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삶 (1) 눅12:1-6
이번 주부터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저는 가끔 ‘내가 설교자로서 무엇을 남겼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목사가 된 후의/ 설교 사역만 해도 7년이 다 되었지만/ 돌아보면 특별히 눈에 띌만한 것을/ 남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 있긴 한데/ 설교원고입니다. 저는 설교만 열심히 하면/ 모든 교인들이 주님의 제자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설교 원고는 쌓여가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교인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 참 괴롭기만 합니다. 제가 사역자를 세우는 것을/ 첫 번째 교회비전으로 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사실 양육이야 해왔지만/ 제자훈련은 저도 처음입니다. 남자 제자훈련반에서 밝혔듯이/ 인도자나 훈련생이나/ 초행길이긴 매 한가지입니다.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부담되고/ 훈련생들이 잘 따라올 수 있을지 걱정되는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가장 집중하셨던 일이/ 소그룹으로 하는 제자훈련이었기에/ 저도 그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교회는 올해부터/ 설교와 소그룹 사역이란/ 두 날개를 달았습니다. 하지만 제자훈련으로서 소그룹사역은/ 처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소 어설플 수 있습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먼저는 훈련생들이 참아 주어야 하고/ 참여하지 않는 분들도 인내심을 갖고/ 기도로 협력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충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깊이를 더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뛰어난 영향력과 튼튼한 체력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신자와 제자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 안에 신자는 많은데/ 그리스도의 제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를 잘 믿고/ 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그런대로 잘 하는데/ 정말 주님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희생하기까지 하는/ 주님의 제자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삶을 산다면/ 세상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조차/ 바보 취급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 가면서 믿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제자의 삶은/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제자로 살아야 하지만/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제자의 길은 자기희생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제자의 문은 자기부인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자의 삶은 자기포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제자훈련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 그거 쉽지 않습니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제자훈련 장소로 뛰어오는 것/ 보통 결단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만 해결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게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장차 핍박이 닥칠 때/ 어떻게 대처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결단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화 있을 진저, 너희 율법사들이여”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그래도 그들에게 희망을 거셨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면/ 구원에 이르렀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는커녕/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말로 힐문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켰습니다.
여기서 “잡고자 하여”의 원어 ‘데류사이’는/ 사냥에서 잡다는 말이고/ “지키더라”의 원어 ‘에네드류온테스’는/ 사냥감을 포획하기 위해서 매복해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말 한 마디만 잘못하면/ 어떻게 해보겠다며/ 덫을 놓고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런 못된 사람들이 다 있냐’ 하는 생각이 드세요? ‘뭐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들이 저럴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드세요?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 그 동안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더듬어 보세요. ‘축복하는 말씀’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씀’ 앞에서야/ “아멘”을 하셨겠죠? 문제는 죄를 지적하고/ 그릇된 삶의 자세를/ 호되게 책망하는 말씀 앞에서도/ “아멘”하셨느냐 말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느냐 말입니다. 혹시 한 동안 시험에 들어/ 설교자를 좋지 않은 감정으로/ 대했던 적은 없었습니까? 설교자에게 맹렬히 달라붙어/ 힐문하고 싶은 충동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모여든 무리 본문은 11장의 말씀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1절 앞부분을 보세요.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여기서 “그 동안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게/ 책망하고 있을 동안을 가리킵니다. 그 때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을 겁니다. 독실하고 경건한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나사렛 출신 예수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요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겁니다. 평상시에 그들을 싫어했던 사람들은/ 통쾌한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겁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 필요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로 병을 고치기 위해서/ 아니면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고/ 혹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보고/ 하도 답답해서 하루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라고/ 말씀하신 적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보다/ 더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적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자들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율법은 지켰으나/ 정말 중요한 율법의 정신은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명예욕과 자기 과시욕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속에 있는 더러움으로 인해/ 다른 사람까지 오염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요구를 하지만/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은 선지자들의 묘는 꾸미면서/ 정작 지금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은 핍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천국에 자기가 들어가지 않으면서/ 남까지도 못 들어가도록 막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교회성장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 성장이 하나님의 뜻이라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양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늘 그 상태로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건 현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 성장이/ 단순히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을 말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인수 몇 명 늘었다고 기뻐하고/ 몇 명 줄었다고 슬퍼할/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실제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들/ 수백명 모아놓으면 뭐합니까?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몰려온 사람들/ 수백명 모여 있으면 뭐합니까? 그리 많지는 않아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있어야죠.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주님과 주의 몸된 교회에 헌신하는/ 주의 제자가 있어야죠.
