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제자로

성숙한 제자로 (2)/눅14:25-35

성숙한 제자로 (2)
눅14:25-35





\\\"제자\\\"라고 하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는 우리에게 제자가 되라는 것이요, 다음은 우리로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제자가 되라는 부분에 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제자가 누구입니까? 성경에서는 좁게는 12명의 사도들을 제자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넓게는 주님을 믿는 자들을 제자라고 합니다. 즉 넓은 의미의 제자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하루에 3천명씩 세례를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0-41)고 하여 그들을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 예수님을 좇는 자가 곧 제자입니다. 누가 누구의 제자라고 할 때 3가지 요소를 가지고 그렇게 말합니다. 먼저는 배울 때 제자라고 하고, 다음으로는 훈련을 받을 때 제자라고 하고, 끝으로는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를 따른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후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저들에게 몸을 의탁치 않으셨다고 하였고(요2:23-25). 5병2어 사건 후에 보리떡 먹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지 않겠다고 다 가버렸습니다(요6:22-71)

. 그보다 누가복음 9장 57절 이하에 보면 세 사람이 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는데 다 따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창녀에게도 천국문을 열어주시는 주님이시며, 세리에게도 천국을 활짝 열어주시는 분이신데 왜 따르겠다는 사람을 따르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그것도 세 사람 중에 첫 번째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좇겠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에 의하면 시온산에 서 있는 구원받은 자의 모습 중에 하나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사람은 시온산에 서야할 사람 같은데 왜 주님은 그 사람의 따름을 거절하였을까요?

그보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가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인정 받지 못하여 질투심 때문에 예수를 배반하였든, 로마 정부와 예수가 충돌하면 로마 편에 서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판단 착오에 의하여 그랬든, 예수님에 대한 자기 기대가 어긋나서 그랬든, 아니면 돈에 대한 탐욕이 나서 그랬든 유다는 결국 실패한 제자였습니다. 실패한 제자는 제자가 아닙니다. 주님을 좇아다닌다고 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저명한 두 교수가 대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교수가 다른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죤이라는 학생이 자기가 자네의 제자라고 떠들고 다니더군. 그 말이 사실인가?\\\" 이에 대한 동료 교수의 대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글쎄, 그 학생이 내가 하는 모든 강의를 좇아다니며 듣고 있긴 하지. 그러나 그는 나의 제자가 아닐세.\\\"라고 말입니다. 일본의 성경학자요 최대의 전도자라고 할 수 있는 우찌무라 간조는 제자를 일곱 사람만 키웠다고 합니다. 지금 우찌무라의 제자가 대만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으며, 세계 각국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배운 사람들이 일본에서 대학 교수를 하는 사람이 무려 54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제자는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격이 있는 사람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원하는 제자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위험하고 고등한 사탄의 계략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바라시며(막 16:15), 또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요 3:17)이며,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가 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원리를 본문만큼 잘 설명하고 있다는 곳은 없다고 봅니다. 본문은 제자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제가가 되려면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6절).

