을 제공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140가지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제 생각에 따라 연결하며 말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나타낸 말이 \"Let me go\" 나를 놓아 달아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최고의 것으로 먹이고, 최고의 여건을 준다 해도 갇힌 것은 갇힌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이 동물의 세계에서도 가장 귀한 것은 자유입니다.

요즈음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마는 애완견 들이 고급승용차에 태워져서 전용 미장원을 들락거립니다. 사람은 머리카락을 자르는데 50페소(1500원)정도면 되는데 개는 미장원에서 자르려면 몇 만원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도 못 먹는 최고급 음식을 먹고 지냅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어느 분과 식사를 하는데 갈비뼈를 좀 싸 달라고 주인에게 부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에 있는 개를 갖다 주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은 생각 안 하는데 개 먹을 것을 챙겨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식사대접을 해도, 들판을 마음대로 뛰노는 것,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 그 자유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합니까? 그 그리스도는 영적 자유를 누리고 산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자유를 제한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죄 : (요 8:34)입니다.

\" 주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 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2) 말씀에 대한 무지 (요 8:32, 요 8:43)입니다. \"진리를 알 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3) 사단 : (요 8:41, 44)입니다.

(4) 율법 : (롬 7:1)입니다.

(5) 영적 죽음 (엡 2:1)입니다.

3. 인간의 본질은 자유에 근거합니다.

자유함에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그가 누리는 자유의 한계에 국한됩니다. 인간의 능력 또한 그가 알고 뜻하는 자유의 내용에 제한됩니다. 인간은 그가 자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자유에 대한 자신의 철학만큼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라고 말씀합니다. 자유를 기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함으로 기회를 얻는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기회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 기회는 내면세계에서 둘로 나누어 집니다. 하나는 영적인 소욕입니다. 이것은 선과 의를 지향하고 거룩한 본능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자유의 기회가 그 뜻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또 하나는 육체의 소욕 입니다.

육체의 욕구에 이끌리어 땅으로 기울면서 죄의 매력에 이끌립니다.

유혹에 빠지고 방탕하게 되고, 게으르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자유는 기회이지만 이렇듯 극과 극의 두 기회로 나누어 집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란 자기가 누리고 자유만큼의 가치를 강요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유를 어떻게 향유하느냐,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변질되면 가장 수치스러운 존재가 된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분명 동물보다 많은 자유를 가졌습니다. 또 같은 인간 중에서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나 지식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진 바로 그 존재가 변질되면 남보다 더 추하고 더 형편없이 전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전 모 대학 교수가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자유분방한 주장에 그가 쓴 소설책은 많이 팔리고 여기저기 월간지에서 원고청탁이 줄을 잇는 등 그 이름의 상품화로 주가가 대단했습니다마는 자유만큼의 가치를 강요받는 교수세계에서는 자유분방한 야한 남자로 철퇴를 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부인도 아마 야한 여자가 좋으면 야한 여자와 사시오 하고 돌아선 것 같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높은 가치의 자유를 향유합니다. 그러나 말 할 수 없이 비참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염두에 둬야 합니다.

4. 그리스도 인에게 주신 특별한 자유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죄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요 8:34-36)

\" 아들이 너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

(2) 그리스도께서 율법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갈 5:1)

(3) 사망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히 2:14-15)

(4) 성령님의 임재로 자유를 주셨습니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 자유를 잘 관리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자유는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쟁취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새는 걸핏하면 투쟁이다 뭐다 합니다마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투쟁을 통해서 자유를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러는 투쟁으로서 정치적 자유는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투쟁하여 자유를 얻는 그 순간에 이미 도덕적 타락에 빠집니다. 폭력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투쟁은 자유케 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성이 파괴됩니다. 자유는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헤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한을 푼다\"라는 말을 합니다마는 한을 어떻게 풀자는 것입니까? 그것 또한 자유 할 수 있는 길이 되지 못합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입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가지고 싶은 대로 가지고, 가고 싶은 데로 가는 자유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다하는 것은 동물적인 자유입니다.

