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 눅14:25-35
토마스 에디슨은 평생동안 모은 재산인 뉴저지주의 웨스트오렌지에 있던 공장과 연구시설이 어느 날 모조리 불에 타 버렸습니다. 멍하니 불 탄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에디슨의 아들 챨스가 옆으로 다가와서 위로의 말을 하였을 때, 에디슨은 부인까지 불러서 옆에 세우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기존 건물과 묵은 시설이 아까워서 뜯어고치지 못하는 나의 작은 마음을 책망하시려고 새 것을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란다.\\\"
새 천년을 앞두고 새 천년에 대한 떠들썩함과 달리 벌써 2000년 1월이 중순이 되었는데도 뭐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새 천년이 되었는데도 그냥 그대로일까요?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핀 것처럼 내가 찬양하는 사람으로, 내가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으면서 새 천년에 대한 기대만 한다면 무슨 새 천년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들에게 다시금 주님의 제자로 사는 삶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새 천년을 살기를 원한다면 제자로서의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80년대 초반에 세계적으로 볼 때, 교회에서 큰 주장이 있었다면 그것은 <제자훈련>이었습니다. 제자훈련이란 양육 훈련을 힘쓰고 있는 어떤 선교단체나 교회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제자훈련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제자」라 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사도행전 11장의 안디옥 지역에서 비로소 불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마28:18-20에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기록합니다. 즉 본동사, 주된 동사는 <제자를 삼아>인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하면 예수님의 명령이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보통의 인간 지도자들은 수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게 하는데서 기쁨과 만족을 누립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만 많으면 다 된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중이 자기를 피상적으로 따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요구를 하시고 계십니다. 안일한 태도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절대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도마복음에서 전승된 <불 비유>에 보면 「나에게 가까운 자는 불에 가깝고 나에게서 먼 자는 나라에서 멀다」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불에서 가까우니,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것이요, 나에게서 먼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기 때문에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천국도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십자가는 외면한 채 면류관만을 추구하며 현세적 이해 타산에 따라 부화뇌동하는 그리고 약삭빠르기 이를 데 없는 소위 귀족적인 신자들로 살아온 모습은 아니었습니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은 적은 것이 오늘의 우리네 교회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갔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많은 무리들에게 3번이나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26절에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절에서도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결국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허다한 무리, 많은 수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참된 제자에 관심을 둔 것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분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두움의 권세 잡은 자들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4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5-27절은 제자가 될 조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28-30절은 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입니다.
31-33절은 출전하는 임금의 비유입니다.
마지막으로 34-35절은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입니다.
이 4부분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입니다.
1.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살펴봅니다.
그 첫째 조건은 한 개인 개인의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입니다.
26절을 우리가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모든 혈육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에는 주의를 해야 합니다. 종종 자기 보모나 형제들에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이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의 잘못하는 것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 아내를 사랑하라, 자녀를 돌보라는 말씀들이 있는데, 그 말씀들이 오늘 본문과 전혀 상치되지 않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 미워한다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미세이」인데, 「조금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즉 제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말씀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의 가장 큰 원수가, 곧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주된 요인이 종종 자기 집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막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주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가정의 잠시누릴 평안을 위해서, 임시적인 평안을 위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멀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하여서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버리고 절이나 수녀원, 수도원에, 혹은 기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 중심, 자기 만족을 위한, 어떤 현실도피현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너무 견디기 어려우니까 마치 머리를 깎고 세상을 등지고 절에 들어가는 현상이 있어 왔습니다. 애인들에게 상처를 받고 수녀원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도 현실을 견디기 어려우니까, 혹은 현실에 적응하기 힘드니까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기도원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세는 절대 비성경적인 자세입니다. 우리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저 산 속에다가 초막 셋을 짓자는 아주 거룩한 유혹을 합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짓고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짓고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자고 하는 너무나 거룩한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여러분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들끼리 산 속에 따로 모여서 살면 정말 믿음으로만 잘 살 것 같습니까? 박태선의 신앙촌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절대 자기 가정을 희생시키고 떠나라 고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주님보다 덜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은 그만두고 그 까짓 돈 몇 푼에 주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제자의 조건에서 이미 미달된 상태입니다
. 여러분 우리는 혹시 돈 몇 푼에 혹은 일시적인 평안에 주님을 팔아 버려온 자들이 아니었던가요? 이제 그 무엇보다도 새 백성들로서 주님을 일차적으로 사랑하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조건은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보는 것처럼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아오기는 하는데 십자가와는 거리가 먼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사랑을 싫어하십니다. 결연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교할 각오를 할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자기 십자가라고 표현된 것은 주님을 따르며 받게되는 고난의 모습이 각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것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주어진 십자가가 다릅니다.
종종 우리들 중에 <아 누구는 예수 믿으면서 평안한 것 같은데 나는 이렇게 고통이 따르지?> 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십자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는 각자 다릅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와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나는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결코 오늘날처럼 화려한 금 십자가나 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남에게 내 보이기조차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녀의 큰 아픔을 가슴에 안고 늘 기도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이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통의 십자가입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포기하면 손해가 납니다.