두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하나는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과 그리고 나 자신을 미워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지상정으로 보아도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가정을 사랑하라고,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고 순종하라고 수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출20:12, 신 5:16, 마15:4, 19:19, 엡6:1, 골3:20). 바울도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왜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된다\\\'고 하였을까요? 그리고 이 말씀의 근본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가정을 버리고 가정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정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 사랑하고 더 희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6)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가족이 복음을 거스를 때, 복음을 반대할 때 그 때는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때로 몰라서 그리고 사탄의 조정에 의하여 가족이 성도들을 핍박하고 미워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합니다. 괜히 미워하고 괜히 핍박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사탄이 그렇게 시험합니다. \\\"예수와 나 중에 선택하라\\\"고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 때 주님을 버리는 것이 가족과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때 오히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곧 가족과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 가족을 미워해서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더 사랑하기에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제 아버님이 예수 믿는다고 책가방을 주지 않아서 1주일씩 학교를 가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눈이 많이 쌓인 겨울날 교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눈이 좀 치워 있어 길이 나 있었고 하나는 눈이 전혀 치워져 있지 않아서 잘못하면 허리까지 빠지기도 하고 논 길 옆의 수로에 빠지면 죽을 수도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치워진 길 산 허리에서 누군가가 외투를 세우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멀리에서 보니 꼭 모습이 저희 아버지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까이 가니 불을 끄는 것입니다. 무서워서 다시 뒤돌아 가고 인기척이 사라지면 또 불을 피웁니다. 그래서 다시 가려고 하여 인기척이 생기면 불을 끄곤 합니다. 우리는 그냥 눈이 치워져 있지 않은 길을 택하여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후에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이 아버지라면 밤새도록 또 전쟁을 치루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잠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집 안 가구가 부서질지도 모릅니다. 어머님은 그저 그 험한 길을 뚫고 가면서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는 외마디 기도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사람이 빠지면 손을 잡아 구해주고 그렇게 하여 몇 배나 힘들게 몇 시간에 걸쳐서 허리까지 빠지는 길을 간신히 헤치고 집에 갔습니다. 발자국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집에 들어가서 보니 저희 아버지는 술에 취해 골아 떨어져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훈련된 군인보다 빨리 옷을 벗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자리에 들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 핍박의 날에 저희 어머님이 아버지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를 버렸다면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도 아버지의 영혼도 자식들의 영혼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정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진정으로 나 자신과 가정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는 말의 근본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역시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에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24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까지 버려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아가 강한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되어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1940년에 미국의 언어학자가 당시의 각국 권력자들의 연설 속에서 \\\"나\\\"라는 1인칭이 얼마나 사용되는가를 분석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당연 으뜸은 히틀러로 53개 단어에 한번 꼴로 \\\"나는\\\", \\\"내가\\\", \\\"나의\\\", \\\"나를\\\", \\\"내\\\"라는 말을 썼습니다. 두 번째는 무솔리니로 83개 단어에 한번 꼴로 1인칭을 썼습니다. 대단히 개성이 강하고 고집이 센 루스벨트는 1백 어에 한번, 프랑스의 달라지에 수상은 2백 34 어에 한번 1인칭을 썼습니다. 자아가 강하거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나\\\"를 잘 내세우는 것 같다는 게 조사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자기만 내세우는 사람 치고 위인이 없었으며, 또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를 좇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원래 사탄의 대명사는 \\\"나\\\"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을 고린도전서 9:27에서 자기를 쳐 복종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3:8에서는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지식, 학문, 지위 등의 모든 일체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버렸던 것입니다. 모세 역시 같은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24-26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해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염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학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요,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요, 자기를 찾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27절).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나는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자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 12:2)라고 했습니다.

<칼 바르트>는 십자가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보여주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야 할 만큼 내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이며, 또한 주님이 십자가에서 값을 지불하셔야 할 정도로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계시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소중하면 예수님이 친히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서 피 값을 지불하고 나를 구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지셨으니까 우리는 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십자가는 구원 얻을 때만 필요하고 다음에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구원 얻은 사람들마다 십자가가 있다는 말이요,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주님과 진리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역경과 죽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또한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우리를 절대로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만일 십자가가 없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성도이거나, 형식적으로는 제자이지만 사실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십자가의 어려움이 없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고기는 반듯이 물결의 도전을 받듯이, 세상을 거스르는 성도는 세상의 도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십자가가 있다는 말은 내가 주님의 제자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보다 내가 주님의 제자라는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조금만 충성하겠다고 다짐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조롱하거나 핍박하거나 아니면 그 충성을 방해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려고 해 보십시오. 사탄이 방해할 것입니다. 장애물이 나타나고 핍박이 생기고 유혹도 찾아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도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저 사람 좀 데려 가 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야! 그애가 내게 오면 나는 어떡하라고 그러느냐!\\\" 그러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믿으려고 하면 미워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펄젼>은 \\\"새의 두 날개가 새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나 새의 날개가 없이는 날 수가 없다. 배의 돛대도 배에게는 한갓 거추장스러운 연장이지만 배의 돛대가 없으면 항해를 할 수 없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나 성도에게 십자가가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는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는데 어느 날 꿈에 그 날도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는데 때마침 예수님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좀 잘라주세요\\\"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주시더라고 합니다. 그는 그래도 그 십자가가 무거워서 무려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십자가는 너무 작아져서 요단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매는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라는 말입니다. 그 후에 이 자매는 절대로 자신의 십자가를 불평한 일이 없었고 오히려 감사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는 십자가를 자랑하게 됩니다. \\\"나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한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부끄러운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물론 우리에게는 전할 구원의 소식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랑하며 사는 새해가 됩시다.



