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삶 (2)

제자의 삶 (2)/눅12:1-12

제자의 삶 (2)
눅12:1-12





서로 밟힐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주님의 시선은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주님은 다수의 사람들을 제쳐주고/ 소수의 제자들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무리 수 만 명도 중요하지만/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을 따른 열둘이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내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수 만명의 무리 중 한 사람인가/ 아니면 제자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도 제자 나름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도 있지만/ 제자 같지도 않은 제자도 있습니다. 제자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것이/ 뭔가 득이 된다고 싶으면/ 너도 나도 제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져야 하고/ 희생을 각오해야 할 때는/ 조용히 뒷걸음질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를 포함하여 우리도/ 그런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제자의 삶

사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보통 맘먹고 주님을 따르다가는/ 중도에 어려운 일을 만나면/ 돌아서거나 낙오하기 십상입니다. 실제로 교회사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중에도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여러분의 생계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된다면/ 다음주부터 교회 나오지 않을 분들 있을 겁니다.
‘예수 믿어 봤자 말짱 헛일이구먼’
‘거 다 쓸데 없는 짓이야’
그런 말을 남기고/ 예수님과 “Good-Bye” 할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자신 있다구요?
그럼요, 그래야죠.
하지만 돌아섰던 사람들도/ 처음엔 다 그렇게 장담했다는 것 아시죠?

수제자 베드로가 뭐라며 호언장담했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4-35절을 보세요.
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말씀을 잘 보세요. 베드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네요?
다른 제자들도/ 다 그렇게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간 제자는/ 우리가 아는 대로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감상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따르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그러면 아주 특별한 사람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요?
저나 여러분 같이 평범한 사람은/ 아예 제자가 될 수 없단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확신과 헌신의 차이입니다. 그들은 확신했고 우리는 확신이 부족하고/ 그들은 헌신했고 우리는 헌신이 부족합니다. 왜 제자로 헌신하지 않는가/ 다른 것은 다 핑계입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확신하기만 하면/ 충분히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확신하기만 하면/ 넉넉히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결국 가치의 문제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절대가치를 두면/ 다른 것은 다 상대가치가 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수님과 비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선순위 ‘넘버 원’입니다.

예수님께 절대가치를 두고/ 예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살았던/ 밀러 여사의 신앙고백을 들어보세요.
1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2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3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와도
주 섬기는 내맘 변치 못해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예수님께 절대가치를 두지 않으면/ 항상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을 의식 안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자니 사람이 울 것 같고/ 사람 편에 서자니 예수님이 우실 것 같고/ 이게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민할 것 없습니다. 눈 딱 감고 예수님 편에 서세요!!!
그게 생명의 길입니다. 그게 여러분이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길입니다.
아멘입니까?

외식하지 말라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제자의 삶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외식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 외식하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눈치보다 사람 눈치를/ 더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할까 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더 예민하게 구는 것입니다.
외식이란 실제의 자신이 아닌/ 분장된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럼 왜 자신을 분장합니까? 실제의 자신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의 자신은/ 사람들 앞에 꺼내놓기가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나/ 겉은 경건과 거룩으로 분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외식을 금했다는 말은/ 제자의 삶이란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어야함을 말씀하신 겁니다. 자신을 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내는 것은/ 보통 용기로는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렇게 한번 노출하고 나면/ 자신에게 치유가 일어납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문제에서/ 비로소 놓임 받을 수 있습니다.
제자는 외식으로 가득 차 있는/ 자기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고 나면/ 한 동안 허탈할 수 있습니다. ‘내가 괜히 비웠나’ 하는/ 허전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우고 그대로 두면 안 됩니다. 반드시 채워야 합니다. 빈 마음에 말씀을 채워야 합니다. 빈 자리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빈 공간에 성령으로 충만케 해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제자의 삶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또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 겁니다. 사실 외식하는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을 보세요.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사도행전 4장과는 너무나 비교됩니다.

사도행전 4장 18-20절을 보세요.
4: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 답을 4장 8절에서/ 찾고 싶습니다.
4장 8절 앞부분을 보세요.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이 성령이 충만할 때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두려워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서/ 온전한 제자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친구 너희”라구요.