종종 자기 몫의 십자가를 포기하고 나가면 편할 줄 알고, 좋을 줄 알고 나가지만 그것이 결국 큰 손해로 끝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여성도가 국가의 IMF를 만나면서 도무지 견딜 수 없어 가정을 포기하고 남편과 자녀들을 뒤로 하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큰 손해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 포기하는 것은 제자로서의 조건 미달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십자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내게 분명히 주어진 십자가를 바꾸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포기하고 남의 십자가 지고 왔다고 절대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제 새로운 백성으로 우리는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로서의 세 번째 조건은 33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상한 표현입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는 무엇을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에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이 우리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시몬과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했을 때, 곧 그들은 그물을 버려 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부름을 듣고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유를 마음대로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에게 위임된 것이라고 여기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그래서 우리가 농어촌 교회나 선교사들에게 얼마씩 돈을 보낼 때에 우리가 돕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함께 나눈다는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그의 모든 소유를 팔거나 그의 모든 돈을 다 남에게 주어버리거나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다 저버리고 세상을 등지고 기도원이나 산 속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이나, 구걸해서 먹고사는 걸인이나, 방랑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이 말씀은 내가 나의 모든 존재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과 함께, 나의 전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스리도록 전권을 이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 나에게 전 재산을 내 놓으라면 내어놓겠으며, 내 존재까지 내어놓으라면, 생명까지 놓으라면 내어놓겠습니다. 라는 자세입니다.이제 새 백성들로서 이런 좋은 주님의 제자로서의 조건들을 갖추는 자들이 먼저 되시기를 바랍니다.
2.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를 봅니다.
이 비유가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결코 부귀 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임을 알고, 냉철한 판단, 분명하게 계산하고 따르기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보면 한 때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 얼마 안 있어서 작은 시험조차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더욱 깊이 상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근한 예를 우리는 신학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치 뜨거운 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 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처럼 알려진 이 때에, 많은 젊은이들이 뭔가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일시적인 감정으로 신학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학을 하다보면 꽤 어려운 일들이 찾아옵니다.그러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뺍니다. 한 때 많은 부흥사들이 젊은이들에게 감정을 자극하여 신학만 하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시작하고 그러다 중단하는지 모릅니다. 망대를 세우는 자는 계산을 하고 시작해야 하는데 신학을 하고 목회자로서 걸어가는 길을 계산하지 않고 무조건 신학을 시작한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입니다.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신앙이 좋으면 무조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닙니다.신앙 좋은 사람들이 평신도로서 사회 곳곳에서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신앙 좋은 사람들이 교회의 각 부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산도 안 해보고 잠시 열정이 생기면 신학을 시작한 것 때문에 한국 교회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학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주님을 따르는 것을, 일시적인 감정이나 흥분에서 따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좁은 길이라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한 넓은 길을 걸으면서 그 길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착각하고 따르는 가를 계산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려울 때에 넘어질 군사들을 제자로 삼아 그의 추종자들의 숫자만 늘리는 일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단순히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에 나가는 것은 값싸고 쉬운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어떤 각오도 없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인원수만 채우려는 애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비용을 예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준비하고 따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출전하는 임금의 비유입니다.
즉 이 비유는 제자가 되는 것은 전장에 나가는 사람과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 생활의 위험, 고난을 충분히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막연히 다 잘될 것이라는 기대감이나 허영 등으로 시작해서 중단하지 않도록, 신앙 생활을 하는 도중에 닥칠지도 모르는 고통에 대해 미리 밝혀 줌으로써, 신앙을 공고히 하도록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 때로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적당히 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만 정말 제자로 살아가려고 하다보면 참 많은 부분에서 마음으로도 육신으로도 어려움이 있습니다.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서만 감당되어질 수 있습니다. 히2:18을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주님을 바로 따른 길이 때로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기 때문에 주님이 도우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는 현대 기독교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 잘 상징하는 것은 온탕이라고 말합니다. 목욕탕에 가서 온탕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몸을 나른하게 풀어주고, 느슨하게 해주고 느긋한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즉, 모여서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좋고, 어떤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내내 재미만 주는 좋은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는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이란 그런 즐거움, 그런 쾌락과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즐거움을 위해 주를 좇지 말고 참된 기쁨 참된 만족을 위해 주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라기는 주님을 위해 고난도 받겠다는 이런 제자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따른 제자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새 천년은 새로운 의미를 줄 것입니다.
4.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를 살핍니다.
결론적인 제자로서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지 못하는 제자는 곧 맛을 잃어버린 제자는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로 전락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 때문에 얼마나 기독교가, 예수님이 손해를 보느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맛을 잃은 소금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새 천년이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이제 바라기는 빛으로 소금으로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맛을 내는 소금들로 진정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영어로 제자(disciple)라는 말은 훈련(discipline)이란 말과 같은 어근을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훈련은 고난과 수고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여기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향하여 중요한 말씀을 하시고 아주 인상적인 외침으로 끝맺습니다.
35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면서 「성도는 인생을 한 세계의 차원으로만 보지말고 두 세계의 차원에서보고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이 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돈 몇 푼에 혹은 일시적인 평안에 주님을 팔아버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일차적으로 사랑하는 제자들이 되며, 주어진 십자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내 십자가가 어렵다고 십자가를 바꾸려고 하지 않고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나의 모든 존재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과 함께, 나의 전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스리도록 전권을 이양하고 살아가며 망대를 세우는 자처럼, 출전하는 임금처럼 준비하고, 맛을 내는 소금으로 살아가는 성도들,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