셋째로 자기 소유를 버리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33절).

사람들은 제자가 되는데 이 말씀이 제일로 어려운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도 물었지만 많은 교회에서 집회를 하며 물어 보았습니다. 영생을 구하러 주님을 찾아온 한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고 하셨는데, 만일 주님이 나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린다면 순종하겠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다고 손을 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실 우리가 얼마나 돈을 사랑하는가 하는 점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강도가 나타나서 \\\"돈이 아까우면 목숨을 내놓고, 목숨이 아까우면 돈을 내놓아라\\\"고 하면 한 참 생각한 후에 \\\"나는 돈이 아까우니 목숨을 가져가십시오\\\"라고 할 사람입니다. 인간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돈이라고 합니다. 또한 인간이 최고로 걱정하는 것도 역시 돈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돈을 생각하고 돈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합니다.

\\\"카쇼기\\\"라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돈벌이의 천재였습니다. 재산 40억 달러, 자가용 제트 여객기 3대, 하루 용돈 28만 달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딸을 \\\"아라비아의 망나니\\\"라는 별명을 가진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 대령과 결혼시켰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로 돈을 위해서 말입니다. 사정을 알고 보니 이 결혼이 성사되기 전에 리비아는 캬쇼기에게 하루 10만 배럴의 석유를 배럴 당 싯가 보다 3달러 싼값으로 파는 계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계산해도 하루 30만 달러로 그 당시 한화로 약 2억 1천만 원의 이익을 보는 셈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카쇼기는 하루에 2억 1천만 원씩 받고 딸을 카다피에게 팔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딸은 카다피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돈입니다. 돈 때문에 딸까지 팔아먹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주님이 원한다고 재산을 다 드리겠습니까? 가끔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다 드리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없는 것도 은혜입니다. 언제라도 다 내어놓을 수 있도록 조금 가지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신다면 많든 적든 다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셨을까요? 그리고 본문에서도 이렇게 어려운 명령을 하고 계실까요? 어떤 사람은 아마 천국 갈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받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또 목숨과 뜻과 정성을 다 하여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 하나만을 키우며 살아온 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늘 교회 일에 앞장서왔으며 예수님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으로부터 울려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모든 것을 나에게 바치지 아니하였노라\\\"는 음성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아들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방금 전에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아들에게 전해주며 하소연했습니다. \\\"나는 지금껏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을 섬겨왔다. 주님께서 내 재산을 모두 원하시면 다 드릴 수 있으며 내 생명을 원하시면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단다. 그런데 나의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다니 여기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바쳐야 하느냐?\\\" 그러자 아들은 조심스런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선교사로 지원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녀는 아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나의 생명을 내줄지언정 그것만큼은 안 된다. 오. 주여! 제발 저에게서 아들만큼은 빼앗아가지 마십시오.\\\" 그녀에게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한 가지가 남아있었는데 바로 아들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재산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아들을 요구했고, 부자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전 재산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돈을 너무 사랑하니까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생명이 내 재산보다 더 귀한 줄로 믿습니까? 내 생명이 주님의 것인 것처럼 내 소유도 다 주님의 것인 줄로 믿습니까? 다 같이 한 번 따라 해 보십시오.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한 번 한 목소리로 하겠습니다. \\\"다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도박장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그들의 반짝이는 눈과 밤을 새워가며 온 정신과 있는 돈을 다 털어놓고 진지하게 도박하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자신의 귀중한 영혼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런 정성을 기울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두 가지 예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는 망대 짓는 비유요, 다른 하나는 전쟁 비유입니다. 망대를 지을 때 계산하고 전쟁할 때 계산하는 것처럼 믿음의 계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님을 가족보다,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지, 십자가를 질 수 있는지, 그리고 내 재산이 다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믿고 있는지, 아니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내 재산을 다 드릴 수 있는지 그것을 미리 계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동정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 이해하고 양보하고 위로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망대 비유와 전쟁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물질관이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950년대 세계 선교의 영웅 <짐 엘리어트>가 정글에서 피를 흘린 후 발견된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서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제자가 되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