둘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자유입니다.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늦잠자는 것이 동물적인 자유이라면 일찍 일어나는 것은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공부하기 싫어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동물적인 자유이고, 내일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일을 팽게치고 싶은 것은 동물적인 자유이고 힘들지만 더 낳은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5. 그런 의미로 볼 때 자유를 세가지 차원에서 분석 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유는 제한적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유를 다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한을 받습니다.

옛 로마인들이 향락을 일삼을 때는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나서는 손가락을 목에 넣어 토한 다음에 다시 다른 음식을 먹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껏 먹고 싶지만 위장이 한정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먹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먹는 것이 한계가 없다면 빈.부 격차가 심해져가고 있는 필리핀 사람이나, 상대적 빈.부 차가 심해져 가고 있는 한국도 아마 부자들이 먹는 데에 많은 투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은 부자들은 오히려 나물 먹고 삽니다. 배추도 잎에 벌레 먹은 자욱이 있는 것 먹기 위해 강원도 계약 재배해서 날라다 먹습니다. 무공해 식품 이라나요 우리 어릴 때 시골에서 먹고 자란 것 요즈음은 재벌들이 찾아 먹습니다. 진보-농약 안 친 쌀 비싸게 납품 먹는 데에 한계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마찬가지로 가고 싶은 곳을 다 갈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수도 없습니다. 자유는 제한적이요, 또 제한을 받아야만 합니다. 물고기가 자유롭다고 하여 물 밖으로 다가서 살수는 없습니다. 물 밖으로 나가는 순간 죽음이 기다릴 뿐입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가정이라는 제한된 울타리가 있습니다. 가정 밖으로 뛰쳐 나가면 그것도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정치적 한계, 경제적 한계, 교육적 한계, 지식적 한계가 있습니다. 도덕적 한계가 있습니다.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가지고 싶은 인상, 내가 하고 싶은 행위를 마구잡이로 나타내므로 상대방의 기분을 어지럽혀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남의 감정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적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직 제한된 자유를 향유할 뿐입니다. 본래 자유에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자유에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버리는 자유입니다. 내게 주어진 권리, 내게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자유입니다. 사랑을 위해, 충성을 위해, 의를 위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합니다.

몇년 전에 T.V 특집이 있었는데 신혼열차를 소개하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승객 모두가 신혼 여행가는 사람들입니다. 쌍쌍이, 끼리끼리, 서로가 좋아서 못견딜 지경입니다. 어느 분이 제주도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더니 그 날이 주말이어서 인지 대부분의 승객이 신혼여행가는 신혼부부들이었답니다. 모두들 행복해 보여서 절로 미소가 나오더랍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벌써 다투는 커플이 있더랍니다. 식을 올린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러나 싶어서 가만히 살펴 보았더니 싸우는 내용인즉 \"왜 곁눈질이야?\" \"왜 다른 여자를 쳐다보느냐\" 하고 티격태격이 더랍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여 부부가 되었으면 그 순간부터 다른 여자 다른 남자를 보아서도 생각해서도 안돼는 것입니다. 다른 남자, 다른 여자 꿈꾸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꿈 이야기했다가는 아무리 금실좋은 부부라 해도 무사하기 힘들 겁니다. 꿈꾸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사랑의 요구, 사랑의 속박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생각 하지도 꿈을 꾸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곤욕이 또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곤욕을 마다 않고 저마다 결혼 못해서 야단들입니다. 이번에도 서울에서 몇 사람 만났더니 신랑감 구하는 처녀, 신부가 구하는 총각, 좀 소개 해 달라는 사람이 꽤 되었습니다. 곤욕을 마다 않고 저마다 결혼하겠다고 야단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결코 부자유가 아닙니다. 스스로 자유를 반납해 버렸기에 그렇습니다. 스스로 매이기를 바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속박 안에서 자유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려고 군대에 입대합니다. 입대하는 날부터 군기에 매입니다. 내 나라, 민족의 평화를 위하여 내 자유를 반납하고 펄펄 뛰는 청년기의 귀중한 3년을 고스란히 바칩니다.

이것은 충성입니다. 그런 속박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의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항심을 위해 이것이 높은 차원의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6. 그런가 하면 한 단계 더 높은 자유가 있습니다.