말씀을 잘 보세요. 서로 밟힐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주님의 시선은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주님은 다수의 사람들을 제쳐주고/ 소수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주관심이/ 어디 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오천남부교회 믿음의 식구 여러분, 주님의 시선이/ 여러분 위에 머물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나 교인 수준에/ 머무르려고 하지 마세요. 겨우 지옥을 면한 정도로/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믿으면 재미없습니다. 순간순간 갈등이 많습니다. 제대로 한 번 믿어보세요. 확실하게 믿도록 하세요. 그러면 고난도 있겠지만/ 그 고난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습니다.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손실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령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외식하지 말라 제자로 살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1절 맨 뒷부분을 보세요.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제자가 주의해야 할 첫 번째는 외식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냥 외식이라고 하지 않고/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을 누룩에 비유하신 겁니다. 누룩은 우리가 알다시피/ 반죽에 넣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룩을 반죽에 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발효를 위해섭니다. 특히 40도를 오르내리는/ 그 지역의 기온을 감안한다면/ 누룩이 반죽을 금방 발효시켰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여러 기준이 있었겠지만/ 주로 순박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닳고 닳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단순하고 순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었기에/ 비록 이해하는 속도는 떨어졌으나/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순진하다보면/ 어떤 것에 쉽게 빠져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아셨기에/ 언젠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제자들은 단순하고 순박한 만큼/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제자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육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꼭 교실에 가서/ 아니면 회당에 가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육과 지식전달은 다릅니다. 교육에 지식전달이 포함되긴 하지만/ 지식전달과 교육은 다릅니다. 학교교육의 문제가/ 인성교육을 도외시하고/ 지식전달에 그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교육이 학교교육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실패한 학교교육을/ 본받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성경 조금 더 알면 어떻고/ 덜 알면 어떻습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모르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성경 좀 안다고/ 교만하게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교회 교육이 지식전달 위주로 흐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지 말고/ 예수님을 가르쳐야 하고/ 내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제자들에 대해 가르치지 말고/ 제자들이 어떻게 살았고/ 내가 제자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순수함을 높이 사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소재로 하여/ 주의를 시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본받을까 싶어/ 미리 경계하셨습니다. 원래 사람은 나쁜 영향에 물들기 쉽습니다. 나쁜 것을 빨리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 “외식”의 원어 ‘휘포크리시느’는/ 그리스 연극에서 사용되었던 말로서/ ‘배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매가 계속해서/ 청순한 배역을 맡으면/ 실제로 그녀가 청순한 자매인 줄 압니다. 또 어떤 형제가 터프한 배역을 자주 맡으면/ 실제로 그가 터프한 사람일 줄 압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배역에서의 모습과/ 실제의 모습은 엄연히 다릅니다. 배우는 자신의 성품과는 관계없이/ 대본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질수록/ ‘천의 얼굴’이라고 하여/ 뛰어난 배우로 쳐줍니다.
외식이란 말은/ 실제의 자신이 아닌/ 분장된 자신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척’하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자기를 꾸미는 것입니다. 속에는 탐욕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한 척/ 속에는 악독으로 가득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을까요? 미리 주의를 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자들에게 그런 모습이/ 조금씩 보여지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누룩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순식간에 퍼져나갑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합니다. 중단시킬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 누룩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지/ 이미 시작된 발효를/ 중간에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외식은 주님의 제자가 지녀야 할 게 아닙니다. 정말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외식하지 않아야 합니다. 외식에서 떠나야 합니다. 위선의 탈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내 안에/ 바리새인의 누룩이 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외식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삶에 위선적인 요소는 없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외식하는 사람의 특징은 말을 많이 합니다. 또 거짓말을 잘합니다. 또 만나는 사람에 따라 말을 달리 합니다. 그때 상황에 따라 적당히 넘깁니다. 그러나 그게 끝까지 가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2-3절을 보세요. 12: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2: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이게 외식하는 자의 결국입니다. 이게 위선을 행하는 사람의 끝입니다. 오래가는 듯하나/ 실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끝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으나/ 머잖아 드러나고 맙니다. 여기서 “감추인”의 원어 ‘슁케칼튐메논’은/ 모든 면을 완전히 덮어 버리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안전히 감추려고 해도/ 결국은 드러나게 되고/ 아무리 철저히 숨기려고 해도/ 결국은 알려지게 된다는 주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속마음을 감추고/ 이중생활을 연기한다고 해도/ 때가 되면 다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드러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들춰내십니다. 아무리 꼭꼭 숨겨도 소용없습니다.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 앞에/ 그 어떤 것을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드러나고야 맙니다. 아무리 어두운 데서 말 한 것도/ 밝히 드러나게 되고/ 아무리 골방에서 귓속말로 말한 것도/ 결국은 공개되고야 맙니다. 하나님의 카메라는/ 사각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녹음기는/ 귓속말까지 담아낼 수 있는 고성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는 물론이고 사람에게도/ 눈가림으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만 외식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5절을 보세요. 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3: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3: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22절의 말씀처럼 “모든 일”입니다. 23절의 말씀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종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고용된 사람에게만 주신 말씀도 아닙니다. 24절의 말씀처럼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행한 대로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 때/ 하나님이 두려워집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제자로 살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점이 또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세요.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겠어요?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맹렬히 달라붙어 힐문하고/ 어떻게 하려고 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나오네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친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진실한 친구입니까? 항상 가까이 있어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입니다. 무엇보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실한 친구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친구 너희에게”
사랑하는 오천남부교회 믿음의 식구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자신의 뒤를 따르는/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세상사에 찌들리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믿음대로 행해보려고 몸부림치고/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십니다. 아멘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래요,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고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용기백배해야 합니다.