내가 너희의 친구가 되어 줄테니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친구로서 동행해줄 테니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은 기껏해야 몸밖에 죽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이 죽는 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큰소리쳐도/ 죽음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생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심령에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여러분은/ 실제로 그들과 다릅니까?

인생을 하루의 시간과 비교한 글이/ 국민일보에 실렸던 적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시간을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라고 본다면,
15세는 오전 10시 25분
20세는 11시 34분,
25세는 12시 45분
30세는 오후 1시 51분,
35세는 오후 3시
40세는 오후 4시 8분
45세는 5시 16분
50세는 6시 25분
55세는 7시 34분
60세는 8시 42분
65세는 9시 51분
70세는 밤 11시입니다.

여러분은 몇 시에 해당됩니까?
아직 한창인 분들도 있겠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해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르신들 잠자리 준비 잘하고 계십니까?
아직은 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마찬가지로 늘 준비하고 사셔야죠?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잠자리에 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땅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천국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깨어나도 좋고/ 천국에서 깨어나도 좋습니다. 이 땅에서 깨어나면/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고// 천국에서 깨어나면/ 주님 만나서 좋은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나병환자에게 일평생 헌신했던/ 성 다미엔 신부님은 임종하던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죽음을 더 이상 드릴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일로 이해한 것입니다.

한 때, 방탕한 삶을 살다/ 딸을 잃고 하나님께 돌아와/ [레 미제라불]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던 빅토르 위고는/ 죽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 일생을 다 끝낸 것이 아니라/ 내 일과를 다 마쳤습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오면/ 나의 일과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인생의 마침표가 아닌/ 인생의 쉼표로 이해한 것입니다.

따라해 보세요.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사랑하는 오천남부교회 믿음의 식구 여러분,
인생의 쉼표를/ 잘 찍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남은 생을/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는/ 택한 백성을 기억하시고/ 세심하게 보살펴주시는 분입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도/ 잊지 아니하시는 분이고/ 머리털 하나까지도 세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제자로서/ 예수님을 많이 닮지 못한 것을 걱정하시고/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가서/ 상급이 적지 않을까 하는 것으로 걱정하시기 바랍니다. 괜히 쓸데없는 걱정으로/ 에너지 낭비 시간 허비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로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라

제자의 삶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8-9절을 보세요.
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12: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시인하는”의 원어 ‘호몰로게오’는/ 인정하다 고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곧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인하는 것입니까?
사람 앞에서 시인하는 것입니다. 즉 공개적인 고백을 말합니다. 은밀하게 숨어서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간증하는 의미가 아니라/ 불신자들 앞에서/ 전도하는 의미입니다. 특히 ‘호몰로게오’는 판사 앞에서 증언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 말에 책임이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우리는 모여서 잘 믿어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모여서 열정적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흩어져서 잘 믿어야 합니다. 뿔뿔이 흩어져야 합니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전도해야 합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나가서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시인하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고백하면”이 됩니다. 단순히 고백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 고백이 예수 안에 사는 삶의 결과로서/ 표현되어져야 함을 뜻합니다.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와/ 삶의 구체적인 열매를 통해 나타나는/ 신앙고백을 뜻합니다.
그럼 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영생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고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세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이건 백보좌 심판을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예수님을 시인했던 사람은/ 그날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이 시인해 주시고// 이 땅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은/ 그 날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며 부인하실 거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7장 말미에 있는 말씀을/ 여러분 다 기억하시죠?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아무리 예수님께 따지고 덤벼들어도/ 그 때에 밝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우리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불신자들을 겁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성도의 견인을 인정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택한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이라도/ 끝까지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는 사실도/ 성서는 함께 말씀합니다.