소망을 향한 자유, 소망 안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영이 저 먼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과 허무,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지금 병원에서 죽음의 시간을 카운트다운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지금 지성도, 능력도, 권세도, 부도, 미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적어도 죽음 뒤에 맞이할 내세 문제를 해결하는 소망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사망의 그늘에서 괴로워 할 뿐입니다.

자유는 곧 미래요, 미래에 대한 보장과 약속이 없이는 자유가 없습니다. 소망과, 미래를 그 확실한 약속에 위탁할 수 있을 때에라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즐겨 인용하는 구약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 자유의 노예\" 라는 구절입니다. 삼천 년 전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를 살 때에 그의 일생, 그의 생명을 다 사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의 생명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동력을 사는 것이다\"

인격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 6년 동안만 노예로 부리고 안식년이 되는 제 7년에는 다 놓아주어라\" 6년 후에는 자유의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7년이 되어 이제는 자유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나가 살 자신이 없거나 그대로 그 집에 살고자 할 때에는 주인에게 약속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를 문설주로 데려가 송곳으로 그의 귓 바퀴를 뚫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유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그 집의 영원한 노예입니다. 하지만 어느 대든지 그의 의사에 따라 그 집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나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바로 자유의 노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통해 기독교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6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한 것은 외부적 강요로 해서 입니다마는 자유가 된 후부터는 내면적 결정으로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노예이지만 이제 그 내용과 인격에서는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인입니다.

자유는 그 자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유는 그 고귀한 값을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소중한 보화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와 사망과 율법으로부터 자유케하고자 십자가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소중하다는 것을 알 때에 비로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항과 항쟁에서는 분명히 자유에 강합니다. 그러나 건설하는데 에는 자유인이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풀러 나는 자유가 있고, 무엇에 예속되는 자유가 있습니다.

애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자유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자유입니다. 마찬가지로 불의와 악의 세력과 독재와 싸우는 데는 명수인데, 건설하고 보호하고 창조하는데는 자유인이 되지 못하더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약점이 거기에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풀려 나는 자유가 아니라 세우고, 협력하고, 사랑하고 , 화해하는 자유, 이런 적극적인 자유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13)\" 증오할 때에는 이미 자유인이 아닙니다. 사랑할 때에만 자유인이 됩니다. 내 자유를 반납하고 십자가의 값으로 팔렸기에 내가 더는 내 몸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유의 종이되어 비로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7. 이것이 그리스도 인의 자유에 대한 태도입니다.

(1)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갈 5:13)

(2) 율법의 멍에를 다시 매면 안됩니다. \" 주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명에를 매지 말라\" (갈 5:1)

(3) 자유로 막을 가리우는데 쓰면 안됩니다. (벧전 10:29)

(4) 남의 자유를 함부로 평가하면 안됩니다. (고전 10:29)

(5) 자유의 행사가 약한 자에게 거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고전 8:9)

우리가 이런 말, 저런 말, 이런 행동, 저런 행동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것 때문에 초신자에게 거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교회 깊숙한 안 할말 다하고 이러쿵 저러쿵 하고 다니면 은혜 받으려고 모인 초신자가 믿음의 선배가 저러고 다니는 것 보니 실망하겠구나, 이렇게 되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신학자로 유명한 부르거만은 인간을 \"Who I am\" 내가 누구냐 하는 것으로 정의 할 것이 아니라, (Whose I am)으로 정의해야 한다 라고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 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이 문제에 내 생의 의미가 있고 내 자유의 의미가 있습니다.

마틴루터는 \" 그리스도 인을 가장 위대한 자유인이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스도 인은 가장 충성된 노예이다.

세상에서 사랑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에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좇아가는 사람만이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참 자유란 물질적인 조건의 향유도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 소망과 평강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고 창조의 위력이 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주는 영 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아멘..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비싼 대가로 얻은 이 자유를 믿음으로 잘 관리하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옵소서..

눈이 어두워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날조된 정보와 시끄러운 세상 소리에 익숙해져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분간 못하는 우를 법치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이 일그러져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영적 벙어리가 되지 않도록 저희들에게 주의 영이 충만케 하옵소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