또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막말로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람은 몸을 죽이는 것/ 그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실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에 벌벌 떠는/ 우리에게 와 닿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실제로 삶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 합니다. 생명을 하루라도 더 연장하고 싶어 합니다. 이제는 가실 때도 되었다 싶은 사람인데도/ 몸에 좋은 약이라면 기꺼이 사서 먹습니다. 값을 따지지 않습니다. 헌금할 땐 손이 떨리는데/ 보신을 위해서는 담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요/ 우리가 죽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사는 것만 하나님의 뜻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찾아오는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저에게 허락해 주세요” 라구요.
죽을 때의 믿음이/ 그 사람의 진짜 믿음입니다. 죽을 때 두려워한다면/ 그는 실제로는 천국을 믿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고/ 꿈에도 그리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걸 믿었던 초대교회 신자들은/ 순교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었으면 되었지/ 그들은 살려고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산 사람의 몸에 천을 두르고/ 거기에 기름을 발라 연회장을 밝히는/ 인간 횃불이 되었으면 되었지/ 그들은 살려고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면 죽고 싶어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살고 싶어도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죠. 빌립보서 1장 20-21절을 보세요.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따라해 보세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최배송 씨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게 중요합니다.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게 중요합니다. 편안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아멘입니까?
사단은 항상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고자 합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죽음의 공포에 빠져/ 헤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게 사단의 전략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죽고 사는 문제를/ 벌써 하나님께 맡긴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도 있나봐 요? 하나님이 보시고/ 우리가 이 땅에 필요하시면/ 우릴 살려두실 것이고/ 우리가 천국에 필요하시면/ 우릴 데려가실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을 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죽고 싶어 소동을 벌여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 그 자체도 아닙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걸 예수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5절을 보세요. 12:5 마땅히 두려워 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말씀을 잘 보면/ “그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강조하기 위해서죠? 따라해 보세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암이 참 무섭습니다. 그러나 그 무서운 암도/ 사람을 죽음 이후까지 주장하지는 못합니다. 전쟁이 또 얼마나 무섭습니까? 지금 이라크나 북한이/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전쟁이 사람의 죽음 이후까지 간섭하지는 못합니다. 세상의 재난이 무섭습니다. 수재나 화재, 생각만 끔찍합니다. 그러나 재난이 아무리 무서워도/ 죽음 이후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 이후까지/ 주장하시고 간섭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어떻습니까?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자들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6-7절을 보세요. 12:6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12:7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당시에 참새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너무나 흔해서 두 앗사리온만 내면/ 참새 5마리를 살 수 있었습니다. 아마 한 앗사리리온에 2마리였을 것 같고/ 한 마리는 그냥 끼워 주었겠죠?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흔해빠진 참새 한 마리까지도/ 기억하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또 그 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금발의 머리털은 약 14만 5천개/ 검은 머리털은 약 12만개/ 붉은 머리털은 약 9만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에 약 200개 정도가 빠지고/ 빠진 만큼 다시 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다 세신바 되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를 어떻게 참새에 비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어떤 상황 앞에서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음을 믿고/ 결코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서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에필로그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적당히 예수 믿으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왕 믿는 것 제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인 수준에 머무르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죠? 첫째 외식하지 않아야 합니다. “~척”하는 삶을 살지 마세요. 위선의 탈을 벗어 던져버리세요. 자기 가면을 벗어버리세요. 피곤하게 두 얼굴로 살지 마세요. 둘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직도 사람이 두려우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는 하세요. 타인의 입장을 존중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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