현재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의 몸된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호흡이 정지되는 순간까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주의 몸된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내가 언제 한 번 예수님을 시인했던 것이/ 평생 유효할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내가 시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도 내가 시인하느냐가 중요하단 말입니다. 현재의 하나님이신 그분은/ 우리에게 현재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옛날에 얼마나 충성했느냐가 아니라/ 지금 얼마나 충성하느냐를 보십니다. 전에 어떤 죄된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지금 얼마나 의롭게 살고 있느냐를 보십니다.
여러분, ‘신앙 전력’을 자랑하지 마세요.
과거의 화려했던 ‘신앙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이 중요합니다. 현재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오천남부교회 믿음의 식구 여러분,
여러분이 맡고 있는/ 현재의 사역에 충실하세요.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양육과 훈련에 열심을 다하세요.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역할을/ 지금 잘 감당하세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현재의 생업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세요.
그걸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시인하기 위해서/ 뒷받침되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10-12절을 보세요.
12: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2:11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내 용기만 갖고는 안됩니다. 자기 확신만 갖고도 안됩니다. 스가랴를 통해 주신 말씀처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됩니다.
물론 평소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때도/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지만/ 특히 박해상황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을/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로 칩니다. 카돌릭에서는 그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인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교가 그들의 공만은 아닙니다. 그들을 순교자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순교자들은 한결같이/ 성령님께 붙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4세기의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크리소스틈은 로마의 시이저가 ‘주’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앞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에게 내릴 형벌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맨 먼저 그를 추방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저를 저의 집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때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저의 보화는 하늘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 곳을 뚫고 도적질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어/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접촉을 일체 금지 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저에게는 결코 저를 떠나시지 않고/ 버리시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친구가 계십니다.\\\"

격노한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저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으니까요\\\"

보세요. 이런 사람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38절 괄호 안의 말씀을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맞아요, 그런 사람을/ 세상이 무슨 재주로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에 비하면/ 저와 여러분은 너무 세상과 짝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이 시간 조용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11절의 말씀은/ 제자들이 고난당하게 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법정에 서야 하는 때가/ 올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서 “회당”은 유대인의 법정을 뜻하는 것으로/ 그 외의 것은 이방인의 법정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회당”은 종교 지도자로부터 핍박을 말하고/ 그 외의 것은 정치, 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고난과 핍박이 올 것에 대해/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안 되던 것도 되고/ 맺힌 것도 풀리고/ 닫힌 것도 열리고/ 막힌 것도 뚫릴 것으로 생각하는데/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믿는 제자들에게/ 아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죄도 없는데 법정에 서다니요?
특별한 잘못도 없는데 핍박을 받다니요?
정말 이상하죠?
그러나 이상할 것 없습니다. 불의한 세상은/ 의로우신 예수님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어두운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까 봐/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드리운 세상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당연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제자들을/ 그들이 용납할 수 없죠.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은 없고/ 오직 예수 뿐이라고 하니/ 유대교 지도자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가 또한 제삼일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죠.

그들이 마음으로만 시인하고 있었다면/ 핍박받지 않습니다. 입술로 시인해야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말씀 기억하시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그래요, 마음으로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나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지 않습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비전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입술로 선포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과 나눠야 합니다.

법정으로 끌려갈 때/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성령님이 그 때 그 때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대답하며”의 원어 ‘아폴로게세스데’는/ 법률 용어로/ 법적으로 자신을 옹호하거나 변호하는 발언을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우리 입에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말씀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기적을 일으켜서/ 재판정을 둘러엎고/ 감옥 문을 때려 부수고/ 핍박자들을 단칼에 날려버리겠다고 하지 않고/ 너무나 평범하게/ 마땅히 할 말을 너희에게 가르치겠다고 하니까/ 조금 실망스러우시죠?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실제로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와서 그를 풀어주었습니다.
또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적적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늘 하나님의 역사가/ 기적과 표적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보내신 목적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세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5장 26절을 보세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6장 13절을 보세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보세요. 성령이 오신 목적이/ 철저히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부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럼 위기의 때에만/ 성령이 말씀을 주십니까? 핍박과 박해를 당할 때에/ 비로소 성령이 말씀을 생각나게 해줍니까?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오늘도 말씀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말씀을 증거하시는 분으로/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현재 말씀 양육과/ 제자훈련을 받으시는 분들은/ 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더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성령님의 영감 없이는 풀 수 없습니다.
또한 가족 구원과 이웃 전도에/ 관심이 많은 분들/ 역시 더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자들의 입술을/ 권세 있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받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시는 분/ 역시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합니다.
이건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누구도 제자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증거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예수님의 이름을 널리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